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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2

녹취문: 바뀐 가족개념이 주는 평안_태승철 (마가복음 3:20~35)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4.15|조회수85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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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바뀐 가족개념이 주는 평안>의 줄거리:

'가화만사성' 즉 집안이 화목하면 만사가 형통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실제상황을 보면 지구상에 화목한 집안이 얼마나 되겠는가 싶습니다. 가족개념을 바꾸지 않는 한 '가화'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우선 나 한 사람부터 가족 개념을 바꾸면 아직 콩가루 집안 속에서도 최소한 내 마음 하나만이라도 평안 가운데 지켜 낼 수가 있습니다.


바뀐 가족개념이 주는 평안

(마가복음 3:20~35)

 

31.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바뀐 가족개념이 주는 평안>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바뀐 가족개념이 주는 평안

본문 말씀에서는 마태복음 12장에서 살펴보았던 사건이 마가의 시점에서 다시 기술되고 있습니다. 앞 단락에서는 성령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예수님의 사역을 서기관들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합니다. 그리고 뒤 단락에서는 예수님께서 진짜 가족이 누구냐에 대한 말씀을 전하십니다. 우리는 마지막 부분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가정에 진정한 평안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가족에 대한 개념부터 바뀌어야만 합니다. 요즘의 화두는 모임입니다. 이제까지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유지되었던 모든 모임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회자되는 가운데 예배당에서의 모임 또한 피할 수 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또한 학교는 물론이고 수많은 영업장과 시설들에서 이루어지는 모임이 중단되거나 억제되고 있습니다. 다만 신앙적 관점에서 볼 때에 우리는 가장 근본적인 모임인 가족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서울대 학생을 비유로 성도가 누구인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서울대 관악캠퍼스에는 하루에도 만 오천 명이 넘는 학생들이 등교하여 각종 모임을 이룹니다. 이들은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각자가 서울대 입학시험의 기준을 통과한 자들입니다. 지역주민들이 서울대학교의 도서관이나 운동장을 사용할 수는 있을지라도 서울대학에 다닌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배당의 형편이 이와 닮았습니다. 성도의 기준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이 예배당에 모이며 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기준은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에 예수님을 통해 참여하여 사위일체를 이루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기준을 통과할 수 없다면 온전한 교인일 수도 없으며 모임으로써 교회를 이룰 수도 없습니다. 서울대학교 운동장에서 매일아침 조기축구회 모임을 갖는다고 해서 서울대 학생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준에서 볼 때에 가족이라는 모임 또한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단지 혈연을 중심으로 뭉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없음을 드러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서기관들은 성령님을 통해 이루어진 예수님의 기적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합니다. 민중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기득권이 위기에 처해있음을 느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인정한다면 자신들의 가르침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꼴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의 핵심적인 주제는 바로 하나님과의 연합과 일체입니다. 하나님과의 연합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지는 일관된 주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고 일체가 되고 밀착을 이룰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성경은 모든 말씀에서 세상과의 밀착을 문제시하며 하나님과의 밀착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그 밀착을 가능하게 해주는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사건입니다.

신학적 이론을 교파나 교단별로 따지는 것은 사실 불필요한 문제입니다. 성경이 주장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한 가지를 이룰 때에 모든 말씀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했기에 교단이 갈라지고 신학은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성경의 가르침은 결코 복잡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하여 사위일체를 이루는 것에만 집중하면 될 뿐입니다. 하나님과 일체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생각과 뜻과 의지가 흘러들어오게 되고 말과 행동을 통해 선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삶이 어때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감히 누가 끼어들어서 이래라저래라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본문 2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토록 성령님에 대해 강하게 말씀하신 이유는 성령님께서는 예수님과 하나님을 일체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22~23절에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연합은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 안에 들어가 계시고, 또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예수님 안에 들어와 계신 것이 삼위일체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우리에게서도 나타나야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그럴 때에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같은 장 20절에서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란 라틴어 크레도(credo)로써 심장을 꺼내 드린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1절을 보면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마음 심장을 꺼내어 드릴 때에 반드시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하여 사위일체를 이루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믿습니다. 사위일체를 이룬 상태가 구원의 상태이며, 사위일체를 이루기 위하여 죄 사함도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하여 사위일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과 신학의 전부이며 복음의 핵심입니다.

 

한편 본문 3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복음 6장을 보면 28~29절을 보면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봉사, 충성, 선교, 전도를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35절의 말씀에서 나타난 진짜 가족에 대한 말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께 마음을 드려서 밀착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일회적 사건이 아닙니다. 사진처럼 한 장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동영상처럼 계속해서 이어지는 흐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봄은 지속되어야만 합니다. 눈으로 귀로 이 세상을 마주 대하는 동안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무덤에 묻힌 자라는 자아의식이 지속되어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배당 조직에서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어서 시키는 일 열심히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속적으로 바라보고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유지해가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진정한 가족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육체를 통한 자아의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먼저 육체에 근거된 남자나 여자라는 자아의식을 갖습니다. 또 육체와의 연관성으로 부모와 자녀의 자아의식을 갖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아의식의 연장선에서 결혼을 하고 자녀도 낳습니다. 이러한 육체의 연관성을 통해 가족이 형성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족의 개념을 염두에 두자면 육체의 연관성보다도 우선되어야만 하는 자아의식이 있습니다. 내가 남성이나 여성이라는 자아의식보다도 예수님을 믿는 상태는 더 우선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관계는 육체를 근거로 한 자아의식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을 때에 우리는 훨씬 확장된 가족관계를 갖게 됩니다. 혈연 혹은 다양한 인연을 통해 가족으로 맺어지는 관계보다 우선하여 예수님께 마음을 드렸다는 것이 가족관계의 근거가 됩니다. 이는 곧 육체를 근거로 한 자아의식이 죽지 않으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가족관계도 이룰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누군가의 배우자라는 자아의식, 부모라는 자아의식, 자녀라는 자아의식이 죽지 않는다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가족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뿌리째 바뀌게 됩니다. 육체의 연관성에서 생겨난 자아의식을 유지하는 한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하여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질 때에만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은 성도의 기준입니다. 서울대 입학시험을 통과한 사람만이 서울대 학생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 성도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예배당에 모이는 것만을 교회의 모임으로 여겼습니다. 목사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장로님과 권사님과 집사님과 새 신도에 이르기까지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지고 부활 승천하시고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하여 사위일체를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가르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마치 서울대학교 운동장에 매일 아침 조기축구회로 나가면서 서울대에 다녔다고 합니다. 한 번도 서울대 학생이었던 적은 없었던 것입니다. 가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육체의 연관성으로 맺어진 가족은 아직 진정한 가족이 아닙니다.

 

저 또한 날마다 말씀을 전하면서 하나님과 온전한 사위일체를 이루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십자가 생활화를 반복하고 유지함을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위일체 이루기를 끊임없이 소원하며 적어도 그 틈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있습니다. 단 하나님과의 사위일체는 나의 힘으로 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유지하는 것뿐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만약 저의 아내나 아들 혹은 형제나 부모님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갖지 못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을 근거로 하자면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저의 가족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육체적으로 어떠한 연관성도 가지고 있지 않은 미국에 사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며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고 해봅니다. 그러면 오히려 이 미국 사람은 저와 한 가족인 셈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짜 가족의 개념입니다.

가족도 민족도 나라도 육체의 연관성을 그 기반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 관점에서는 이렇게 이루어진 어떠한 관계도 우리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이 모든 세상적인 관계에 대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14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관계에 대한 죽음이 이루어질 수 없다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과의 연합 또한 성립할 수 없습니다.

배우자에 대해 자녀에 대해 가족이라는 의식이 죽어야 예수님과 연합할 수 있습니다. 한 지붕 아래 같이 산다고 해서 가족은 아닙니다. 나와는 아무런 육체적 연관성이 없을지라도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오히려 나와 가족이 됩니다. 인종이 상관없고 사는 곳이 상관없습니다.

 

그렇다면 육체적 연관성으로 맺어온 인연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관계해 나가야 할까요?

지금까지는 육체적 연관성을 기반에 두고 가족과 민족과 나라라는 소속감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기 위해 이러한 관계에 대해 죽어야 한다면 그 인연들은 나의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과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사하실 과녁이 됩니다.

배우자가 아직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아직 진짜 가족은 아닙니다. 배우자라는 이름의 하나님의 과녁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는 나를 통해서 배우자라는 과녁에 뜻을 쏘고자 하십니다. 자녀도 마찬가지로 아직 나의 진짜 가족은 아닙니다. 내 진짜 가족은 십자가의 자아의식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십자가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자녀라는 이름의 과녁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뜻을 발사해나가실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동료들은 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발사되어야 할 과녁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정확하게 발사되고 과녁에 명중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올바른 도구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 자아의식을 유지하면서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룰 때에 하나님의 뜻은 정확하게 발사될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온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들이 찾아온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만 앞서 서기관들은 예수님에 대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린다고 모함한 것을 염두에 두자면 어렵잖게 상상이 됩니다.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이 돌자 신변이 걱정되고 혹은 그러한 활동을 말리기 위해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가족에 대한 배려이자 사랑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타락한 세상의 기준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기준에서는 말리러 찾아온 가족들은 서기관들과 다를 바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린다고 모함했지만 정작 사탄에 씌운 것은 서기관들이었고 예수님의 가족들이었습니다. 육체의 연관성으로 맺어진 관계를 가족으로 여기고 소중히 하겠다는 자세가 이미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진짜 가족이란 육체의 연관성으로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육체의 연관성에서 만들어진 관계를 가족으로 여기고 소중히 하는 동안에는 영이신 하나님과 연합할 수 없습니다. 육체를 더 좋아한다는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영의 세계보다 육의 세계를 중시하는 것은 결코 믿음일 수 없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과 같은 가족의 개념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오히려 가정의 불화 또한 사라질 수 있습니다. 부부관계가 좋지 않은 이유는 배우자를 가족으로 마음에서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자식 간에 화목하기 어렵다면 가족이라는 명목으로 자녀를 마음에서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의 관점에서 가족이란 하나님과 연합을 이룬 자들입니다. 같은 지방출신이라고 가까이 지낼 이유가 되지 않으며, 다른 지방출신이라고 멀리할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십자가 자아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영적으로 같은 소속을 가진 것이고 같은 피가 흐르는 가족인 것입니다.

이런 진정한 가족 됨은 오직 마음이 십자가 자아의식을 유지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룸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피와 기운이 흐르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가족의 기준입니다.

예수님의 기준에서는 육체의 연관성으로 가족을 판가름하는 것이야말로 미친 일이고 귀신들린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서는 이러한 말씀을 전하는 저 또한 미쳤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조차도 서기관들에게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렸다는 모함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이야말로 하나님과 떨어져 귀신들린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말리기 위해 찾아왔지만 정작 미쳐있던 것은 그들입니다.

가족의 개념만 바뀌어도 가정의 평안은 찾아올 수 있습니다. 나 한 사람부터 하나님으로 인한 평안가운데 거한다면 설령 콩가루 집안 같은 상황에 처해있을지라도 변화는 시작될 것입니다. 가족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을 과녁으로 삼아서 하나님의 뜻을 발사하는 도구로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가정의 상황이 어렵다고 함께 고통을 겪는 것만이 가족이 아닙니다. 나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안을 누릴 때에 가정이 살아나는 희망도 생겨납니다.

육체의 가족은 하나님의 과녁입니다. 진짜 가족은 오늘도 십자가의 자아의식을 유지해나가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인종과 민족과 나라가 다르고 사는 형편이 다를지라도 그들이 나의 가족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 모두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게 하여 주셔서 진짜 가족들과 만나는 인연의 창조를 경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육체로 맺어진 가족들을 하나님의 과녁으로 삼게 하시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적중시키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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