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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유다 자살은 남 이야긴가>의 줄거리:
예수님 팔아버리고 그 죄책감으로 인해 스스로 목매어 죽은 유다는 단지 남의 이야기일까요? 소위 기독교인이라면 예외 없이 가롯 유다를 만고의 역적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가롯 유다적 성향이 가롯 유다를 역적으로 생각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 안에 들어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극복하지 않는 한 믿음도 구원도 성립이 불가합니다.
유다 자살은 남 이야긴가
(마태복음 27:1~10)
1.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유다 자살은 남 이야긴가>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유다 자살은 남 이야긴가’
가룟 유다에 대한 이야기는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등장빈도로 보자면 유다는 베드로보다도 십자가 사건과 연관이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측면이지만 열두 제자 중 존재감이 일등인 셈입니다.
반면교사(反面敎師)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측면을 통해서 깨달음이나 가르침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가룟 유다는 십자가 생활화를 위한 최고의 반면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유다의 행적을 살펴봄을 통해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한 복음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직면해야만 하는 불편한 진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유다의 행적을 통해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버린 유다는 천하의 악인임에 틀림없습니다. 다만 유다의 영적성향은 유다만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유다를 나쁜 사람으로 규정하는 모든 사람들 속에도 동일한 영성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다를 통해 깨닫게 되는 불편한 진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모든 사람들은 가능하면 유다와는 무관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실질적 삶의 모습을 보자면 우리 모두가 유다와 동일한 영적성향을 가진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차하면 예수님 팔아버리기가 일상이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바울처럼 십자가를 생활화하며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지고 삶을 살 수 없다면 유다와 동일한 영성으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유다적 영성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납니다. 결혼하지 않으면 이혼할 수도 없는 것처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사람에게서는 유다적 영성은 확인 될 수조차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는다면 사실상 날마다 예수님을 팔아먹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불편한 진실이고 실제로 그렇게들 살아왔습니다.
다만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이러한 유다적 영성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괴로운 일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벗어남의 기쁨과 예수님에 대한 감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유다를 반면교사삼아 마음의 한없는 가벼움과 진정한 자유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유다를 반면교사로 삼기위해 주목해야 할 점은 유다의 마음가짐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부터 이미 마음에 나라의 독립과 다윗 왕국의 재현과 그로부터 입신양명의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다의 꿈은 이른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마음에 담았던 세상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가짐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존재합니다.
부모의 마음에는 자녀가 담길 수 있습니다. 결혼한 사람에게는 배우자가 그 대상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나라가 잘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명한 목적의식이 유지되는 가운데 유다는 기적을 베푸시는 능력의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음에 이미 존재하던 세상 것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게 됩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자신의 인생에 취직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다의 바람과는 달리 십자가로 향하십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죽음이 확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자 예수님을 자신의 인생에서 해고시키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마음에 담았던 세상 것”을 고집하고 유지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예수님을 팔아버린 유다적 영성입니다.
유다가 팔아버린 예수님은 공생애 때에 기적을 행하시던 능력 많으신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자발적으로 죽음을 받아들이시고 십자가를 향하시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유다의 마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두 가지 모습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의 방향에 갑작스러운 변화가 생겼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생애 30년과 공생애 3년을 합친 33년 동안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삶의 모든 과정은 항상 십자가를 향하고 계셨습니다. 간단히 말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세상에 태어나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때에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근본적인 의도는 모두 십자가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 기적을 계기로 삼아 십자가의 죽음으로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가 마음에서 취직시켰던 예수님은 오직 기적을 일으키시는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이미 그러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한 시점에서 예수님을 팔아버림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예수님이라면 필요 없다는 마음가짐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닌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버린 사건은 새삼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따랐던 3년이라는 모든 순간 예수님을 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 마음에 담았던 세상 것을 고집하고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고 할 때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마음에 담았던 세상 것”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음을 의미합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유다와 같았습니다. 마음에 이 세상에서 이루고자 하는 꿈과 비전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부모에게는 자녀가 그 대상일 수 있고 하는 일이나 사업 혹은 건강 같은 것들이 그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유다적 영성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세상 것들이 들어와 있는 마음상태가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믿는 부모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녀에게 문제가 생겨서 고민하다보니 어느덧 마음에 자녀의 문제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정말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자녀 문제가 마음에서 우선시 되는 상황을 유지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를 하든지 성경을 읽든지 설교를 듣든지 함으로써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의식을 되찾아야만 합니다. 이러한 십자가 생활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마음에서 자녀 문제가 우선시되고 유지된다면 십자가로 향하신 예수님을 팔아버리게 됩니다. 마음에서는 문제를 해결해 주실 공생애 때의 능력 많으신 예수님을 취직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반복된다면 유다적 영성에서 탈피하는 일은 어려워집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믿고자 한다면 마음에 들어온 자녀 문제에 대해 통째로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작은 문제를 해결하려다 큰 것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마음이라는 초가삼간은 항상 불타고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함을 통해서만 크고 작은 모든 문제로부터 마음은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세상 것이 들어온 상태는 결코 인정되고 유지되어서는 안 됩니다.
흔히 삶은 과제로 여겨집니다. 학생의 과제는 공부이고 사장님의 과제는 사업이며 주부의 과제는 살림을 잘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 직장에서의 과제는 승진을 하는 것이고 정치인의 과제는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목사님들 같은 경우에는 부흥을 일으켜서 예배당의 빈자리를 사람으로 채우는 것을 과제로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짜 과제는 이렇게 세상의 것들을 마음에 담는 것이 아닙니다. 유다적 성향으로부터 죽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를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 것이 마음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몸 안에는 오장육부가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군데 병이 생겨서 통증이 생기거나 이상 현상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오장육부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합니다. 건강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장기들이 묵묵히 일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건강한 상태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운동을 열심히 해서 숨이 가빠지면 비로소 폐와 심장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을 의식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면 마음에 무엇이 들어와 있는지 의식하지 못합니다. 자녀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에 걱정이 생기고 염려가 될 때에 비로소 마음에 자녀가 들어와 있음을 의식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배우자에게 문제가 생길 때에 비로소 마음에 배우자가 마음에 들어와 있었음을 의식하게 됩니다. 마음에 자녀가 들어오든 배우자가 들어오든 문제가 없으면 이질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는 문제로 의식하게 된 것들에 대해서만 십자가 생활화를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업에 문제가 생겼으면 사업에 대해서만 십자가에서 죽으면 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가는 강력한 세상 것들이 여전히 잠재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십자가를 생활화한다고 여기고 있으니 유다적 영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많은 분들이 이와 관련하여 십자가 생활화에 대해 어려움을 토로하십니다. 목사님이 하라는 대로 했는데도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경험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 또한 24시간 365일을 내내 하나님으로 충만하여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하나님의 충만함을 경험했다면 그것을 유지해가는 시간을 늘려나가야만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다만 십자가를 생활화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으로 충만해짐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세상의 것들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십자가 생활화가 되어서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는데도 하나님이 들어오시지 않으시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걸려있는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마음이 온전히 죽을 수만 있다면 반드시 하나님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질감을 느끼질 못할 정도로 마음에 살처럼 붙어버린 세상 것들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것들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여간해서는 의식할 수가 없습니다. 저 또한 이렇게 세상 것들이 마음에서 유지되지 않기 위하여 신경을 씁니다. 자녀나 배우자에게 특별히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지라도 십자가에서 죽이는 기도를 합니다. 목사님들에게 목회가 마음의 살이 될 수 있듯이 저에게는 아침마다 드려지는 이 방송이 또한 살이 될 수 있기에 방송에 대해서도 십자가에서 죽으려고 기도합니다.
그렇기에 초가삼간은 항상 불타야 한다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의식하지 못하는 벼룩 같이 작은 것들까지 죽일 수 있도록 마음을 통째로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인정하기를 계속해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이렇게 십자가 생활화를 할 수 없다면 누구나 예수님을 팔아버리는 유다적 영성은 나타나고 유지됩니다.
그렇다면 유다적 영성이 유지될 때에 구체적으로 어떠한 증상이 나타나게 될까요?
본문 5절을 보면 유다가 자살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앞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살펴볼 때에 자살의 심리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 때에 나타날 환난의 특징은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재난과는 다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일반적인 재난에서 사람들은 살고자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환난은 자신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무서운 것이 되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유일한 기쁨과 만족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이 더는 없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편 오늘 유다의 자살은 또 다른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3절을 보면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여기서 뉘우침은 회개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회개했다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찾아갈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했어야 할 것입니다. 유다가 은 삼십을 돌려준다는 의미는 스스로를 견딜 수 없이 혐오스럽게 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 무서운 일이지만 이러한 일이 우리에게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세상 것이 담긴 상태를 유지한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등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 나가서 일하는 동안에 승진을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이지 않고 유지한다면 유다적 영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부모가 자녀의 문제를 십자가에서 죽이지 않고 유지한다면 마찬가지로 유다적 영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된다면 스스로 살아있음을 혐오스럽게 여겨 죽이고 싶을 정도로 마음은 일그러지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원수가 있을지라도 십자가의 예수님을 등진 나에 비하면 사랑스럽게 여겨질 정도가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지 못한다면 유다적 영성은 견딜 수 없이 혐오스러운 모습으로 드러나고 확인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유다적 영성이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마음에 담았던 세상 것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18절을 보면 이러한 유다의 최후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가 됩니다.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고 하였습니다. 유다의 죽음이 이토록 비참하게 묘사 된 이유는 바로 반면교사로 삼으라는 의도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일이란 바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등지고 세상이 들어온 마음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가장 큰 환난이란 하나님이 없는 마음의 공백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 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유다의 자살 또한 큰 맥락에서는 이와 일치합니다. 같은 개념을 다른 측면에서 조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살을 할 정도로 괴로움을 느낄 때에는 마음의 공백을 마주할 때입니다. 그리고 유다가 자살을 한 이유는 마음의 공백에 세상을 담고 유지함으로써 그 공백을 해소할 유일한 기회였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등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때려 죽여도 속이 풀리지 않을 만큼 스스로를 혐오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일은 무서운 일인 동시에 무한한 자유가 약속된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 십자가 생활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유다를 반면교사로 삼는다면 더 이상 세상 것을 마음에 담고 유지하고자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이야 말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등진 가장 혐오스러운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세상 것을 담고 살 때에 마음은 천근만근 무겁습니다. 삶이 처지고 우울함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졌다는 것은 마음에 세상 것을 담은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귀의 교활함은 아담으로 하여금 가장 괴롭고 힘든 삶을 자발적으로 선택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탁월합니다. 타락하기 전 아담은 마음에 세상을 담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판단을 받으며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이는 일에 자신의 판단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고 스스로 판단하게 되었을 때 삶은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특징이 바로 무거움과 지침과 염려와 걱정입니다. 때로는 타인에 대한 질투와 분노와 억울함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끝없이 지옥을 맛보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함을 통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마음에 살처럼 되어서 의식하기 힘든 것들까지도 마음이 통째로 죽었다고 인정함을 통해서 죽은 자의 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에 삶은 기쁘고 보람차게 변하게 됩니다. 일하기에 육체는 피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피곤함은 무거움과 지침이 아닌 보람찬 노곤함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나의 마음을 통째로 죽은 자로 여기는 일은 벼룩을 잡고자 초가삼간을 태우는 것과 같습니다. 벼룩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세상이 들어온 마음을 죽이는 일은 돈 들고 힘든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등진 채 세상이 담긴 마음을 고집하고 유지하는 동안 오히려 삶은 피곤하고 지치게 됩니다. 한 평생 진짜 좋음과 기쁨과 만족을 경험해보지 못한 채 끝나버리는 일도 없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유다의 자살이 기록된 이유는 반면교사의 가르침을 주기 위함입니다. 유다를 반면교사로 삼아 깨우침을 얻을 수 있다면 십자가 생활화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천국의 자유가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가룟 유다의 배신조차도 반면교사로 삼아 깨달음과 은혜를 얻게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가르침을 통하여 십자가 생활화에 목숨을 걸게 하셔서 삶 전체가 복지가 되고 마음은 천국을 살아가는 놀라운 일을 체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