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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

녹취문: 십자가에 드리운 어둠속 충돌_태승철 (마태복음 27:45~56)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3.26|조회수108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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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에 드리운 어둠속 충돌>의 줄거리:

중동 땅 낮 열두시부터 오후 세시까지 제일 덮고 밝을 동안에 짙은 어둠이 천지를 뒤덮습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드리웠던 어둠의 의미가 대체 무엇일까요? 이 어둠은 저주에 던져진 예수님이 접하신 상황으로서, 아담 이후 인류의 삶은 물론이고 지금 내 인생이 왜 이토록 끝없는 충돌과 충격 속에서 허우적거리는지를 밝혀줍니다.


십자가에 드리운 어둠속 충돌

(마태복음 27:45~56)

 

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에 드리운 어둠속 충돌>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에 드리운 어둠속 충돌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어둠이 드리워지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 어둠의 의미에 집중하여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45절을 보면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시간을 우리식으로 바꾸어보자면 정오로부터 오후 3시까지입니다. 해가 가장 밝을 이 시간에 온 땅에 어둠이 뒤덮습니다. 여기서 온 땅을 어디까지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이론이 많습니다만 적어도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를 볼 수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확인할 수 있었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류가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둠의 범위가 아닌 어둠의 의미입니다.

이 어둠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절규를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46절을 보면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아람어의 음역입니다. 이 외침과 함께 십자가의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려지자 한낮에 칠흑 같은 어둠이 임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버림받으심과 어둠이 임함에는 연관성이 있습니다.

버림받았다는 것은 처지가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으셔서 놓이게 된 처지를 체감하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버림받으신 처지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둠이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에게도 알 수 있게끔 온 땅을 덮는 칠흑 같은 어둠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베드로전서 29절을 보면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본문과 연관된 중요 단락은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라는 부분입니다. 어두운 곳에서 불러내어졌다는 것은 저주에서 꺼내어졌다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인류가 처해있던 저주의 상태로 버려지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저주의 처지에서 제일 먼저 체감하셨던 특징은 어둠이었습니다.

 

저주란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과 격리되어서 밀착을 이룰 수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크기의 마음의 공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격리된 상태에서는 이 공백은 채워질 수 없기에 공허함이 남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처하신 저주의 상태이기도 합니다.

앞서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사람은 환난에 처하면 살고자 몸부림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격리되어서 마음을 채울 수 없는 상태가 될 때에 공허함을 직면하게 되면 자신을 죽이고자 할 만큼 무섭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하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공허와 직면하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다만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과 격리된 상태임에도 이 저주를 체감하며 살아가지는 못합니다. 그 이유는 사탄에게 속아서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을 이 세상의 가치들을 통해 채울 수 있다고 믿고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 믿음이고 거짓 희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하나님! 제가 지금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저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돈을 믿고 하나님을 동원하는 것입니다. 돈이 있어야 마음이 채워지고 기쁘리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부모가 자녀의 형통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자녀의 형통을 믿고 하나님을 동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주가 아닌 온전한 상태에서는 어떤 기도가 나타날 수 있을까요? 하나님과 우리의 마음이 밀착을 이루면 마음은 하나님으로 채워져서 기쁨과 만족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마치 공기가 가득 찬 풍선을 물속에 담그려고 해도 바로 튀어 오르는 것처럼 마음은 어둠에 가라앉지 않습니다. 이러한 마음 상태가 될 때에 지정의와 언행의 능력은 하나님의 장갑과 가면으로 쓰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장갑삼아 끼시고 일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생각과 느끼는 감정과 내가 하는 결심과 의지와 말과 행동이 모두 하나님이 보시기에 올바르고 합당한 것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어둠과 대비되는 밝음 가운데 거하는 상태입니다.

앞서 저주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상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세상의 가치로 마음을 채울 수 있다는 거짓 믿음과 거짓 희망을 가지고 지정의와 언행의 스위치를 켜고 사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 믿음과 거짓 희망에서 비롯되었기에 생각하고 느끼고 의지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도 올바른 것이 없고 합당치 않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가 어둠속에 파묻힌 상태입니다.

밝음은 지정의와 언행이 올바르고 합당하게 이루어지는 상태입니다. 반대로 어둠은 지정의와 언행이 거짓되고 부당하게 이루어지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다스리시는 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여지지 않는다면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어둠속의 삶의 특징은 바로 충돌입니다.

 

오래전에 어느 장로님께 들었던 이야기를 하나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장로님께서 하루 종일 일하시다가 집에 돌아오셔서 식사를 하시고 초저녁에 잠이 드셨다가 모든 식구들이 잠든 늦은 밤에야 깨어나셨습니다. 거실에서 주무시고 계셨기에 안방으로 들어가려고 하셨는데 어두운 와중에 이마를 문 모서리에 세게 부딪히시고는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답니다. 이처럼 어둠은 우리에게 충돌과 충격을 가져다줍니다. 또한 졸음운전이나 음주운전은 대형사고와 이어집니다. 운전자에게 어둠이 드리운 순간에 충돌이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결혼한 지 30년이 된 부부는 서로에게 밝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되지 않아서 지정의와 언행을 하나님이 장갑으로 끼시고 활동하시는 상태가 아니라면 그것은 밝음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어둠속에 있기 때문에 배우자에게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거짓말이고 잘못된 행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잘못된 믿음과 희망에 의해서 나타나는 충돌을 일으키는 지정의와 언행의 결과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마주하게 되는 모든 사람들과 사건들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 은행 계좌에 돈이 있습니다. 그러나 은행 계좌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돈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을 이룰 수 없다면 사탄이 넣어준 잘못된 믿음과 희망으로 지정의와 언행의 스위치는 켜지게 됩니다. 그렇게 계좌에 있는 돈을 내 마음대로 쓰게 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뜻과는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결국은 그 충돌로 인한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강이 깨지고 지치고 괴로워집니다.

우리의 마음에 평강이 깨지는 이유는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충격은 하나님의 뜻과의 충돌에서 생겨납니다. 어둠속에 있는 동안에는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움직일 때마다 부딪히며 평강은 깨어집니다. 마음이 어둠속에 있다면 삶은 지치고 힘들고 기쁨이 없으며 범사에 감사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어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충돌 없는 삶을 사시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저주로 떨어지시기 전에는 언제나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을 비롯한 여러 세력들의 도전과 충돌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십자가에 달리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빛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하나님과 마음의 밀착상태를 이루시며 밝음 안에 계셨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세상의 세력들과의 충돌은 예수님께는 충격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과 충돌을 일으키며 충격을 겪고 있었을 뿐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사건 이후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신 이후에도 예수님께서는 스스로의 지정의와 언행대로 행동하시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기를 바라며 지정의와 언행을 끄시는 모습을 보이셨던 것을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공생애 기간에 있었던 세력들과의 충돌은 세상과 예수님과의 충돌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이 하나님께 충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충격도 받으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밀착되어 있는 밝음 속에 있을 때에도 어둠속에 있는 사람들이 빛을 보지 못하여 충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충돌의 충격은 하나님께서 해결해나가십니다. 따라서 밝음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이 세상 그 무엇과도 충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충돌하는 세상은 항상 충격을 받게 됩니다. 마치 탱크와 조그마한 승용차가 충돌하는 것과 같습니다. 탱크가 승용차를 부수거나 밟고 넘어가버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충돌을 하게끔 하시거나 혹은 그 충돌의 힘을 역이용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에서 네 가지 안티세력과 충돌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버림받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기만을 바라며 스스로의 지정의와 언행의 스위치를 끄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주권이 움직이시면서 예수님께로 향해오는 모든 충돌을 역이용하셔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십자가 사건을 이루십니다.

하물며 우리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는 동안 어떠한 충돌도 충격으로 다가올 수 없습니다. 그 대표적 모습이 바로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현장이며, 사도 베드로가 참수형을 확정 받고도 단잠에 빠졌던 사건이었으며, 사도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죽도록 매를 맞고도 찬양과 기도를 드렸던 사건이었습니다. 풍랑 속에서 깊은 잠을 주무셨던 예수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과 충돌이 일어났으나 어떠한 충격도 미치지 않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이들이 바로 밝음 속에 머무는 자들의 특징입니다. 우리가 밝음 속에 있을 때에 마음에 충격을 주는 충돌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밝음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이제까지 우리는 스스로의 지정의와 언행을 발동시키는 동안 어둠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의지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삶에서는 항상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부사이에서, 자녀와의 사이에서, 하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뜻과 나의 뜻이 달랐기에 충돌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사업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밀착할 수 없다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나름대로의 뜻을 펼치는 동안 충돌이 일어나고 힘들고 괴로움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충돌이 일어나지 않고 충격을 받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 오늘 본문에 제시됩니다. 51절을 보면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라고 하였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성전 안에는 성소와 법궤가 안치된 지성소가 있었고 휘장이 이를 가르고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에 헤롯이 증축한 성전에는 법궤가 없었습니다만 하나님의 이름을 두는 곳으로써의 지성소는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하는 법궤가 지성소 즉 지극히 거룩한 곳에 안치되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한 상태에서만 불러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을 이룬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혹은 밀착을 이루고 싶어서 부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세상과 밀착을 이룬 상태에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여기는 것이 됩니다. 즉 거룩함을 침범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번제단에서 세상과 밀착되어 있고 세상을 담고 있는 마음이 죽어야만 했습니다. 다시 태어난 깨끗해진 마음으로만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그 이름이 가리키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실 수 있었습니다. 이 약속을 담은 성전의 모습이 바로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이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성전의 존재의미가 완성됨으로써 모든 사람이 언제 어느 때나 마음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마음에 세상 것을 담았음을 깨달을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의 죽음과 연합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부를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거룩하게 하나님을 붙잡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지정의와 언행을 장갑삼아 활동하시는 밝음의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 무엇과 밀착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과 밀착을 이루고 있다면 십자가를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세상이 들어와서 밀착되어버린 나를 대신하여 주님께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과 연합함으로써 그 죽음은 나의 죽음이 됩니다.

마음에 세상이 담길 때에 평강은 깨어집니다. 마음에 담기지 않았는데 평강을 깨뜨릴 수 있는 세상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에는 마음에 무엇이 담겼는지 쉽게 깨닫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평소에는 배우자가 마음에 담겨있는지를 체감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배우자가 병이 나자 마음의 평강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혹은 평소에는 돈이 마음에 담겨있는지를 몰랐습니다. 목사님이 돈 좋아하지 말자고 설교를 해도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 여겼습니다. 오히려 왜 다른 사람들이 저렇게 돈을 탐내며 살아갈까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직장에 문제가 생겨 수입이 사라지게 되자 마음에서 평강이 다 깨져나가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루 종일 돈 걱정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충격을 받고 나서야 마음이 세상과 밀착되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가정을 다른 문제들에서도 해볼 수 있습니다. 집 문제, 돈 문제, 건강 문제 같은 것들에 대해 문제가 생겼을 때에 내 마음에 평강이 유지될 수 없다고 여겨진다면 그것들이 마음과 밀착된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마치 수색작전과도 같습니다. 눈앞에 당장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서만 십자가에서 죽는다면 충만한 십자가 생활화와 하나님과의 온전한 밀착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눈앞에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서도 죽어야하지만 충돌이 일어나지 않아 의식의 전면으로 떠오르지 않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십자가를 생활화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 대해 스스로 죽을 수도 없으며 수련을 통해 극복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약속을 따라 하나님과의 밀착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고 선물이지 우리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제가 하나님을 벌고 하나님 부자가 되자는 말을 자주합니다만 이 또한 십자가에 걸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드리는 말씀이지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모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내 속에 하나님이 들어와 계시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그러한 상태에 대해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뿐입니다. 이러한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으면 그 이름이 가리키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 속에 있는 우리의 마음을 끌어당겨 품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면 예수님을 부활 승천으로 끌어당기실 때에 나도 끌어당기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둠을 극복할 할 때에 하나님의 밝음 속에서 충돌이 없고 충격이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에 전념하게 하여 주심으로써 저주의 어둠의 자리를 벗어나 하나님의 밝음 속에서 충돌과 충격이 없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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