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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올바로 배우는 겟세마네기도>의 줄거리: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의 정석. 혹은 기도 마무리의 정석이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그런데 아십니까? 우리는 이 기도를 곧바로 따라할 자격이 안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예수님이 느끼시는 고통이나 슬픔이 우리의 고통이나 슬픔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느낌의 편차를 고려하면 기도도 달라야 합니다.
올바로 배우는 겟세마네기도
(마태복음 26:36~46)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올바로 배우는 겟세마네기도>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올바로 배우는 겟세마네기도’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는 기도의 정석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 이 기도를 문자 그대로 따라하시는 분들도 많으실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를 배워야만 합니다. 다만 이 기도를 문자 그대로 따라하는 것만으로는 올바른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은 13일의 금요일로써 서양에서는 불길한 날로 여긴다고 합니다. 그러나 겟세마네의 기도를 올바르게 배워서 할 수 있다면 이러한 사소한 미신이나 징크스를 이겨내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 삶에서 존재하는 어떠한 불안이나 두려움도 극복해나갈 수 있습니다.
겟세마네는 기름 짜는 틀이라는 의미를 가진 아람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이름대로 마음을 쥐어짜는 경험을 하시게 됩니다. 예수님에게 임한 두려움과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 땀에 피가 섞여 나올 정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극한의 두려움과 슬픔에 도달하셨음을 상징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살면서 슬픔을 당한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땀에 피가 섞여 나왔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마주하신 큰 슬픔과 두려움은 인류역사상 전례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슬픔과 두려움 자체가 아닙니다. 그렇게 엄청난 슬픔과 두려움이 찾아오게 된 이유입니다. 언뜻 생각하기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실 육체적 고난 때문에 두려워하셨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육체적 고난으로는 예수님 못지않은 고난을 받은 인물들이 성경에 다수 등장합니다. 대표적으로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현장을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어가는 와중에도 하늘이 열리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얼굴이 천사와 같이 되었습니다. 십자가 형벌이 로마의 가장 잔혹한 형벌이었음은 분명하지만 스데반 집사님이 당한 순교의 고통도 이보다 못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먹보다 큰 돌을 가지고 줄을 서서 죽을 때까지 머리를 내려치는데도 평강이 유지된 스데반 집사님의 모습은 오늘 본문의 예수님과 대조적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단순히 육체적 고통을 예감하시고 이토록 괴로워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은 마음의 고통이었습니다. 아직 육체의 고통은 임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마음의 고통은 바로 저주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에게 내려진 모든 저주의 자리로 가셔야만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일체이셨습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로 마음을 채우고 계셨고 이 땅에 오신 후에도 그러한 관계는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아기이셨을 때에도 그 마음을 채우셨던 것은 하나님이셨을 것입니다. 몸이 미성숙하다고 해서 마음까지 미성숙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에 아기라고 할지라도 마음에는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신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원죄와 무관하시기에 언제든 하나님과 동행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저주의 자리로 가셔야만 했습니다. 이 저주의 상태란 바로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은 비어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일체되심은 중단되고 하나님 아버지가 마음으로부터 빠져나가심으로써 모든 인류가 처해있는 저주의 자리로 내려오시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께서 극한의 슬픔과 두려움을 느끼셨던 이유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9절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십니다. 표현상으로는 이 고난을 피하고자 기도를 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일이 하나님의 계획에 반드시 필요하며 피할 수 없는 없는 일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곧 이어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획을 모르지 않으셨고 그 계획이 변경될 수 있다고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마음에서 하나님을 잃는 일이 세상에서 다시없을 만큼 괴로운 일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불행하게 여기는 일들은 거의 육체의 연관성 아래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부모에게 가장 불행한 일은 자녀를 앞세우는 일입니다. 그리고 불행한 일은 갑자기 암에라도 걸려 시한부선고를 받게 되는 일입니다.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에게 가장 불행한 일은 스캔들이 터져서 인기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가장 불행한 일은 마음에서 하나님을 잃게 되시는 것을 다시없는 슬프고 괴로운 일로 여기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좀 더 풀어서 해석해보자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나의 마음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잃는 일은 땀에서 피가 섞여 나올 만큼 너무나 두렵고 슬프고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 저주의 자리로 가야만 인간들을 구원할 수 있다면 그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풀어놓고 보면 이 기도는 우리가 그대로 따라 할 수 없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슬픔과 고통을 느끼는 이유가 예수님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원인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동일한 기도를 반복한다고 하여도 하나님 앞에 상달될 수는 없습니다. 먼저 나라는 존재와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이 기도는 성립될 수조차 없습니다. 적어도 예수님이 누구시며 예수님의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아야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의 의미 또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과 풍랑만난 배위에서의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을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극한의 두려움을 겪으셨지만 제자들은 잠에 빠졌습니다. 한편 제자들은 풍랑만난 배위에서 극도의 두려움을 느꼈지만 예수님께서는 깊이 잠들어 계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상황이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풍랑을 위기로 느끼셨고 제자들은 육체의 풍랑을 위기로 느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기준에서는 어떠한 재난이나 사고도 하나님으로 채워진 마음의 평강을 깨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설령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들인 이상 하나님이 들어와 계신 사람의 마음의 평강과 기쁨은 깨어지지 않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에서 드러난 평강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풍랑 속에서 잠을 주무시던 예수님과 같은 마음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육체의 연관성 아래에서 걱정하고 염려합니다. 돈 문제나 건강 문제와 같은 일들이 슬픔의 대부분의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슬픔을 느끼는 진짜 원인은 돈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고 건강이 나쁘기 때문도 아닙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채워지시지 않았기 때문에 슬픔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빈자리 때문에 돈 문제라는 풍랑이 생겼을 때에 잠을 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 채 돈 문제라는 풍랑만을 바라보며 두려워하기가 일쑤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마음에서 하나님 잃을 것을 두려워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의 자리가 비어있는 상태로 살아왔던 제자들은 슬프고 두려워하기는커녕 편하게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가장 큰 문제였던 하나님 잃기가 제자들에게는 문제조차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놓고 보면 우리의 기도의 방향이 명확해집니다. 우리의 삶에는 언제나 문제가 가득합니다. 돈 문제, 건강 문제, 자녀 문제, 취직 문제, 승진 문제 같은 것들이 마음에 슬픔과 걱정을 가져다줍니다. 그럴 때에 그러한 문제의 해결을 바라고 기도하는 것은 풍랑을 만났을 때의 제자들의 모습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이 문제들을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한다면 훌륭한 일입니다만 이것으로는 온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올바른 겟세마네 기도를 한다면 예수님의 슬픔과 두려움을 느끼신 이유를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문제들을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는 기도는 어디까지나 마음이 문제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입니다. 먼저 나 자신이 문제의 해결을 추구할 상태가 아님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상반된 마음을 가진 상태에서는 예수님의 기도를 따라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나를 위한 기도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가 생긴 사람이 있습니다. 기존에 배운 대로 기도를 하자면 “하나님! 돈 문제 때문에 저의 마음에 두려움과 슬픔이 생겼습니다. 이 문제가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내용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기도를 드린다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 저의 문제는 돈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제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돈 문제가 어떻게 되어도 아무 상관없을 만큼 하나님이 제 마음에 들어와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자녀 문제, 건강 문제를 비롯한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이러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마음의 평강이 깨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하나님을 모실 수 있으면 평강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가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은 기도의 초점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삶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에 하나님의 자리가 비어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빈자리가 생기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땀에서 피가 섞여 나올 정도로 슬퍼하고 두려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자리가 비어있음에 대해 무감각하다면 그것은 올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지구의 75억 인구가 사는 모습을 보면 모든 사람이 삶의 문제에 마음이 얽매여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문제가 되고, 경제가 문제가 되고, 누가 국회의원이 되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도 보수냐 진보냐를 가리며 다툼을 벌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믿음이 있다면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보수가 정권을 잡든 진보가 정권을 잡든 우리 마음에서는 평강이 깨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의 빈자리가 하나님으로 채워져야만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신경 써야 할 유일한 과제입니다. 누가 정권을 잡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그로인해 걱정하거나 근심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인의 태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인들 중에서도 정치색을 두고 서로를 비난하는 일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풍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가짐은 올바른 믿음이 아니기에 구원받을 수도 없습니다.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는 일보다 추종하는 정치세력이 정권을 잡는 일에서 기쁨과 만족을 느끼려 하니 마음에 평강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하고 있으니 겟세마네 기도를 잘못 배운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권자이심을 인정한다면 정치색을 두고 서로 반목할 이유도 없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대처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스크를 쓰고 손 씻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니 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는 바로 마음에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마음의 평강이 깨어지지 않을 만큼 하나님으로 채우고자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믿음의 태도일 것입니다.
우리는 앞서 재림과 종말에 관련하여 큰 환란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환난이란 마음 속 하나님 크기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은 눈으로 보이는 환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밀레의 만종을 연상케 하는 두 여인이 맷돌질을 하고 두 사람이 밭에서 일하는 일상 속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상 속에서 예수님이 겟세마네 기도에서 느끼시는 것과 같은 환난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비어있는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고자 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질 수 없는 이유는 세상에 대한 확고한 믿음 때문입니다. 말씀드렸듯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의 예수님의 마음은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이는 첫 사람인 아담도 예외가 아닙니다. “제가 에덴에서 쫓겨나서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된 상태로는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 바에야 차라리 죽여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지고 세상이 끝날 때에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보며 이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세상을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에게 사탄이 개입하여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 크기의 마음의 빈자리를 세상의 가치로 채울 수 있다고 유혹하였습니다. 아담에게는 아내인 하와가 마음을 채울 대상이 되었고, 하와에게는 남편인 아담이 마음을 채울 대상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이들의 마음을 애인으로 채울 수 있다고 믿게 하고, 혼기가 차면 결혼으로 채울 수 있다고 믿게 합니다. 결혼 후에는 자녀를 낳아서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게 합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는 돈을 벌어서, 출세를 해서, 성공해서, 명품을 사서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빈자리를 얼마든지 세상의 가치들로 채울 수 있다는 거짓말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이 믿음 때문에 하나님의 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예수님처럼 고통과 슬픔으로 느끼질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에서 하나님의 빈자리가 비게 되는 것을 땀에 피가 섞어 나올 정도로 괴로워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의 자리가 비어있던 제자들은 잠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거짓말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기도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마음가짐을 되찾는 기도가 되어야만 합니다.
예를 통해 말씀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돈 문제가 생긴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에서 돈 문제 때문에 걱정이 생겨납니다. 그래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기에 “돈 문제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는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여전히 돈을 문제로 삼는 나 자신은 예수님과 전혀 다른 상태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돈 문제가 내 뜻대로 되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되든지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선적으로 문제시 되어야만 하는 것은 돈 문제를 풍랑으로 여겨서 평강이 깨어져버린 나의 마음상태입니다. 아무리 돈 문제가 크더라도 스데반 집사님이 당장 돌에 맞아 죽는 상황만큼 급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마음은 스데반 집사님과는 달리 평강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마음상태가 문제시 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건강 문제나 자녀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마음의 평강이 깨어질 때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를 떠올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 세상의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평강이 깨어지지 않을 만큼 내 마음의 빈자리를 하나님으로 채워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문제에 대해 죽은 자임을 고백합니다. 아버지로 채워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세상의 문제도 비로소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이끌려져 갈 것이고,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시든 우리의 마음에는 평강이 깨어지지 않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가 올바르게 드려지는 모습입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진짜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를 문제로 느끼는 내가 진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빈자리를 문제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기 전에 예수님과 같은 마음가짐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고 스데반 집사님, 사도 바울, 베드로 사도가 그러하였듯이 하나님으로 채워짐을 우선시할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어떻게 나타나든 평강은 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생활화의 기도입니다.
주기도에서도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 전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가 먼저 있었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 기도가 오늘 우리가 살펴본 본문의 말씀과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붙잡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는 것입니다. 이 기도로 오늘도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로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게 하여 주셔서 내 마음에 문제로 느껴지는 이 세상의 모든 풍랑들 앞에서 반응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내 마음에 하나님이 들어오시는 문제를 우선적으로 기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