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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 삶에 하나님나라 심기>의 줄거리:
치과의 임플란트나 외과의 장기이식처럼 내 삶에 하나님의 나라를 심고 이식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이 사시는 나의 삶입니다. 삶은 관계들의 이어짐이고 총합이지요. 하나님의 주권은 이 관계와 그에 이어지는 또 다른 관계들을 통해서 뻗어가며 역사합니다. 그 끝을 나 자신도 다 모릅니다.
내 삶에 하나님나라 심기
(마가복음 4:26~29)
26.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내 삶에 하나님나라 심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내 삶에 하나님나라 심기’
말씀을 시작하기 전에 여러분에게 안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서 유튜브 이용자가 급격하게 증가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침 7시에 생방송을 하고 나면 10분 정도 지나서 자동으로 업데이트가 되던 것이 12시간이나 지나서야 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기존에 유튜브에서 말씀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들으시는 분들께서는 제대로 표시가 안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방송 홈페이지로 직접 들어오셔서 확인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인터넷검색사이트 어느 곳에서든 십자가복음방송(http://www.everyday01.com)으로 검색하시면 접속하실 수 있습니다.
‘내 삶에 하나님나라 심기’라는 제목의 주제어는 하나님나라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나라를 곡식의 성장에 대한 비유를 통해 말씀해주시고 계십니다. 다만 이 비유에서 특이한 점은 바로 참여에 대한 요청이 없다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천국에 참여할 방법을 찾고자 합니다. 이 땅에서 이루어질 하나님나라를 앞당겨서 이루기 위하여 참여할 틈새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린 대로 본문의 비유에서는 곡식의 성장과정을 비유로 하시되 외부의 힘이나 노력이 아닌 씨 자체의 생명력으로 이루어지는 일로써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농사의 모습과는 다릅니다. 농사에는 농부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농부의 노력과 수고가 들어가야만 추수할 곡식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러한 비유를 드신 데에는 의도가 있습니다. 실제로 싹이 나고 이삭이 패는 등의 곡식의 성장은 내부의 생명력에 의해 일어나는 일입니다. 농부가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생명력을 주입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목하신 부분이 바로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근원적인 생명력입니다.
27절을 보면 ‘그가 밤낮 자고 깨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인간으로써는 하나님나라가 진행되고 성취되는 과정에 대해 전혀 참여할 수도 없으며 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이러한 말씀의 의도를 알아도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나라에 인간의 참여가 완전히 배제된다면 예수님께서 굳이 이러한 말씀을 하신 이유에 대해서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단지 외부인이자 제3자로써 구경만 할 수 있을 뿐이라면 뭘 어떡하라는 건지 의아함이 생기실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담긴 의미를 정확하게 풀어보자면 이러한 이해와는 반대입니다.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일은 내가 알 수도 없고 참여할 틈새나 자격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나라의 성취는 곧 나의 삶이 됩니다. 이 말이 무척 모순적으로 들리실 수 있습니다. 나의 삶이 하나님나라가 되어야만 하지만 나는 그 사정을 속속들이 알지도 못하고 참여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지는 과정이고 본래 선민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제부터 그 의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우리는 네 가지 땅에 떨어지는 씨 비유와 숨기시고 감추시는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하는 방법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본문 말씀은 그러한 맥락에 이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분리하지 않고 연결하여 살펴봄으로써 맥락을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맥락을 놓치면 본래 성경이 의도한 바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의 해석이 이루어질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네 가지 땅에 떨어지는 씨 비유의 핵심 내용은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옥토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숨기시고 감추시는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해야한다는 말씀의 핵심 내용은 우리에게 주어진 대상들을 통해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할 수 있고 체감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이 두 말씀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하나님나라가 나도 모르게 임하고 성취되어 간다는 내용입니다. 나는 참여할 필요도 자격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하나님나라가 나의 삶의 내용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땅의 삶에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내 삶인데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말씀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위해서는 앞서 나타난 두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첫 번째로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에서는 말씀에 대한 네 가지 마음이 나타났습니다. 다만 마음에는 공통된 속성이 있습니다. 하나님 크기의 공백을 갖도록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의 공백을 옥토로 유지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여러 방면에서 부족함을 느낄 수도 있고 걱정근심을 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만이 내 마음의 진정한 채움과 만족이 되어주심을 믿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믿음을 통해 마음은 옥토로 유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다면…”이라는 기준을 통해 마음이 옥토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센 풍랑이 이는 바다 위 일엽편주에서 주무셨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진다면 잠을 잘 수 있을 정도의 평안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모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던 베드로는 산 아래 인간세상의 모든 일을 잊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으로 마음이 채워지자 산 아래에서 삶의 만족거리를 찾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현장 또한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평강을 유지하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들을 기준으로 삼아서 삶에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걱정근심이 생겨날 때마다 “나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다면…”이라는 기준을 제시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지 않기 때문에 걱정근심 하는 나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여 죽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도 연합하게 되고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이 옥토가 되는 모습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숨기고 감추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숨김은 나타내고 드러내시기 위한 숨김입니다. 마치 보물찾기에서 보물이 적힌 쪽지가 발견되기 위하여 숨겨지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도 못 찾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발견되고 찾아내지기를 바라시며 스스로를 숨기고 감추셨습니다. 우리 육체의 감각에 대해서 숨기신 하나님께서는 오직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발견되십니다. 믿음 안에서만 나타나시기 위하여 눈과 귀에는 숨기시고 감추신 것입니다.
이 믿음이란 바로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좋으신 분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좋으심은 실제 삶에서 측량함으로써 증명됩니다. 하나님을 좋으신 분이라고 말로만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찬송가 436장 2절을 보면 “주 안에 감추인 새 생명 얻으니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이것이 마음에서 실제로 느껴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전에 좋다고 여기던 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하는 것입니다.
배우자를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배우자에 대한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좋으심이 느껴진다면 배우자를 이전처럼 좋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배우자를 싫어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배우자는 하나님의 좋으심을 통해 생겨난 기쁨과 만족을 표현하는 대상일 뿐입니다. 배우자에게서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던 삶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시험들을 거쳐서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22장 12절에서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신 바와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막연히 이삭을 아깝지 않다고 여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좋으심이 가장 크다는 것을 알았기에 독자까지도 바칠 수 있는 믿음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우리에게서도 이러한 믿음은 증명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좋다는 말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의 가치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측량된 것 이상으로 좋으심을 느끼게 해주십니다. 부모에게는 자녀가 소중하지만 하나님의 좋으심이 더 크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자녀에 대한 태도도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두 말씀은 같은 맥락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나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다면…”이라는 기준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옥토로 유지하고자 한다면 “나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다면 이런 근심걱정은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하기를 위해서는 “나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다면 이러한 일들이 좋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기준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좋으심을 삶에서 실제로 느끼기 위한 방법이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예를 들어 서울대를 목표로 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이 학생이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제 마음에서는 옥토 만들기와 측량하기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내 마음에 서울대를 좋게 느끼는 것은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의 좋으심을 느끼기 위해서 서울대를 좋게 여기는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은 자이다.”라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한 옥토가 된 것이고, 서울대라는 대상을 통해 하나님의 좋으심을 더 크게 측량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옥토가 된 마음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측량된 것 이상의 좋으심을 느끼게 해주실 것이고 삶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을 해나가는 것이 선민의 직업이고 사명입니다.
이러한 일은 삶의 모든 문제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돈 문제가 생겨도 마음을 옥토로 유지하고자 하는 동안 마음을 돈 문제에 줄 수 없습니다. 멋진 이성 앞에서 먼저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하며 하나님의 좋으심을 더 크게 얻기를 바라게 됩니다. 회사에서 승진을 앞두고 있을 때에도 먼저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한다면 승진을 좋게 여길 수가 없고 남들처럼 노력할 수도 없습니다. 옥토를 유지하고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하기가 이루어지는 모습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선민의 일평생 원하시는 삶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을 통해 이러한 삶에서 나타나는 삶의 결과에 대해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마음을 옥토로 만들고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나게 됩니다. 곡식에 담긴 생명력이 성장을 이루게 하듯이 그 삶을 하나님께서 꽉꽉 채워나가실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가 심긴 삶은 내가 아닌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을 행사하시면서 성취해 나가십니다.
저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승철에게서 이루시려는 하나님나라의 내용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죽을 때까지 마음을 옥토로 유지하고, 숨겨지고 가려진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해서 믿음 안에서 느끼는 것을 직업으로 사명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럴 때에 삶의 관계들마다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고 하나님나라가 영글어져 가리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비단 저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에게서 나타나야 할 선민의 삶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길 수 있습니다. 내가 알지도 못하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어떻게 그것이 하나님 뜻대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 확신할 수 있을까요?
히브리서 11장 8절을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났을 뿐입니다. 자신이 인도받아 들어가야 할 땅이 어디인지 알지도 못했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근동지방의 기근을 구원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요셉은 어떤 식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지 안 적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형들에게 팔려갈 것이고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생활을 할 것이며 보디발 아내의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 갈 것을 몰랐습니다. 또한 감옥에서 두 관원장의 꿈을 해석하고 이를 계기로 바로의 꿈도 해석하게 되어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될 것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삶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어떻게 역사하실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측된 미래를 걷고자 합니다.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노력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무엇을 이루어보겠다고 계획을 합니다. 또 그 과정이 힘들다고 여겨질 때에는 종교의 힘이라도 빌려보고자 하고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 또한 인생의 도우미 정도로 불러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나라의 정의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나의 삶을 사시는 것입니다.
모세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세는 태어나자 광주리에 담겨 나일강에 흘려보내지게 됩니다. 히브리인들의 번영을 질투한 바로가 2세 이하의 모든 남자아이를 죽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나일강에서 목욕을 하던 바로의 공주가 모세를 거두었고 양자로 삼게 됩니다. 이렇게 애굽의 왕자처럼 살던 모세는 40살에 광야로 쫓겨나 양을 치게 되었고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삶의 과정을 모세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다윗도 양을 치는 목동이었을 뿐입니다. 자신이 선민의 나라인 이스라엘의 왕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시편을 보면 다윗이 자신의 직업으로 삼았던 것은 목동이었을 때나 사울 왕에게 쫓길 때나 왕이 되었을 때나 똑같았습니다. 마음을 옥토로 유지하는 것이 다윗의 직업이었습니다. 시편의 모든 결론은 하나님의 좋으심을 최고로 인정한 것입니다. 시편 23편 1절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고백은 노년의 다윗에게서 우연히 나온 노래가 아닙니다. 일평생 여호와를 목자로 섬기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이 옥토로 유지될 수만 있다면 삶에 어떤 시련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반석 위에 세운 집이 될 수 있습니다. 하박국 3장 17~18절의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옥토를 유지하기에 전념하는 선민들의 모습입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에서는 하나님의 좋으심에 대한 측량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삶에서 좋게 여기는 대상이 생길 때마다 “나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다면…”라는 기준을 적용하며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해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가정이나 직장이나 어디에서나 숨겨지고 가려진 하나님의 좋으심을 믿음 안에서 느끼는 일을 사명으로 삼고 전념하는 것이 선민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에 우리는 삶에 대해 마치 관망하는 제3자와 같은 입장이 됩니다. 나의 모든 관심은 옥토를 유지하기와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하기에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삶을 살아갈 여력이 없습니다. 그럴 때에 삶의 모든 열매를 맺는 과정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아래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삶에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께서 주권으로 사시는 삶입니다. 나라를 개혁하고 혁명을 일으키고 사회조직을 바꾸고 복지국가를 만들어야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으로 사시는 삶이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가 됩니다. 이 하나님나라는 마음을 옥토로 유지하고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하는 일에 온 관심을 둔 선민에게서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삶의 내용을 꽉꽉 채워 가시며 내가 알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을 계획하시고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마음을 옥토로 유지하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세상의 문제들로 근심걱정이 생길 때에 그 문제들을 끌어안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왔습니다. 마음이 길 가였고 돌밭이었고 가시떨기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마음을 옥토로 만들지 못했던 자신을 문제 삼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거센 풍랑 속에 주무신 예수님처럼,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때처럼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었더라면 지금 이 순간을 괴롭고 힘들다고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세상 일 때문에 괴롭고 힘들다고 여기는 나는 예수님과 연합하여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과 함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으로 채워져야만 합니다. 이렇게 십자가 생활화를 해나갈 때에 삶에는 하나님나라가 실제로 임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의 대상들이 좋게 여겨질 때마다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하며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반복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좋으심을 느끼면서도 이 세상의 대상들을 좋게 여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렸듯이 결혼을 해도 내가 좋아서 하면 오래가기는 힘듭니다. 3년만 지나면 그 사랑하던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미운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결혼도 하나님나라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사시는 삶에서 하나님이 시키셔서 하는 결혼을 할 때에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서로를 선물로 생각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나라는 심겨야 합니다. 이식되어야 하고 임플란트 되어야만 합니다. 그 방법은 바로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로 마음을 옥토로 유지하고 하나님의 좋으심을 측량하는 것을 일과 직업과 사명으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는 여러분의 삶을 통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말씀을 전하고 있는 중에도 마음이 너무너무 좋습니다. 그동안 이 복음의 약속을 놓치고 살았음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옥토로 유지하게 하시고 숨겨지시고 감춰지신 하나님을 믿음 안에서 좋으신 분으로 느끼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나의 삶은 하나님나라의 현장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