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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

녹취문: 인격적 전원 스위치 on off_태승철 (마태복음 26:57~68)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3.19|조회수100 목록 댓글 0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인격적 전원 스위치 on off>의 줄거리:

지정의 세 가지 속성에 말과 행동 두 가지를 보태면 지정의언행이 됩니다. 인간의 인격적인 속성을 총 망라한 셈이지요. 이러한 지정의언행에 전원 스위치가 있다하니 의아해 하실 것입니다. 겟세마네기도의 시점부터 십자가까지 가시는 여정에서 예수님은 너무나도 또렷하게 이 인격적 전원 스위치의 on off 상태를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인격적 전원 스위치 on off

(마태복음 26:57~68)

 

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60.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61. 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62.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3.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6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5.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 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66.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대답하여 이르되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인격적 전원 스위치 on off>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인격적 전원 스위치 on off’

질문을 통해 말씀을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지금 말씀을 들으시는 곳이 자동차일 수도 있고 집이거나 전철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화분이든 사람이든 어떤 특정 대상을 바라보시면서 자문해보시길 바랍니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하나님도 동시에 보고 계실까?” 또한 내가 보고 있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판단할 때에 하나님도 똑같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계실까?”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여러분의 대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내가 보는 것을 보고 계십니다. 내가 듣는 것을 듣고 계시며, 내가 만지는 것을 느끼고 계시며, 내가 의식하는 것을 의식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느끼시고 생각하시고 판단하시고 의지를 발동시키십니다. 이 사실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준을 보고 오늘 말씀을 살펴볼 때에 복음의 또 다른 측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붙잡히셔서 산헤드린공회에서 재판을 받고 계십니다. 산헤드린공회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던 최고판결기관이자 의결기관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던 셈입니다. 다만 당시에는 로마의 식민지하에 있었기에 처분 권한을 가진 것이 아니라 로마 당국에 건의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식민지가 된 나라와 민족들의 문화와 종교를 존중하고자 했기에 이러한 건의를 가능한 수용하고자 했습니다. 결국 산헤드린공회에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고 로마의 대표자인 빌라도에게 건의를 하게 되었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있듯이 산헤드린공회는 예수님을 죽일 명분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죽여야 할 명분이 없었기에 거짓 증인들을 동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임을 당할 범죄를 저지른 사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61절을 보면 기껏 두 사람의 증인이 일치된 내용이 나타나는데 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정확하게 보자면 이 또한 거짓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하나님의 성전을 허물겠다 말씀하신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실 예수님의 몸을 비유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렇게 거짓 증언이 남발하는 가운데 정작 예수님께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십니다. 자기변호나 자기방어 혹은 거짓 증언하는 자들에 대한 공격이나 지적에 대해 전혀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하실 때와 대조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학적 주제나 신앙적 사안을 놓고 이루어지는 논쟁에서 지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이러하신 예수님께서는 원하신다면 산헤드린공회 전체의 입을 틀어막으실 수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침묵하고 계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논리적 능력이 사라졌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침묵하시던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 한 마디를 하시는데 그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심과 심판을 위하여 재림하실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63~64절을 보면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라고 하신 바와 같습니다.

이 말을 들은 대제사장은 자신의 옷을 찢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신성모독으로 여기며 이스라엘 사회에서 용납할 수 없는 일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러한 대제사장의 반응에 산헤드린공회뿐만 아니라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든 민중이 예수님을 죽이자고 호응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수님의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담으로부터 유전된 원죄가 없으셨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 중에 원죄가 없는 유일한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이후에 모든 인간이 처해있는 저주의 상태에 던져지십니다. 이 저주란 하나님 아버지와의 밀착됨이 중단되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저주에 던져지셨고 하나님과의 일체되심이 끝났다고 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없던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하나님이셨으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입장에서 저주에 던져지셨습니다.

사람의 경우에는 어려서는 부모를 의존하지만 사춘기만 되어도 부모와 떨어지는 것을 좋아합니다. 집에 있을 때는 부모님이 나가기를 바라고, 부모님이 집에 계시면 나가서 친구들을 만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분리되시는 것을 전혀 즐거워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기에 산헤드린공회를 재판하시고 그들의 죄를 물으시고 당장 심판하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 한 마디였다면 로마의 황제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제국은 무너질 수도 있었습니다. 모세가 지팡이 하나에 의지해서 초강대국 애굽을 초토화시켰는데 예수님이 그보다 못하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고 영광의 주되심을 인정하신 것 외에는 다른 어떠한 변론도 하지 않으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태도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산헤드린공회에서의 모습은 인간의 본래 모습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고 스스로 판단하시고 생각하시고 감정을 느끼시고 의지를 발동하시고 말씀하시고 행동하실 수 있었습니다. 설령 하나님 아버지와 연결되어 계시지 않았더라도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지정의와 언행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치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시고 의지를 발동하시고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인격적 속성의 스위치를 꺼버리신 것처럼 행동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고 싶은 말씀이 많지만 참고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준이하의 인간들과는 말을 섞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셔서 침묵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지정의와 언행의 인격적 속성의 스위치를 꺼버리십니다. 생각을 못하시고 감정이 없으시고 의지를 발동시킬 수 없고 말씀을 못하시고 행동을 할 수 없는 분처럼 침묵하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복음 519절을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바로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라는 부분입니다. 아무 것도 스스로 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능력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없는 일이라 여기고 계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께서 드러내시고자 했던 인간 본연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어지는 30절을 보면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라고 말씀하셨고, 828절에서도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와 밀착된 상태에서만 예수님의 지정의와 언행의 인격적 속성은 켜질 수 있었습니다. 앞서 우리가 자문했었던 내용을 떠올려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보시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보시고 느끼시고 생각하시고 판단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예수님의 마음은 밀착되어 있기에 아버지의 지정의가 예수님께 전해졌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스위치를 켜시듯이 활동하셨습니다. 하지만 겟세마네 사건 이후로 하나님과의 밀착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도 얼마든지 지정의와 언행을 하실 수 있으셨지만 아버지와 밀착이 끊어진 상태에서는 스위치를 끄시고 침묵하십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이것이야 말로 본래 인간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에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선악과는 곧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이 좋고 나쁨의 판단이 없으면 더 가져서 기쁘거나 못 가져서 슬프다는 감정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감정이 일어나지 않으니 더 갖거나 없애겠다는 의지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하기 전의 모습이란 바로 본문에 나타난 산헤드린공회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죽이려고 달려들어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판단이 없는 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입니다.

 

산헤드린공회의 예수님의 재판사건으로부터 오늘날까지 200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 2000년 간 이루어질 인간의 모든 활동에 담긴 속성이 나타나 있습니다. 지금 지구에 75억 인구가 살아가고 있는데 과연 몇 사람이나 하나님과 마음을 밀착시키면서 살아가고 있겠습니까? 적어도 십자가 복음방송을 듣는 분들만큼은 그러한 상태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되지 않은 상태로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지정의와 언행의 스위치를 켜고 살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돈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람은 돈 문제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게 됩니다. 그 때에 하나님도 이 문제를 보고 계시고 듣고 계시고 만지고 계십니다. 이때에 하나님과 마음이 밀착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판단과 나의 판단이 나누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판단과 동떨어진 판단은 모두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대제사장을 비롯한 산헤드린공회의 회원들과 거짓 증인들이 예수님 앞에서 거짓을 남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으셨지만 그 침묵만이 옳았습니다. 하나님과 밀착될 수 없다면 지정의와 언행의 스위치를 켜고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모두 거짓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침묵으로 그들을 심판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과 밀착을 이룰 수 없는 상태에서 나의 지정의와 언행의 스위치를 켜고 이루어지는 반응은 모두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설령 그것이 사랑의 고백일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우자가 아무리 사랑스러울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전달된 마음이 아니라면 거짓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헤드린공회에서 온갖 거짓의 공격을 받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침묵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의 순간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마음이 밀착할 수 없다면 차라리 침묵하는 것만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녀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문제가 생겼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들로 인해서 마음에 슬픔이 생겼을지라도 그것은 거짓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느끼시는 것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을 때에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지만 예수님은 주무실 정도로 평안을 누리셨습니다.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지 못했던 제자들이 느낀 감정은 거짓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풍랑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는지 전혀 느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온 세계가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이 사태를 대해야 할까요?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되지 않아서 걱정과 근심이 생겼다면 그것은 모두 거짓입니다. 문제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하나님과는 무관한 거짓된 판단과 생각과 느낌과 의지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이것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밀착되지 않으면 우리의 지정의와 언행은 산헤드린공회에 서셨던 예수님처럼 꺼져있어야만 합니다. 67절을 보면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라고 하였습니다. 이 상황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느끼시는 바가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저주 가운데 던져지신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밀착이 끊어졌기 때문에 스위치가 꺼진 것처럼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그 모욕을 다 느끼실 수 있으셨습니다. 분노를 느끼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밀착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옳았기에 스스로의 지정의와 언행의 스위치를 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건강 문제, 재정 문제, 자녀 문제, 결혼 문제, 코로나 바이러스의 문제까지 온갖 문제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산헤드린공회에 서계신 예수님을 본받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밀착되지 않은 상태라면 지정의와 언행의 스위치는 꺼져야만 합니다.

과장되게 말씀드리자면 코로나 바이러스가 뭉텅이로 입에 들어오려고 하는 순간일지라도 우리는 침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무조건적인 침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느끼시고 생각하시고 판단하시는 바를 내 마음에 전달해주시지 않는다면 반응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본래 인간에게서 나타나야할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밀착되어서 하나님의 지정의와 언행이 전달 될 때에만 나의 지정의와 언행은 켜질 수 있습니다.

 

마귀는 아담을 속여 원죄를 짓게 하였습니다. 원죄는 하나님과 밀착됨이 끊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에 대해 스스로 주인이 되어 반응할 수 있다고 속였습니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모든 반응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거짓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슬퍼서 울어도 거짓이고 기뻐서 웃어도 거짓입니다. 거짓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원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저주로 떨어지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이 만드신 길을 따라야합니다. 하나님과 밀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의 지정의와 언행이 켜지는 모든 순간에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밀착되지 않았는데도 나의 지정의와 언행이 켜지는 상태가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의 지정의와 언행의 스위치가 꺼지는 곳입니다.

이렇게 나의 스위치를 끌 때에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과 밀착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밀착하셨듯이 우리 또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밀착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밀착을 추구하는 것이 십자가 기도를 하는 이유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는 것을 잊을 때마다 나의 지정의와 언행의 스위치는 켜질 수밖에 없고 하나님과의 밀착됨은 깨어지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니면서 나의 지정의와 언행의 스위치가 꺼진 상태를 유지할 때에 하나님과의 밀착은 유지될 것입니다. 그럴 때에 평강 가운데 하나님의 판단과 생각이 나의 판단과 생각이 되고, 하나님의 느낌과 의지가 나의 느낌과 의지가 되며,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나의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역사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해 산헤드린공회에서 모욕을 당하시며 지정의의 스위치를 끄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삶에서 이루어내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의 공생애 때의 모습처럼 하나님의 지정의와 언행의 스위치가 켜지는 삶을 살아가시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모든 곳 모든 순간에 주님의 십자가를 잊지 않게 하여주시옵소서. 하나님과 밀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의 지정의와 언행의 스위치가 켜지지 않게 하시고, 먼저 하나님과 밀착되게 하셔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의 지정의와 언행의 인격적 속성이 발동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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