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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이번에 태초를 새로 갈자>의 줄거리:
한 우주와 지구 안에 두 세계 즉 옛 세계와 새 세계가 나란히 흐르고 있습니다. 옛 세계는 아담에게서 새 세계는 예수님에게서 시작한 세계입니다.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또 다른 태초임을 선언하면서 기록을 시작합니다. 코로나19의 비상상황은 나란히 흐르는 두 세계 중 새 세계로 갈아타기를 결단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번에 태초를 새로 갈자
(마가복음 1:1~13)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이번에 태초를 새로 갈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이번에 태초를 새로 갈자’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을 소개하는 부분,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부분,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신 부분입니다. 이 장면들은 서로 다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내용적으로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코로나19 사태가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미국은 확진자가 16만 명에 이르고 911사태의 3,000명 사망자를 넘어섰습니다. 코로나19가 주는 하루하루의 무게감이 점점 더해지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이 분명하기에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가 올바르게 반응하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정치인들은 이 사태를 이겨나가기 위한 정책을 세우고 공무원과 의료진들은 방역과 치료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이 사태에 대한 방관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붙잡고 있고 받아들이고 있는 신앙인으로써 나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를 위해, 이웃을 위해, 지구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이 시점에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본문 말씀을 통해 생각해봅니다.
마가복음의 내용은 전체 분량의 40%가 예수님의 33년 생애 중 최후의 한 주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60% 또한 40%안에 기록된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마가복음의 출발점이며 목표점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마가복음은 시작부터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던 마태복음과는 분위기가 다릅니다. 마태는 1장 1절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시작하였습니다. 구약시대 때부터 예수님까지 이르는 유다지파의 족보를 나열하며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관심을 유발합니다. 반면 마가는 1장 1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간단하고도 강렬한 문장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들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경험한 입장에서 회고적으로 예수님의 생애를 처음부터 말씀화하면서 기록하였습니다. 단순히 역사적인 기록을 남기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을 중심에 놓고 예수님의 모든 활동을 이해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마가는 특별히 십자가 사건에 대단히 높은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오늘 제목에서 태초를 언급한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다시 본문 1절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시작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르케(ἀρχή)는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에 등장한 ‘태초’를 의미하는 히브리어와 일치하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강조하여 본문 1절을 다시 번역해보자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태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13절로 정한 것은 새로운 태초에 대한 마가의 기록 때문입니다.
태초에 천지가 창조되었을 때에 주인공은 아담이었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인간의 역사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가는 이와는 다른 예수님이 주인공이신 태초가 시작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구 안에서 아담과 예수님이라는 두 태초의 역사가 진행되게 된 셈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일 때에 새로움을 느낄 수 없다면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아담의 태초로부터 이어져온 삶을 살아온 사람이 새로운 태초로써의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완벽하게 차이가 나는 다른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대단한 인생을 살았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아담의 태초로부터 시작된 인생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대통령이나 재벌이 되어도 어디까지나 옛 세계에 속한 일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자로써는 탈피하고 벗어나야 할 일입니다. 반대로 낙오자나 실패자로 살아왔을지라도 이 또한 옛 세계에 속한 일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옛 세계와는 관계없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왔음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가가 본문에서 강조하는 바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새로운 세계를 여는 태초가 됨으로써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기록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마음이 옛 세계에 머무는 상태에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을 종교로 변질시킨 결과입니다. 모든 종교는 타락한 영성의 산물이며 옛 세계에 속한 인간들의 영적 활동입니다. 여기서 현재 기독교의 문제 또한 발생합니다. 코로나19 사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면 예배당 종교로 변질되어버린 기독교는 중단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코로나19 사태도 진정이 되고 예배당 모임도 다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태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배당 모임이 다시 이루어지게 되더라도 예배당 종교로써의 기독교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당 종교로 변질되어버린 기독교를 지속해나간다는 것은 복음에 반대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시간까지 살펴보았던 마태복음이나 오늘부터 살펴볼 마가복음은 물론이고 성경 어디에서도 예배당 종교로써의 기독교는 족보를 찾을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의 성전의 존재의미는 예수님을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그 성전의 완성이신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8장 20절에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즘처럼 수적 부흥에 목을 매는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일 것입니다. 저 또한 한때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기독교가 예배당 종교로 타락하는 것을 방관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그 타락한 예배당 종교를 번영시키기 위해 애를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옛 세계에 속한 상태에서 복음을 주장할 때에 나타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시고 또한 성령에 이끌림을 받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는 사건을 상세히 기술하였습니다. 한편 마가는 이러한 내용을 대단히 짧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세계에 주목하고자 했습니다. 새로운 태초를 강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과거 아담은 온갖 과실나무로 가득했던 에덴동산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아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과실나무라고는 전혀 없고 물 한 모금을 발견할 수 없는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이겨내십니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의 시험에 지고 타락하게 된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옛 세계와,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세계가 나란히 공존하게 된 것입니다. 마치 할리우드 액션 영화에서 주인공이 달리는 차에서 다른 차로 옮겨 타듯이 우리는 아담의 옛 세계에서 예수님의 새로운 세계로 옮겨 탈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한편 본문에서는 요한의 세례에 대한 이야기가 집중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8절을 보면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세례는 죽음과 부활과 새로운 시작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옛 세계에 대해서 죽고 다시 태어나서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서 다른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례라는 의식은 일회적입니다. 그러나 세례의 의미는 죽을 때까지 반복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십자가 생활화의 의미와도 일치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날마다 죽었음을 고백합니다. 이는 곧 나란히 공존하는 두 세계 즉 옛 세계와 새로운 세계와 관련하여 날마다 새로운 세계로 이행함을 의미합니다.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우리는 원죄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옛 세계에 속해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하였고 루터가 데일리 벱티즘(Daily Baptism) 즉 날마다 세례 받음을 강조한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옛 세계에 대해서 죽음으로써 예수님을 태초로 삼은 새로운 세계의 흐름 안으로 진입하는 것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옛 세계가 끝나고 예수님을 태초로 하는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이 시작되는 순간으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십자가 사건을 중심으로 볼 때에 요단강에서의 요한의 세례는 십자가 사건의 예표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 6절을 보면 세례 요한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나타납니다.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세례 요한의 모습이 새로운 세계의 태초와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요한의 세례는 죽음과 부활과 새로운 시작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요단강에서 이루어진 요한의 세례는 전신을 물에 잠기게 하는 행위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옛 세계에 대한 죽음입니다. 물론 요단강 물에 잠겼다고 해서 실제로 옛 세계에 대한 죽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의 세례는 스스로 옛 세계에 속해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라는 행위를 통해 자발적으로 옛 세계에 대해 죽어야 하고 떠나야만 한다는 의식을 갖게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옛 세계에 대해 죽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물에 잠겨서 죽기를 자처한다는 것은 곧 옛 세계에 속한 삶이 중단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고백으로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례를 베풀었던 요한의 행색은 남달랐습니다. 이러한 세례 요한을 금욕주의자라고 이해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특이한 행색은 일반적인 세상의 절제나 검소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세례 요한이 살았던 광야는 인간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좋다고 여겨지는 가치가 몰려있는 도시와 성읍을 동경합니다. 설령 성읍 바깥에 터전을 일구고 사는 사람일지라도 그 일을 통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고자 한다는 점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광야는 삶의 기본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곳입니다. 먹을 것을 일굴 밭도 없고 과실나무는커녕 마실 물조차 없습니다. 이러한 광야에서 살았던 요한의 삶이란 옛 세계를 거부하는 영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있어서 옛 세계와 새로운 세계의 차이는 바로 복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은 바로 마음의 기쁨과 연관이 있습니다. 복음은 말 그대로 기쁨의 소식입니다. 옛 세계에서의 복음은 부귀영화였습니다. 성공해서 세상의 가치로 마음을 채우는 것이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옛 세계의 복음입니다. 한편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세계의 복음 역시 마음의 기쁨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러나 무엇으로 기쁨을 얻는지에 대해 차이가 있습니다. 1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하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읽지 않은 11절을 보면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이 들어와 계셨고 또한 하나님 안에도 예수님이 들어와 계셨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기쁨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새로운 세계의 특징을 자신의 삶을 통해 상징적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옛 세계에 속해서 세상의 가치를 통해 기쁨을 얻고자 도시와 성읍으로 몰려듭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추구할 가치가 없는 광야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세계에 살면 세상의 가치가 없는 광야에서도 마음을 기쁨과 만족으로 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행색의 특이함은 금욕주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기쁨의 종류가 바뀌었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 광야로 나갔고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요한은 하늘 기쁨의 자존심을 세우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세계에서는 광야에 나가서 살더라도 기쁨과 만족과 행복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에 속한 사람들은 옛 세계에 속한 사람들과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생각, 다른 말, 다른 행동, 다른 의지, 다른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8절을 보면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세례가 언급됩니다. 성령세례를 받는 것은 곧 삶을 살아갈 때에 지정의와 언행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성령이 되신다는 의미합니다.
옛 세계의 삶이란 사탄의 악령에 속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삶이었습니다. 스스로 지정의와 언행을 움직였지만 거짓에 빠진 상태였기에 무엇도 온전할 수 없었습니다.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이 거짓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속은 상태에서 나타나는 일이기에 눈물도 웃음도 거짓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결단을 해도 거짓이고 모든 말과 행동이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의 타락은 사탄의 악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과 같습니다. 반면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세계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성령세례를 받아야만 합니다. 이 성령세례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함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전에는 사탄의 악령에 속은 상태에서 지정의와 언행이 발동되었다면, 성령세례를 받고 난 후에는 성령께서 지정의와 언행을 주관하시게 됩니다. 나를 장갑 삼으시고 가면 삼으셔서 활동해나가시리라는 것입니다.
금욕주의와 복음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금욕주의는 사람들이 인간세상에서 정해놓은 가치들을 기쁨의 근거로 인정하고 체감합니다. 그러한 세속적 기쁨을 거부함으로써 더 큰 정신적 기쁨을 얻어 보겠다는 시도가 금욕주의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정해놓은 가치로부터 생겨나는 기쁨이 거짓임을 밝힙니다. 돈을 비롯한 세상의 가치들을 기쁨으로 느끼는 것은 사탄의 악령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을 기쁨의 근원으로 인정하고 공감합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생각입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써 돈과 같은 세상의 가치를 기쁨으로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여겨집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탄의 악령에 속고 세례를 받은 상태이기에 세상의 가치를 기쁨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돈이 너무나 좋고, 출세가 너무나 좋고, 권력이 너무나 좋고, 명품이 너무나 좋다면 사탄의 악령에게 세례를 받은 증거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의 특징은 이와 반대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듯이 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가치들을 배설물처럼 느낍니다. 더럽게 느낀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이라는 용도에 대해서 아무 가치가 없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세계를 살아가는 자들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악령세례를 받은 상태와 성령세례를 받은 상태를 분명히 가려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 특징은 기쁨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외제차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금욕주의자라면 비싼 외제차를 타는 사람을 좋지 않게 볼 것입니다. 차로부터 기쁨을 얻을 수 있음을 공감하고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남이 무슨 차를 타든 내가 무슨 차를 타든 상관치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쁨이 되신 상태 즉 성령세례를 받은 상태에서는 지정의와 언행을 성령님이 주관하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고급외제차를 타든 자전거를 타든 마음에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외제차를 타도 자랑으로 여기지 않으며 자전거를 타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외제차를 타고 가면서도 온전히 하나님으로 기뻐할 뿐이고,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도 온전히 기뻐할 뿐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차는 기쁨의 원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기에 외제차를 주셨을 뿐이고, 혹은 자전거로 충분하기에 자전거를 주셨습니다. 신앙적 양심에 의해 외제차 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면 오히려 마음에서 내심 차를 기쁨으로 삼지는 않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 뜻에 의해 구입한 차라면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복음이 문제시하는 것은 이 세상의 가치가 하나님을 대체하는 것입니다. 행여나 외제차가 마음에서 기쁨이 됨을 느꼈다면 차를 탈 때마다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함으로써 하나님만이 기쁨이 되시는 상태로 옮겨가야만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설령 하나님께서 그 차를 없애시더라도 마음에서는 전혀 아쉬움이 없고 변함없이 기쁨이 유지되어질 것입니다.
사탄의 악령세례를 받아 살아가던 옛 세계에서 성령세례로 살아가는 새로운 세계로 이행하는 역사가 십자가 복음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예수님이 여신 이 태초의 세계에 참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개인들이 두세 사람 모인 곳이 바로 하나인 예수님의 교회 안에서 모임의 조건이 충족됩니다. 예배당을 중심으로 한 변질된 기독교는 이제 끝내야만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마가가 소개하는 새로운 태초로부터 흐름이 지속되는 세계로 진입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탄의 악령세례를 받아 세상 것을 기뻐하는 상태로부터 성령세례를 받아 하나님만이 좋은 상태로 바뀌어 살아가는 복의 복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