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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충만 인간박제의 죽음>의 줄거리:
사냥한 짐승의 모든 장기를 긁어내어 가죽을 원형대로 벗겨서 잘 보존합니다. 그리고 그 속을 대팻밥이나 솜으로 채우면 실물과 똑같은 박제가 완성 됩니다.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예수님의 시신에 대한 관심들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과 무덤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죽음의 죽음 즉 인간박제의 죽음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세상 충만 인간박제의 죽음
(마태복음 27:57~66)
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6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62.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63.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64.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65.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66.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상 충만 인간박제의 죽음>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 충만 인간박제의 죽음’
박제(剝製)를 만들 때에는 사냥한 동물의 가죽을 벗기기 위해 배를 가르고 장기를 다 긁어냅니다. 그리고 내부를 대팻밥이나 솜 등을 채워 넣어서 살아있던 모습으로 재현합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동물박제의 형태입니다만 이와 관련된 끔찍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남아프리카 나미비아 지역에 코이코이(Khoikhoin)라는 흑인 부족이 있습니다. 1789년에 이 부족의 사키 바트만(Saartjie Baartman, 1789-1815)이라는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는데 노예 상인들에게 붙잡혀 유럽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특이한 신체적 특징이 있었습니다. 엉덩이가 위쪽으로 크게 돌출된 기형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노예상은 이 사람을 철창에 감금해 놓고 사람들에게 구경시키며 돈을 벌었습니다. 사키 바트만은 구경거리로 비참한 생을 살다가 고작 26살에 죽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돈벌이가 끊긴 것을 아쉬워하던 노예상이 사키 바트만의 유해를 박제로 만들어 전시했던 것입니다. 그 이후 사키 바트만의 박제는 이곳저곳으로 옮겨지다가 최종적으로는 1994년에 프랑스의 오르세 박물관에 전시가 됩니다. 이에 전 세계의 인권운동가들이 프랑스 정부에 항의하였고 구명운동이 벌어진 끝에 2002년에 유해는 고향 땅으로 돌아가 장사를 치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키 바트만이 노예로 팔려온 지 약 200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도무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무려 1994년에 그것도 인권 선진국이라는 프랑스에서 이러한 전시가 이루어질 수 있었고 2002년까지 반환을 미루며 버텼다는 사실이 참으로 끔찍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 “용서는 하지만 잊지는 않겠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신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 또한 인간박제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인간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여러분이 사랑하는 배우자와 자녀가 모두 인간박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인간박제로 살아가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고 무덤에 장사지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의 시신에 대한 언급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렇게 무덤에 들어가신 예수님으로부터 인간박제의 삶을 끝내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동물박제는 죽은 동물을 살아있던 때의 모습으로 재현해놓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간박제라면 살아있는 것 같을지라도 죽은 것에 불과합니다. 무덤에 들어가신 예수님의 시신이 가지는 의미는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입니다. 75억 모든 인류를 지배하고 있는 죽음에 대해 끝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61절입니다.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장례현장에 참여한 사람들은 극소수였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있었고 니고데모가 언급됩니다. 이들은 모두 바리새인이면서도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측근이었던 열두 제자는 도망치고 없었습니다. 오직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두 사람이 예수님의 장례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들이 죽으신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드려 좋아해야 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시며 또한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좋아하는 이유는 나의 인간박제 됨을 인정한다는 의미이고, 죽으신 예수님을 좋아하는 이유는 부활을 경험하게 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 4절에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삶에서 새 생명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새 생명을 체험할 수 없다면 죽으신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죽으신 예수님께 마음을 드린 대표적 인물은 일곱 귀신 들렸다가 온전케 된 창녀 출신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로 언급된 두 사람입니다. 물론 바리새인이었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도 예수님의 장례에 참여하였고 그들 또한 두 마리아에 못지않은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는 내용이 언급된 두 마리아의 마음가짐에 집중해 보도록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두 마리아의 마음을 가질 수 없다면 기독교는 죽고 맙니다. 종말론적인 예수님의 재림이 나타나기 전에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삶에서 새 생명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먼저 참여함이 필요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좋아하고 죽으신 예수님을 좋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듯이 죽으신 예수님을 좋아하고자 하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선포된 이후로 예수님의 죽음을 기리며 성대한 교회들이 건축되었을지언정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신앙적 사건을 마음에 담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기리는 것이 미신화 되어 성상숭배나 성인들의 유물숭배로 나타나게 되었지만 정작 신앙의 사건인 예수님의 죽음을 좋아하지는 못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지금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부터 터키에 이르는 중동지역에서 기독교가 쇠퇴하고 이슬람교가 차지하게 된 이유 또한 예수님의 죽음을 좋아하지 못하는 마음가짐에서 시작된 일이라 여겨집니다.
창세기 6장 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영이 함께할 수 없는 육신이 되었다는 것이 오늘 제목에서 말씀드린 인간박제의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동물박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냥한 동물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긁어낸 후에 대팻밥이나 솜을 채워 넣습니다. 인간의 인격적 속성이 박제가 되어버리는 과정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은 지정의와 언행을 통해 살아갑니다.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의지하고 그로부터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정의와 언행이 온전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 반드시 하나님으로 채워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아담 이후로 사탄의 꾐을 받아 타락하게 된 인간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실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마치 짐승을 살아있게 하던 내장을 모두 긁어내듯이 인격을 살아있게 하던 하나님의 영이 긁어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박제의 속을 대팻밥이나 솜으로 채우듯이 마음을 육체로 만나는 세상의 가치들로 채우고자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인간박제가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내를 마주하는 동안 마음에 아내를 담게 되었습니다. 성전의 구조를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마음은 성전의 지성소와 같습니다.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하는 법궤만이 존재했듯이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이름만이 담겨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에 아내를 담게 되었다는 것은 박제를 만들듯이 마음에서 하나님을 빼버리고 그 빈자리를 아내로 채우고자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 아내를 마음에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육체로 접하는 아내라는 대상의 이름을 대팻밥이나 솜으로써 마음에 채워 넣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인간박제가 된 상태에서 아내를 마주대할지라도 그것은 온전한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자녀의 이름을 담게 될 때에 하나님은 떠나실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몸으로 마주하는 자녀는 실제로 존재하지만, 내 마음에 받아들여진 자녀의 이름은 나를 박제로 만드는 대팻밥이고 솜입니다. 자녀에 대해서 아버지라는 박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잃고 박제가 되어버린 아버지로부터 자녀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들은 죽음과 사망 밖에는 없습니다.
TV 뉴스에서 등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 같이 인간박제입니다. 정치인이나 기업인이나 연예인이나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나 노숙자에 이르기까지 두 마리아처럼 죽으신 예수님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마음에서 하나님을 긁어내고 세상의 가치로 채운 인간박제가 되어서 살아갑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위의 것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물건처럼 말하는 것이 다소 거슬릴 수 있습니다만 위에 계신 존재라면 하나님 외에 다른 분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성령님과 예수님께서 삼위일체를 이루고 계실 뿐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땅에 사는 우리 인간이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는 방식을 바꿈으로써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선 땅의 것에 대한 정의를 분명히 내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땅의 것이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땅의 것을 생각하고 마음에 담으면 모두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 됩니다. 이는 곧 내 배우자, 내 자녀, 내 직업, 내 몸과 같은 대상들에 대해 주인의식을 발동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것들로 마음을 채울 때에 우리는 인간박제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은 특별히 주님의 시신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이 주님의 죽음의 의미 또한 십자가 사건에 담겨져 있습니다. 마음에서 하늘의 것을 긁어내고 땅의 것으로 채운 인간박제의 상태는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십자가를 보며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죽으신 이유는 바로 우리가 인간박제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죽으실 이유가 없으신 주님께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내가 인간박제인 것을 진단하고 확인하였다면, 주님의 시신에 마음을 드림으로써 인간박제가 되어버린 내 마음이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이 십자가 생활화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을 잊을 때에 인간박제의 삶은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에 세상을 담게 되면 하나님은 떠나십니다.
주님의 죽음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박제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드러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죽으신 주님께 마음을 드림으로써 함께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만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새 생명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다만 오늘 본문에 나타났듯이 이렇게 새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매우 적습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창녀 출신의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가 언급되었으며,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 정도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더해질 수 있습니다. 열두 제자를 비롯하여 예수님을 따른다는 사람들은 많았으나 정말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었던 사람은 이토록 적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여러분의 이웃들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대한민국과 전 세계 기독교의 현실 또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세상의 가치들을 담음으로써 인간박제가 되었음을 깨닫는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죽은 인간인 나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되새기는 사람은 또 얼마나 있습니까? 그리고 죽으신 예수님께 마음을 향하며 세상을 담고 있는 상태에 대해 죽었음을 인정하고자 하는 사람은 얼마나 있습니까?
부모로써 마음에 자녀를 담는 것은 얼핏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마음에 자녀가 담겨 있는 상태는 인간박제가 된 상태입니다. 이 죽음의 상태에서는 자녀를 위해 어떤 생명도 전해줄 수 없습니다. 오직 죽음을 전할 뿐입니다. 자녀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가도 스스로 박제인간이 되었음을 깨달았다면 골방에라도 들어가 십자가를 붙잡기 위한 기도부터 할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인간박제입니다. 이 인간박제의 상태에 대해 예수님과 함께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무덤에 묻히신 것처럼 이러한 죽음의 상태에서는 자녀에게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새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셔서 하나님으로 충만할 때 까지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기도를 하고 이러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대체 몇 사람이나 있을까요?
마음에 자녀를 담아 인간박제가 되었다면 자녀에게 죽음을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는 열심히 공부해야 된다, 좋은 곳에 취직해야 된다, 게임에 빠질 때가 아니다”라는 말은 부모로써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처럼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인간박제가 된 상태에서 나오는 세상의 가치를 담은 죽음의 표현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깨달아야만 합니다. 내가 인간박제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주님이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인간박제가 되어버린 상태임을 알았다면 무덤에 들어가신 주님과 연합하여 인간박제의 상태에 대해 죽겠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돈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어와 인간박제가 되어 버렸다면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지정의와 언행은 돈에 얽매인 죽음의 표현이 되어버립니다. 돈을 벌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만지지 말고 쓰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먼저 마음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된 상태에서 새 생명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새 생명의 표현으로 돈을 벌수도 있고 쓸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이 과정이 사라질 때에 기독교는 쇠퇴합니다. 안디옥과 예루살렘에 이슬람 사원이 세워진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잠깐 번성했던 기독교가 역사의 한 페이지로 지나가버리고 옛날이야기로 치부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인간박제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예배당들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점차로 세가 줄어들고 코로나19 사태로 말미암아 또 다른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위기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좋아할 수 없는 마음가짐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좋아하는 자들만이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새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다시 한 번 다짐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덤을 향하여 앉았던 두 마리아는 죽으신 예수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적의 현장에 있던 무리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하던 무리들은 모두 예수님의 죽음을 외면하였습니다. 새 생명을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십자가의 예수님 좋아하기와 죽으신 예수님 좋아하기의 단계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열두 제자까지 뿔뿔이 흩어진 상황에서 두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이었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또한 예수님의 죽음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을 비롯하여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이 부활을 믿고 참여하고자 했다면 예수님의 죽음의 현장은 발 디딜 틈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의 현장에 남아있던 사람은 고작 이들뿐이었습니다.
초대교회가 발흥하였다가 사라지게 된 이유는 그들에게서 새 생명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죽으신 예수님을 좋아할 수 없었기에 부활의 새 생명은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죄 사함을 받았음이 감사하다면 마음의 시선은 마땅히 죽으신 예수님을 향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죄 사함을 받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 마음에 새 생명은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다시 인간박제의 삶을 이어서 살아가게 될 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아무리 찬양하더라도 인간박제의 상태가 유지된다면 십자가 사건은 아무 의미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세상으로 돌아와서는 안 됩니다. 두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죽으심을 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또한 예수님의 부활과 연합하여 새 생명은 나타날 것입니다. 죄 사함 받았다는 확신만을 가지고 세상으로 돌아가 이전처럼 마음에 땅의 것을 담기 시작한다면 인간박제의 상태는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새 생명이 나타나지 않는 기독교는 사라지고 다른 종교로 대체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부터 두 마리아와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와 같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의 신앙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좋아함에서 끝나지 않고 무덤에 묻히신 죽으신 예수님을 좋아함으로써 인간박제로 살아가는 삶을 끝내고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함으로 새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