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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2

녹취문: 현장상황과 마음의 칼 분리_태승철 (마가복음 4:35~41)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4.22|조회수83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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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현장상황과 마음의 칼 분리>의 줄거리:

삶의 현장을 떠나거나 피하지 말고 그 속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면서 현장상황과 내 마음의 칼 분리를 이루어내야 합니다. 현장상황과는 좋거나 싫거나 마음이 얽히고 혼연일체 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만, 이렇게 얽히게 됨을 피하고 칼 분리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삶의 현장을 허락하신 이유이자 나의 사명입니다.


현장상황과 마음의 칼 분리

(마가복음 4:35~41)

 

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현장상황과 마음의 칼 분리>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현장상황과 마음의 칼 분리

본문에서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가 광풍을 만난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 배는 작은 고기잡이 배였으리라 여겨집니다. 저는 종종 이 배를 망망대해에 떠있는 일엽편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작은 배가 침몰 직전의 상황에 놓여있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같은 상황을 마주하고 있지만 그 반응이 너무나 다릅니다. 이 반응의 차이에서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윤곽을 뚜렷하게 붙잡을 수 있습니다.

4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고 나무라십니다. 예수님을 줄곧 따라다니던 제자들에게 실은 믿음이 없었다는 사실이 풍랑 속에서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생깁니다.

믿음을 현상과 본질로 나누어 생각할 때에 현상의 측면에서 제자들의 반응은 자연스러웠습니다. 배가 광풍을 만나 흔들리고 침몰하기 직전이었으니 무서워 떨며 몸부림치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여겨집니다. 인지상정(人之常情)이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뜻이기에 이 상황과 잘 부합하는 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상태를 두고 믿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인지상정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믿음이란 전혀 상식적이지 않고 자연스럽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침몰하기 직전의 배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니 억지스럽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이 상식적이지 않고 자연스럽지 않으며 억지스러운 믿음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억지스럽고 인지상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으며 자연스럽지 않고 어색하기 이를 데 없다고 여길만한 삶을 사시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믿음이 없는 상태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믿음 없는 상태를 자연스럽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든 사람들이 타락의 결과에서 나타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타락한 상태가 비정상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익숙해진 끝에 이러한 상태를 정상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요즘 사회분위기를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특히 거북하고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온 세계가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경제적 사회적 타격을 받고 있습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든 나라의 국민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 이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 말씀하실까요? 오늘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코로나19 사태로 장사가 안 되어서 재정적으로 침몰하게 생겼구나.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두려워하면 안 된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두려워할만한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시는 예수님의 태도야말로 억지스럽다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맞장구를 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예수님 말씀이 맞습니다. 코로나19 사태로 경제상황이 침몰하기 직전이지만 전혀 무서워 할 일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본문 말씀에서 나타난 예수님과 제자들의 반응을 비교하며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네 가지 특징적인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광풍으로 인한 침몰 직전의 배 안에 계셨습니다. 극한의 위기가 임한 삶의 현장에 예수님이 함께 계셨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38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라고 하였습니다. 고물은 배의 뒤편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몸이 처한 상황과 마음이 마치 칼로 베어 낸 듯이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몸이 있는 현장상황에 조금도 젖어들지 않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주무시는 배 안으로는 바닷물이 가득차서 침몰 직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에는 한 방울의 바닷물도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마치 유리벽으로 마음과 몸의 현장이 나누어진 것 같은 느낌까지 듭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의 마음이 어디에 계셨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광풍을 만난 삶의 현장을 떠나 계셨다면 대체 어디로 가셨다는 것일까요? 어디에 마음을 보내셨기에 평강 속에서 깊은 잠을 주무실 수 있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스파이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잡혀서 고문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혹독한 고문을 견디다 못해 기절하면 찬물을 끼얹어서 깨웁니다. 고문을 받다가 기절한 사람도 찬물을 끼얹으면 깨어나는데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상태에 계셨기에 광풍 속에서 주무신 것일까요? 그 작은 배가 풍랑을 만났으니 물이 넘쳐서 주무시는 예수님의 뺨을 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깨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 안기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 특징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삶의 현장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삶의 현장과 칼 분리되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셨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으로부터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네 번째로 예수님의 믿음은 삶의 위기 속에서만 발현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믿음을 보이셨습니다. 마음이 언제나 삶의 현장과 분리되어 하나님과 밀착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삶의 상황과 분리되어 계셨기에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동 또한 삶의 상황으로부터 비롯될 수 없었습니다. 상황에 맞추어 하나님과는 따로 생각하시거나 감정을 느끼시거나 의지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께서 접수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 품에 안기신 예수님에게 넣어주셨고 예수님은 모든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지정의를 따라 말하고 행동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광풍속의 배가 아닌 무화과나무 그늘에서 주무시고 계셨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에 차이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똑같이 삶의 현장에서 분리되어 하나님을 향하고 계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무화과나무 그늘에서 주무시는 동안에는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계심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더운 날 시원한 그늘을 찾아 자고 싶다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광풍이 대작하는 일엽편주 위에서 잠을 자겠다는 생각은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예수님의 마음이 삶의 현장으로부터 분리되었음을 잘 드러내는 무대가 되어준 것입니다. 이러한 무대에서 삶의 현장과 칼 분리된 예수님의 마음은 독보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제 제자들의 상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예수님의 상황에서 네 가지 특징을 살펴보았던 것처럼 제자들의 상황도 네 가지 특징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광풍을 만난 고기잡이배에 타고 있었습니다. 삶의 현장 속에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말씀드렸듯이 이 삶의 현장은 위기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는 점이 특징적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삶의 현장과 마음을 칼 분리시키셨던 것과는 다르게 제자들의 마음은 삶의 현장상황과 구분이 어려운 정도로 얽매여 있었습니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마음이 삶의 현장을 빨아들였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삶의 현장과 얽혀있었고 정복당해있었습니다.

세 번째로 제자들은 예수님과는 반대로 마음을 하나님과 칼 분리 상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상태를 믿음이 없다고 나무라십니다. 우리가 제자들과 같은 마음 상태라면 설령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도움을 구할지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믿음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칼 분리된 상태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이란 마음을 하나님께로 보내고 마음이 하나님과 혼연일체가 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은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과 칼 분리되어 삶의 현장과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제자들과 같은 마음으로 세상과 혼연일체를 이룬 채로 하나님을 부를 때에 기독교는 종교로 전락하게 됩니다. 복음을 엉터리로 믿고 있는 셈입니다.

네 번째로 예수님의 지정의와 언행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과는 다르게 제자들의 지정의와 언행은 삶의 현장을 마음에 받아들임으로써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정의와 언행만이 진리이기에 세상으로부터 받은 지정의와 언행은 모두 오류투성이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의 상태를 종합적으로 믿음이 없다는 말씀으로 드러내고 계십니다. 믿음은 삶의 현장에서 드러납니다. 특히 삶의 현장에 광풍이 대작하는 것과 같은 순간에 믿음의 여부는 드러나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코로나19 사태가 바로 이러한 순간일 수 있습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예배당에 모이지 못하게 된 상태에서 담임 목사님이 전혀 걱정하지 않고 잠을 잘 수 있다면 코로나19 사태와 마음을 칼 분리시킨 증거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상황을 접수하시고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반대로 예배당에 모이지 못하게 된 상황을 걱정하고 염려하며 하나님을 찾고자 한다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칼 분리되었고 삶과 얽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나는 절대로 하나님과 밀착을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선언을 하면서 도움을 구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저 또한 이러한 마음가짐을 믿음이라 생각하고 살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신앙은 종교로 전락하고 맙니다. 삶의 현장상황과 혼연일체가 된 상태에서 유발되는 지정의를 따르는 동안에는 인간이 만들어낸 신을 찾게 됩니다. 스스로의 방식대로 상황을 조절하고 개선시켜나가기를 원하고 그것을 위해 신의 힘을 빌려보고자 합니다.

 

믿음이란 삶의 현장상황과 마음의 분리이며 하나님과의 밀착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본래 세상의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온전한 기쁨과 만족으로 채울 수가 없습니다. 당장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힘든 분들은 이 사태만 종결되면 기쁘고 만족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는 물론이고 삶의 어떤 풍랑이 해결되더라도 마음의 기쁨과 만족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으로 채워질 수 있고 기쁨과 만족은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에 세상을 담게 된다면 하나님과는 칼 분리될 수밖에 없고 기쁨과 만족도 생겨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온전한 기쁨과 만족을 누리고자 한다면 마음은 세상과 칼 분리되고 하나님과 밀착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주권자이시고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삶을 접수하시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마음을 삶의 현장상황과 칼 분리시키지 못하고 얽매여 있다면 하나님의 주권은 온전히 행사될 수 없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의 마음과 삶을 분리시키기 위해 주권을 수행해나가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칼 분리된 상태를 방치했다가는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삶의 현장과 마음의 칼 분리는 믿음의 기본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다면 삶의 현장에서 마음을 칼 분리시켜야만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몸에 있는 심장을 따로 떼어놓고 다닐 수 없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을 심장처럼 여겨 어디를 가나 기억하고자 했습니다. 언제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억함을 통해 삶의 현장과 마음을 칼 분리시켰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유지할 수 없다면 삶의 현장과 마음을 칼 분리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삶의 현장과 분리할 수만 있다면 마음은 하늘 아버지로 채워지게 됩니다. 또한 삶의 현장은 하나님 아버지가 접수하실 것이고 하나님의 지정의와 언행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또 나의 영향력을 넘어선 영역까지도 하나님께서 다스려 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과 마음을 분리시키기 위해 냉혹해져야만 합니다. 세상에 대해 냉혹해질 때에 진정한 의미의 이웃사랑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세상과 얽매인 마음에서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은 오지랖이고 얽힘이고 속박에 불과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하려다가 같이 빠져죽는 일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세상과의 분리가 전제될 때에 온전한 이웃사랑 또한 가능함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주신 이유는 가족들에게 마음을 붙이고 속박하라는 이유가 아닙니다. 마음을 칼 분리시킬 수 있을 때에야 마음은 하나님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가족들은 하나님께 접수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지정의와 언행을 가족들에게 표현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가족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한민국에 태어나게 하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대한민국으로부터 칼 분리시킬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대한민국에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나라를 위하고자 한다면 먼저 마음은 나라에 냉담해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믿음은 인지상정이 아닙니다. 타락한 세상의 관점에서 믿음은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타락하기 전의 사람은 판단하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삶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라도 그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찾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타락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은 삶의 상황으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찾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치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으려 합니다. 원하는 정당의 후보가 당선되어야만 기뻐할 수 있다면 마음이 세상에 얽매인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과 얽매이고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에서는 대한민국을 하나님께서 접수하실 여지도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우리는 마음에서 대한민국을 칼 분리시킬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대한민국을 접수하실 수 있도록 해드려야만 할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운명은 정권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바로 여러분에게 달려있습니다. 여러분이 마음에서 대한민국 상황을 칼 분리시키고 하나님을 향하게 될 때에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역사는 대한민국 전체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 삼백 명만 있어도 대한민국 전체가 하나님의 주권에 장악될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삶의 어떤 상황보다도 우선하여 느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마음을 삶의 상황으로부터 칼 분리시키고 하나님과 밀착되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나의 죽음입니다. 어떤 삶의 현장에 있을지라도 이 죽음을 기억하여 삶의 현장과 마음이 칼 분리되게 하여 주심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은총을 누리며 확인하는 하루를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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