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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복음의 치명적 단점>의 줄거리:
구원의 기쁜 소식인 복음에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니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무덤에 묻히심과 부활로 이어지는 과정 자체가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너무나도 쓸쓸하고 썰렁하고 한산하게 진행됩니다. 이 과정에 참여함이 복음을 믿는 것인데 이 대중적인 참여도로 보자면 지금도 쓸쓸함이 똑같습니다. 복음의 단점 때문입니다.
십자가 복음의 치명적 단점
(마태복음 28:1~10)
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 복음의 치명적 단점>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 복음의 치명적 단점’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8장 8절에서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구원사역의 결과에 대해 분명한 확신대신 회의에 가득 찬 심정을 토로 하셨을까요? 우리는 그동안 수적인 부흥에 대해 간절함 바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수적인 부흥을 간절히 바란다는 것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 일임을 느끼실 것입니다. 믿음이란 복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상태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시고 복음의 당사자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그 믿음을 볼 수 있겠느냐며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희망하고 소원했던 수적인 부흥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예를 들어 목회현장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면 목사님들은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그러한 부흥의 순간에 “무엇인가 잘못된 것은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보고 계신 것을 우리는 못보고 있는지를 의심해봐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회의적인 입장을 고려한다면 복음에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복음은 세상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주어진 모든 일 중에서 가장 큰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장점이 관점에 따라서는 단점이 되기도 합니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너무나 번거롭고 귀찮게 여깁니다. 실제로 이 단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복음을 이야기하고 전파해도 결코 마음을 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보자면 복음은 단점 덩어리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할렐루야 노래가 터져 나올 수 있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행적은 역사책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과거사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반복되어야 하는 신앙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나의 사건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역사적으로 한 번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연합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매일매일 또 하루에 몇 번이라도 반복되어야만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날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과 함께 죽고, 무덤에 묻히신 주님과 함께 묻히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부활하는 과정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이 과정이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본문 말씀에 아직 언급이 되지 않았지만 승천하시고 보좌 우편에 오르신 일련의 과정이 이에 포함됩니다. 다만 말씀드렸듯이 이 복음의 핵심은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단점 덩어리가 됩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아내를 마주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남편들은 아내를 마음에 담고 함께 대화하고 행동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마음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과 무덤에 묻히심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서야 아내를 상대할 수 있습니다.
다른 예로 돈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먼저 마음에 돈을 담고 그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애초에 돈을 마음에 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의 일련의 과정을 통과한 뒤에야 돈에 대해 관계합니다.
배우자나 돈 뿐만이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누구를 상대하든지 반드시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과정을 거쳐야 되기 때문에 세상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대단히 불편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바쁜 세상에 이런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 큰 단점으로 여겨집니다. 우리가 이 점을 염두에 둘 때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서 정말로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을 극복하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상상을 초월하는 장점들이 삶에 나타나게 됩니다. 문제는 세상의 관점을 극복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이것이 대단히 불편한 문제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부활을 여러 번 예고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소문을 타고 퍼져나가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갈 것을 염려하여 경비병들로 하여금 무덤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부활의 자리에 참여하지도 않았습니다. 어제 말씀에서 살펴보았던 두 마리아가 그 자리에 찾아왔을 뿐입니다. 비록 천사가 내려와 돌문을 열었고 이미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였으나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인 이 부활의 현장에 참여한 자들치고는 그 수가 너무나 적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알 정도였으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소문은 이미 민간에 파다하게 퍼져있었을 것입니다. 요즘 같았으면 호기심에라도 카메라를 설치해놓고 부활의 순간을 찍으려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에는 참여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두 마리아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야 빈 무덤을 목격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새벽에 홀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기분은 어떠셨을까 궁금합니다. 천사를 마주하신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없구나!”라고 쓸쓸하게 말씀하셨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어제 살펴보았던 예수님의 장례식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와 바리새인이었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마지막을 지켰을 뿐입니다. 장례식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생을 살았는지 알 수 있다는데 예수님은 대체 왜 이토록 쓸쓸한 장례를 치르셔야만 했는지 의문입니다. 부활이라는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 앞에서도 예수님은 홀로 계셔야만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만이 무덤을 보려고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첫 번째 여인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무덤에 들어가심과 부활하심은 오늘도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서 반복되어야만 하는 신앙의 사건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연합하고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과 연합할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과도 연합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마음에 새 생명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주권이 다스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다만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의 부활의 자리에 참여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이 사건은 지금의 사건으로 반복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당시에나 지금이나 여전히 외롭고 쓸쓸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세상의 관점에서 복음의 단점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마음에 세상을 담고서 마주할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과정을 따라 하나님을 모시고 그 이후에 세상과 마주할 수 있을 뿐입니다. 배우자를 대할 때에, 자녀를 대할 때에, 직장생활을 할 때에 이런 과정을 매일 거친다는 것은 세상의 관점에서는 대단히 귀찮고 불편한 일입니다. 복음을 모르면 마음가는대로 살면 되지만 복음을 알았기 때문에 과정을 거쳐서 새 생명으로 준비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답답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실제로 이러한 이유에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외면합니다.
이 복음의 단점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십자가의 단점, 무덤의 단점, 부활의 단점입니다.
첫 번째로 십자가의 단점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봅니다. 돈 문제가 생겼을 때에 세상 사람들은 문제를 바로 마음에 담습니다. 돈 문제에 대한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켜지고 그로부터 해결을 위한 말과 행동이 나타납니다. 반면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돈 문제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 것을 문제시하고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죽음의 의미를 되새긴다는 것입니다.
어제 인간박제를 비유로 삼아 말씀드렸습니다. 사냥꾼이 짐승을 잡아 내장을 빼고 그 속을 대팻밥이나 솜으로 채워 박제를 만들듯이, 마음에서 하나님을 빼고 돈 문제로 채우면 인간박제와 같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돈 문제로 채워진 인간박제의 상태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세상의 관점에서는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돈 문제를 해결해주면 속이 시원할 텐데 복음은 돈 문제는 내버려둔 채 일단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울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자녀 문제를 가진 부모는 자녀 문제의 해결을 가장 바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복음은 그러한 상태를 인간박제의 상태로 여깁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인간박제 상태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기를 요구합니다.
목사님의 마음은 목회로 가득 찰 수 있습니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부흥을 사모하라”와 같은 책들을 향하게 됩니다. 마음에서도 부흥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이러한 소원을 갖고 기도를 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더는 이러한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복음은 마음에 목회라는 문제를 채움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잃은 인간박제가 되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렇게 인간박제가 된 나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기억하게 합니다.
이러한 불편함이 있기 때문에 십자가를 바라보며 산다는 것은 세상의 관점에서는 엄청난 단점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대로 직접 손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무덤의 단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삶의 가지가지 문제들이 마음에 들어와 인간박제가 된 죄의 상태를 용인하고 받아들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인간박제의 행위로 지은 죄를 용서하셨다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기에 불과합니다.
죄는 단순히 우리의 행동으로 저지른 잘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37절에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이 가족을 사랑하는 것을 죄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신앙의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님보다 가족을 더 사랑해서 마음의 자리를 내어주었다면 그것이 바로 죄가 됩니다. 행위로써 나타나는 범죄는 마음에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담은 상태에서 나타난 지정의와 언행의 결과일 뿐입니다.
마음에 가족을 담고 돈을 담고 일을 담아서 완벽한 인간박제가 된 사람에게 이제 죄 사함을 받았다고 가르쳐준다고 해서 죄 사함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죄 중에 있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주님의 죽음과 연합하여 지정의와 언행의 스위치를 끌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죄 사함을 받았다면 마음이 세상으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향하고자 하는 관점에서는 이러한 복음의 과정이 큰 단점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할 자격을 받은 의인이라 여깁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해서 이 세상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잘 살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 사함의 의미는 결코 이러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내 안에 들어온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것입니다. 자녀 문제, 돈 문제에 대해서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하나님은 마음에 자녀 문제, 돈 문제를 담은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죄 사함을 받았으면 이제 하나님의 주권대로 살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 무덤에 들어가신 예수님을 향하고 연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의 연합은 이제는 더 이상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지 않겠다는 결단의 표현입니다. 무덤에 묻힌 사람은 세상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의 가치관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러한 복음은 단점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 번째로 부활의 단점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에 부활에 참여한 자가 없었고 빈 무덤을 본 자도 두 마리아 밖에 없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부활을 좋아하고 따르고자 하는 자가 적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아무리 찬양할지라도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부활에 이른 사람은 희박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좋아하지 않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좋아하지 않는데 부활 또한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삶의 시작입니다. 내 뜻과 소원과 계획이 없어지고 하나님의 뜻과 소원과 계획대로 살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그 모습이 반드시 성공적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든 살든 성공하든 실패하든 형통하든 불통하든 내 문제가 아니게 된다는 것이 부활의 의미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지극히 적기에 부활은 단점처럼 여겨집니다.
사람들은 내 뜻대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내가 계획한 대로 일이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가치관대로 성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의미는 이와는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나의 삶 전체를 챙겨나가시는 것입니다. 내 뜻과 소원과 계획이 포함 될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단점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이러한 단점들을 극복하고 십자가와 무덤과 부활의 과정을 거칠 때에 사랑과 전지전능하심을 속성으로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삶을 맡아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세상이 빠져나간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 복음의 장점들이 너무나 큰 단점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의 과정을 따르는 일에 필요한 것은 노력이 아닙니다. 육체적으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부 마음속에서 믿음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박제의 상태를 고집하기에 이 복음의 과정을 따라가는 길이 힘들고 괴롭습니다. 나가서 돈 백 만원 벌어오는 것보다 복음의 과정을 따르는 일은 훨씬 쉽습니다. 나의 죄적 속성 때문에 복음의 과정을 단점으로 여기고 거부감을 느낄 뿐입니다. 실제로는 복음의 과정을 따르는 일보다 쉬운 일은 세상에 없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이 복음의 과정을 따를 때에 상상을 초월하는 은혜가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내가 인간박제가 되었음을 발견하고 이러한 상태에서 구원하시고자 예수님이 죽으셨음을 떠올립니다. 마음에 돈 문제를 담으면 돈박제입니다. 건강 문제를 담으면 건강박제입니다. 자녀 문제를 담으면 자녀박제입니다. 매순간마다 마음에 어떠한 대상이 들어오려고 할 때마다 박제됨을 발견하고 이러한 나를 위해 주님이 죽으셨음을 기억해내야만 할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질 때에 주님의 죽음과 연합할 수 있습니다. 인간박제의 상태로는 부활의 새 생명을 받을 수 없기에,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기를 바라며 무덤에 묻히신 주님처럼 지정의와 언행의 스위치를 끄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 돈이 들지도 않고 힘이 들지도 않습니다. 한 시간 두 시간씩 걸리는 것도 아닙니다. 순간순간 죽었음을 고백하는 일에 큰 시간이 소모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와 죽음의 과정을 따를 때에 약속된 부활의 새 생명이 주어지게 됩니다. 마음은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갖고 이 땅에서의 삶은 하나님의 주권이 책임지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이 소리 높여 할렐루야를 외칠 수밖에 없는 부활의 삶입니다. 복음의 단점이 우리 삶에 허락된 가장 큰 장점이라는 것을 아시고 오늘도 십자가를 생활화해 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인간박제의 상태에서 보는 복음은 접근할 수 없는 단점 덩어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무덤과 부활의 단점 덩어리로 보이는 과정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해보니 이보다 쉬운 일이 없고 이로 인해 주어지는 큰 은혜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어리석고 부족한 저희들을 붙잡아주셔서 오늘도 어디를 가든 누구를 상대하든 복음의 과정들을 통과해서만 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