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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

녹취문: 십자가 향한 계획적 무저항_태승철 (마태복음 26:47~56)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3.18|조회수84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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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 향한 계획적 무저항>의 줄거리:

검과 몽치를 들고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그 어떤 저항도 하지 않으시고 자발적으로 체포되십니다. 전혀 저항의 의지가 없는 예수님을 더 이상은 따를 수 없었던 제자들은 모두 다 도망가고, 이제 홀로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승리를 위해 세우신 전략은 왜 이렇게 실행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십자가 향한 계획적 무저항

(마태복음 26:47~56)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 향한 계획적 무저항>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 향한 계획적 무저항

십자가는 일종의 전쟁이고 싸움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은 전쟁의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의 본격적인 시작은 붙잡히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세상의 모든 전쟁은 포로로 붙잡히는 쪽이 지는 것으로 종료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인 무저항으로 체포되심으로써 세상에서 유래 없는 전쟁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본문 앞부분을 보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넘기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51절을 보면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제자가 베드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기회를 타서 적들을 물리치거나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누가복음을 보면 그 귀를 다시 붙여주시는 기적을 행하시고 베드로를 나무라십니다. 그 내용이 52절의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무저항으로 잡히신 예수님의 모습은 마치 인도의 국부로 불리는 간디를 연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셨던 일은 간디와 같은 비폭력적 독립운동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칼은 나를 보호하고 나의 지경을 확장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모든 수단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통해 52절의 말씀을 풀어보자면 나를 지키려하거나 확장하려거나 관철하려는 모든 자는 망할 것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자면 저항을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공격을 받아들여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는 지경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수행하신 전쟁의 방식이었습니다.

 

한편 53절을 보면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취하고 싶으신 것이 있었다면 얼마든지 취하실 수 있었습니다. 창조주의 아들로써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기 때문에 삼성이나 LG 같은 회사의 자산도 예수님의 소유에 지나지 않습니다. 빌게이츠가 아무리 큰 재산을 보유하고 있을지라도 애초에 빌게이츠의 생명이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 재산 또한 예수님의 소유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정당한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전쟁에서는 그러한 능력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한 군단은 보병 6,000명과 마병 726명으로 이루어져있었다고 합니다. 열두 군단이면 보병 7만 명에 마병이 8천 명에 달하는 대군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이러한 능력이 전혀 필요치 않았습니다. 이는 곧 52절에서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숫자에 의지해서 승리하려는 자는 숫자에 의해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와 다름없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이 보이신 무저항의 태도는 세상에서는 나타날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세상에서는 나를 보호하고 나의 지경을 확장시키며 나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행동과 힘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시려는 일에 대해서는 이러한 세상의 논리는 필요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서도 나타나야만 합니다. 예수님처럼 세상에 저항하지 않고 무저항으로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없다면 영적인 싸움에서는 결코 승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무엇과 싸우고 계셨던 것일까요? 바로 인류에게 임한 저주와의 싸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대신하여 저주와 싸우기 시작하셨습니다. 모든 인간이 자신에게 임한 저주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길을 만드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대로 하면 나에게 임한 저주를 이길 수 있고 벗어던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의 과제는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대학에 합격하기, 훌륭한 직장에 취업하기, 멋진 이성과 결혼하기, 자녀를 엘리트로 키우기, 국회의원 같은 권력자가 되기 등은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빠짐없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인생의 목적은 바로 저주에서 벗어나기입니다. 저주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낙원의 삶을 살아갈 것이고, 육체가 죽어서도 하나님이 계신 낙원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이루려 애쓸 필요 없이 저주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됩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저주가 임할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애초에 저주를 가지고 사는 인류이기에 이러한 발상은 어처구니없습니다. 이미 본질적이고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저주가 임했음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삶의 과제 또한 이 저주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늘과 관계를 막고 있는 이 저주만 뚫리면 우리는 공짜로 낙원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총력을 기울여야 할 일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저주를 없애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 저주를 없앨 수 있는 길을 만드셨고 그 시작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싸움의 내용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말씀에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괴로워하신 이유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이 모든 인간이 처한 동일한 저주 속에 던져지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인류는 아담의 원죄로부터 이 저주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지만, 성령으로 잉태하신 예수님께서는 아담의 원죄와는 무관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에게 저주를 극복하는 길을 만들어주시기 위해서 같은 저주 속에 던져지셨던 것입니다.

이 저주란 마음이 하나님과의 밀착상태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고 하나님이 들어와 계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저주는 인간에게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큰 환난입니다. 그리고 저주의 또 하나의 큰 문제는 우리가 이 환난이 임했음을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환난이란 삶의 환경을 나쁜 쪽으로 변화하게 하는 사건입니다. 다만 내게 정말 소중하고 아깝게 여기는 대상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어떤 큰 사건도 환난으로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내가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일에 큰 해를 끼친다면 큰 환난이 됩니다. 설령 핵전쟁이 일어나도 소중한 가치를 하나도 잃지 않을 수 있다면 환난은 아닙니다. 이러한 이해로부터 우리가 이 저주를 환난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과의 밀착상태가 끊어진 것이 인간에게 임한 최대의 환난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을 가져서 기쁨과 만족을 누리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설령 나의 몸이나 배우자나 자녀나 기업도 하나님보다 소중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잃었다면 내게서 가장 큰 것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잃은 상태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 이유는 바로 사탄이 아담을 속였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이 세상의 가치들로 하나님의 빈자리를 얼마든지 채울 수 있다고 속였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세상의 가치들로 하나님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채워질 수 있다는 믿음과 언젠가는 채워지리라는 희망 때문에 하나님의 자리가 비었다는 저주는 환난으로 체감하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싸움은 바로 이 저주와의 싸움입니다. 마귀에게 속아서 하나님의 빈자리를 유지하면서도 이것이 얼마나 큰 환난인가를 깨닫지 못하는 인간의 무지와의 싸움인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저주로부터의 구원도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싸움의 방법은 십자가로 이어지는 무저항의 싸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칼을 들었을 때 그것을 막으셨습니다. 이것은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에 대해 손을 놓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이기는 전쟁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 앞에서도 칼로 상징되는 수단을 앞세우면 안 됩니다. 비록 그것이 나를 방어하려는 의도, 나의 소유를 지키려는 의도, 나를 굳세게 확장하려는 의도일지라도 그것은 저주를 이기는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라는 말씀처럼 세상의 수단에 의지하는 자는 세상의 수단에 의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부르실 수 있었음에도 그러시지 않았던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결코 많은 숫자나 힘을 통해서 저주는 이겨낼 수 없습니다.

삶은 우리에게 항상 문제를 제시합니다. 배우자가 문제일 수 있고, 자녀가 문제일 수 있으며, 직장생활이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문제가 있든 칼로 상징되는 어떤 수단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저주의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가 없습니다.

저주 속에 던져지신 예수님께서는 인류와 똑같은 저주의 상태에 놓이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달랐던 점은 우리는 죄 때문에 저주의 상태에 놓였으나 예수님께서는 죄 없이 저주의 상태에 놓이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예수님은 무저항의 싸움을 하십니다. 이 무저항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과 마음이 분리되어있는 한 차라리 이 세상의 삶을 중단하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마음이 밀착되지 않은 상태라면 살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렇게 살아갈 수 없기에 십자가 사건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의 무저항은 결과가 아닌 과정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살 수 없기에 하나님을 가질 수 있는 길인 십자가로 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상태에서 살라고 하신다면 차라리 십자가에서 죽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없이 사는 것보다 십자가에서 손과 발이 못 박히고,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을 쓰고, 채찍에 맞아서 살갗이 다 뜯겨나가고, 배가 창에 찔려서 물과 피를 흘리는 것을 더 낫게 여기셨습니다. 하나님과 밀착을 이룰 수 없는 저주의 상태는 십자가의 죽음보다 더 끔찍하고 참혹한 환난임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아담이 사탄에게 속아 타락한 원죄가 유전되어 우리에게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이 속아 넘어간 상태가 너무나 끔찍하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없는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합니다. 칼로 상징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나를 방어하거나 상대를 공격하려하고, 열두 군단이나 더 되는 군대라도 끌어들이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수적인 부흥과 성공을 가늠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으로부터 계획하신 이 싸움에는 결코 이러한 마음가짐으로는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이 싸움은 무저항으로 시작해서 십자가로 끝나야만 이길 수 있는 싸움입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쫓겨날 때에 가졌어야 할 마음가짐은 이제부터 홀로 잘 살아보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덴동산의 문고리를 붙잡고서라도 하나님을 되찾고자 부르짖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이러한 마음가짐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표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 제가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따먹는 용서받지 못할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부디 용서하여주시옵소서!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수 없다면 차라리 지금 죽는 편이 낫습니다. 차라리 제 몸이 십자가에 달려서 갈기갈기 찢기는 편이 낫습니다. 에덴 밖에서 하나님 없이 살 바에는 손과 발에 못 박히고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을 쓰고 몸은 채찍에 맞고 배는 창에 찔리는 편이 낫습니다.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없다면 차라리 십자가에서 죽고 말겠습니다!”라는 기도가 아담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이며 또한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입니다. 아담이 이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을지도 모르며 우리 또한 유전 죄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아담을 속였습니다. 하나님과의 밀착상태가 끝났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이제부터 직접 선악을 판단하면서 하나님의 공백을 채울만한 세상의 가치들을 찾고 그것들을 희망하며 살아가라고 합니다. 아담은 이러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고 그 결과 저주는 지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피가 땀에 배어나오도록 괴로워하신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단 하루도 하나님 없이 사시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 없는 삶은 차라리 십자가에서 죽는 편이 나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가 저주의 자리에 있으며 환난 속에 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지구상의 75억 인구가 모두 그러한 저주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코로나19 사태가 계속되는 가운데 전 세계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처해 있는 저주의 상태입니다. 오늘 당장 암이 발견되어서 내일 죽게 생겼더라도 그보다 급한 문제는 바로 하나님을 잃은 저주의 상태입니다. 마귀에게 속아서 이 저주를 문제로 인식하고 있지 못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태를 깨뜨리고 뚫고 나오시기 위해서 무저항으로 시작하셔서 십자가로 끝나는 전쟁을 치르시고 이기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이 만드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배우자의 문제, 자녀의 문제, 직장에서의 문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기도는 문제의 해결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밀착되지 않고는 어떠한 문제도 해결 될 수가 없습니다. 먼저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주님이 만드신 길을 따라 하나님께로 가서 하나님과의 밀착을 회복하게 하여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내게 주어진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예수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과 밀착되지 않은 상태로 살 바에는 차라리 십자가에 달려서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을 쓰고, 채찍에 맞아 살갗이 뜯겨지며, 창에 배를 찔려서 물과 피를 쏟으며 죽는 편이 낫습니다. 이것이 무저항으로 시작해서 십자가로 승리하신 예수님의 전쟁의 의미입니다.

어떤 문제가 주어지더라도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서 죽는 무저항을 유지해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밀착상태를 회복할 때에 내가 죽은 모든 대상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주권적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며 또한 나를 장갑삼고 가면삼아 일하시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누구를 만나든지 어떤 일을 만나든지 무저항으로 시작해 십자가로 끝나는 전쟁을 반복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저주 속에 던져지신 주님께서 가지셨던 마음이 십자가로 표현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임을 인정하게 하시사 주님의 마음과 하나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지금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어 계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밀착되게 하심으로써 이 땅에서도 천국에서도 영원한 평강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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