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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님 죽음 실제로 먹는 방법>의 줄거리: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버린 것과 수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며 예수님을 향하여 저주까지 퍼 부은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들과 우리들의 차이는 또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이 두 경우의 공통점이면서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실제 충격입니다.
예수님 죽음 실제로 먹는 방법
(마태복음 26:17~30)
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30.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님 죽음 실제로 먹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님 죽음 실제로 먹는 방법’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고 좋은 것은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은 어떤 음식에도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음을 느끼게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의 죽음처럼 우리에게 맛있고 유익하며 좋은 것은 없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저녁식사를 나누시는 장면입니다. 이 최후의 만찬은 지금도 성만찬으로써 기려지고 있으며 떡과 포도주를 먹으면서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는 의식입니다. 그런데 이 성만찬의 의식은 사실 참 어렵습니다. 목회를 할 때에는 성도님들에게 이 성만찬의 감동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를 숙제처럼 생각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26절에서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만찬을 하는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께서는 성만찬을 마치시고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계십니다. 한편 앞선 본문에서는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로 마음먹었다는 기록이 있었고 그와 대비되게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린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네 차례에 걸쳐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스라엘을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독립시키시고 다윗 왕국을 재현하시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임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3년 동안이나 동상이몽을 해왔던 제자들에게 최후의 만찬을 통해서 십자가 사건을 받아들이기를 요청하십니다.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처럼 예수님의 죽음을 먹으라는 의도에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을 떡으로 흘리신 피를 포도주로 비유하신 이유는 우리에게 성만찬이라는 예식을 정해주시려는 의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답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마치 음식을 먹고 음료를 마시는 것처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성만찬은 지루하고 의미 없는 예식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먹지 못하면 성만찬 예식도 형식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성만찬 예식은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게 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역할을 한다고 인식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에 머물러 있다면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함이 성만찬 예식에서만 국한 될 위험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이러한 예식을 제정하실 목적으로 떡과 포도주를 피와 살이라고 언급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삶 속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가르쳐주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멈추지 않고 계속되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인식을 가질 때에만 성만찬 예식 또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밥을 먹고 물을 마셔야 하듯이 꼬박꼬박 예수님의 죽음을 먹고 마셔야 함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붙잡아야만 하는 핵심 주제는 성만찬 예식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먹는 방법입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립니다만 우리의 의식이 성만찬이라는 예식에 묶여있다면 예수님의 죽음을 먹고 마시는 것은 생활화 될 수가 없습니다. 저 자신 또한 이러한 의식에 묶여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떡과 포도주를 피와 살이라 말씀하시며 26절에서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하셨고 또한 27절에서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실 수 있을까요? 이는 곧 십자가 생활화의 의미와도 일치합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계속해서 먹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소가 죽어야만 합니다. 또 쌀밥을 먹기 위해서도 쌀을 끓는 물에 푹 삶아서 죽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은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마음의 양식이 되셨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고 제일 좋은 양식입니다.
앞서 우리는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사건과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로 결심하는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본문 2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만찬을 시작하시기에 앞서 친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건들이 예수님을 먹는 방법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공생애 때에 기적을 일으키시던 예수님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믿을 때에만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해서도 올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죽으신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유다가 원했던 예수님은 나라를 식민지로부터 독립시키고 다윗 왕국의 전성기를 성취시킬 분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능력과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님만을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죽음을 반복하여 예고하시고 그것이 확실하다고 여겨지자 예수님을 버리게 됩니다.
이러한 유다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24절에서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룟 유다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무관하거나 필요 없다고 여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들은 가룟 유다는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은 사람들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가룟 유다와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기적만을 바랄 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아무 필요가 없다고 여깁니다.
반면 마리아는 죽으실 예수님께 가장 아깝고 소중한 것을 드립니다. 마리아가 드린 향유는 노동자의 일 년치 품삯에 해당되는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었습니다. 그 귀중한 향유를 죽으실 예수님께 부어드립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생산성이 전혀 없는 투자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아깝게 여기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반대로 마리아는 죽으실 예수님 때문에 아깝게 여기는 것을 버렸습니다. 이 두 사람의 마음가짐으로부터 기독교의 신앙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죽으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예수님을 먹는 것입니다.
이제 마리아의 마음가짐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먹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라는 것을 사실로 믿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나의 배우자는 사실로써 존재합니다. 나의 자녀도 사실로써 존재합니다. 내가 직장에서 부장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들보다 더 우선적인 사실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나의 죽음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에 나에 대한 최우선의 사실입니다.
이 사실에 마음을 드리는 것이 바로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 사실에서 벗어나는 것만큼 삶은 거짓이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배우자를 대할 때에 배우자에게 하는 모든 말은 거짓말이 됩니다. 또 부장으로 직장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가장 우선적인 사실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벗어나서 경험 많은 부장이라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활동한다면 그 모든 활동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거짓입니다. 그럴 때에 직장생활은 힘들고 지루해집니다. 거짓 위에 서있는 동안에는 부부생활도 직장생활도 천국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곳에 있든 최우선되어야만 하는 사실은 내가 바로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최우선적인 사실로 인정할 수 없다면 예수님의 죽음을 먹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마리아처럼 마음에서 아깝고 소중하게 여겨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 옥합을 깨뜨렸듯이, 우리는 마음에서 소중하게 여겨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적용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돈은 모든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대상입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돈이 가장 소중하게 여겨지는 동안에는 결코 예수님의 죽음을 먹을 수 없습니다. 시시각각 마음에서 소중하게 여겨지는 모든 대상에 대해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예수님의 죽음을 먹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우선적인 사실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마음에서 아깝게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 적용함으로써 마음으로부터 그것들이 물러나게 됩니다. 은행에 있는 돈을 빼서 바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우선 은행에 있는 돈에 대해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은행에 있는 돈을 빼낼 때에 예수님을 최우선적인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예수님의 죽음을 먹었다는 기운이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의 동선을 따라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힘이 주어지게 됩니다.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벗어나서 예수님이 계신 천국을 체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이 떠난 삶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힘이 내려오시게 됩니다. 하나님의 힘이 내려와서 이 세상의 삶을 진행해나가실 것입니다.
삶에서 예수님의 죽으심 먹기를 철저하게 적용한다면 이 세상의 삶은 공짜가 됩니다. 천국 가는 것도 공짜가 됩니다.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 마음은 천국에 들어가게 되고, 이 세상에서의 삶은 하나님으로 힘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삶을 살고 있지 못하다면 예수님을 먹음이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천국을 느끼지도 못하고 복지를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성만찬 논쟁은 끊임없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초기 교부들은 실재설을 주장했습니다. 이후에는 상징설이 나타났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성찬식 때 먹는 떡과 포도주가 순간적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주장합니다. 종교개혁자인 츠빙글리는 기념설를 주장하였고 루터는 기념설과 화체설을 조화시킨 공재설을 주장하셨습니다. 제가 속한 장로교의 캘빈은 영적 임재설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들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성만찬 이론을 주장하든지 그것은 믿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문제는 실제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먹었느냐는 것입니다. 삶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가장 우선적인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고, 또한 삶에서 아깝게 여겨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 이 사실을 적용할 수 없다면 예수님의 죽으심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그럴 때에 마음을 하늘로 올려 보낼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힘으로 살게 되는 역사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나타날 수 없다면 어떠한 성만찬 이론을 주장하더라도 천국에는 갈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교부들과 신학자들의 성만찬 이론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이론을 두고 서로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먹는 일입니다. 성만찬 예식이 식상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바로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예수님의 죽음을 먹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의 믿음은 성경에서 제시되고 있는 대로 십자가 생활화로 통일될 수 있습니다. 또한 복음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단 하나의 구심점은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이것은 누구의 이론도 아니며 성경이 전하는 단 하나의 복음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알라딘의 요술램프가 아닙니다. 요술램프는 이 세상에서 소원하는 것들을 이루어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내가 아깝게 여기는 모든 것들을 다 버리게 합니다. 꿈과 소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먹을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과 자동적으로 약속에 의해서 연합하게 됩니다. 그리고 승천 예수님과 연합하게 되고 우편 예수님과 연합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죽음을 먹을 때에 우리는 마음으로 세상에 대한 어떤 소원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로부터 무한한 자유가 생겨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지는 것보다도 훨씬 행복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소원이 예수님의 죽음에 가로막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복 중의 복이고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소원대로 이루어지는 것만큼 불행하고 저주스러운 삶은 없습니다. 마음이 시간과 공간의 세상에 끝없이 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먹을 때에 마음은 천국을 느끼게 되고, 이 세상의 삶에 대해서는 내 소원이 아닌 하나님의 소원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정리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먹는다는 것은 첫 번째로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라는 것을 사실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최우선의 사실입니다. 두 번째로 마음에서 아깝고 소중하게 여겨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이 사실을 적용하며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은 내가 가장 아깝게 여길 분이 되어주실 것이며 우리의 마음에는 천국이 임하고 삶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중시해야 하는 일은 성만찬의 예식이 아닌 실제로 예수님의 죽음을 먹는 것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날마다 예수님의 죽음을 먹게 하여 주심으로써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가장 우선적인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 마음에서 아깝게 여겨지는 모든 대상들에 이 사실을 적용함으로써 예수님의 죽음을 맛있게 먹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