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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2

녹취문: 코로나19는 참 접촉을 위한 기회_태승철 (마가복음 5:25~34)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4.24|조회수94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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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코로나19는 참 접촉을 위한 기회>의 줄거리:

'모임자제' '접촉주의' '거리두기' 코로나19 난리통에 회자되는 전세계의 화두입니다. 그러나 위기가 기회라는 말처럼 이 미증유의 난리통이 의외로 결정적인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 싶은 마음이 듭니다. 차제에 진짜 접촉, 참 진리에 입각한 접촉, 각 사람의 인생 전체를 완전히 뒤바꿀 수도 있는 접촉에 모든 주의를 집중해보는 겁니다.


코로나19는 참 접촉을 위한 기회

(마가복음 5:25~34)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코로나19는 진짜 접촉을 위한 기회>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코로나19는 진짜 접촉을 위한 기회

본문을 살펴볼 때에 코로나19를 의식해야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본문을 해석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코로나19 사태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주제와 연결됨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위와 같은 제목을 정해보았습니다.

현재 전 세계에서 250만 명의 확진자가 나왔고 176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미증유의 사건은 도대체 하나님이 왜 이러시지?”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조심스럽게 접근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코로나19 사태에서 가장 중요하게 요구되는 것은 모임자제, 거리두기, 접촉주의입니다. 십자가 복음의 시각에서 살펴보면 이러한 요구가 하나님의 뜻에도 담겨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임자제, 거리두기, 접촉주의가 요구되는 현 상황을 십자가 복음으로 반성하며 성찰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미국은 현재 확진자 수에서 1등입니다. 현재 82만 명의 확진자가 나오고 44천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한편 우리나라는 방역에서 1등의 모범을 보이고 있습니다. 미국은 전 세계 개신교의 중심국가입니다. 한국은 아시아권의 개신교 중심국가입니다. 이 두 개신교 중심국가가 코로나19 사태를 맞이하며 정반대의 1등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코로나19 사태가 하나님께서 개신교를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설교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서도 접촉이 중요하게 언급됩니다. 본문에는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아 온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신체적인 고통과 불편은 말할 것도 없고 재산까지 모두 탕진하였습니다. 당시의 의원이라고 해봤자 지금과 같이 효과적인 치료는 불가능하였습니다. 온갖 시도를 해보는 중에 재산은 탕진되었고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괴로움은 심해져갔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옷감이 흔한 시대도 아니기에 열두 해를 하혈을 하였으니 위생의 문제 또한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는 더욱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종교적 사회적 문제였습니다. 당시 유대사회는 우리사회와는 다르게 종교가 사회전반을 지배해나갔습니다. 그리고 여성의 하혈은 유대교 율법에서 부정한 자로 규정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열두 해 동안 하혈이 멈추지 않았던 이 여인은 사회생활 자체가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레위기 15장을 보면 이 부정함에 대한 언급이 자세하게 나타나는데 누웠던 침상은 물론이고 사용한 식기를 비롯해 모든 물건이 부정하게 여겨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인과 접촉하지 않고 사용한 물건에만 접촉했더라도 부정하게 여겨져 정결의식을 행해야만 했고 일정기간 사회와 격리되어야만 했습니다. 하물며 이 여인은 당사자로써 열두 해를 이러한 질병에 시달렸기 때문에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결혼한 여성이었다면 남편은 물론이고 자녀들과도 접촉할 수 없습니다. 결혼하지 않았더라도 부모나 형제자매나 친구도 접촉할 수 없었으므로 이 여인은 어느 누구와도 삶을 공유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마치 오늘날의 코로나19 사태를 연상시킵니다. 코로나19 사태는 접촉을 주의할 것을 요구하지만 이 여인의 경우는 접촉이 불가한 상황이었습니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데 단 한 사람과도 공유할 수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몸은 살아있고 의식은 깨어있어도 삶이 죽어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되었고 몰래 사람들 틈에 끼어서 예수님을 찾아오게 됩니다. 본래 이런 행동은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주변에서 몰랐기에 망정이지 알았다면 모든 사람을 부정하게 만든 벌로써 어떤 처벌을 받을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이 여인은 목숨을 걸고 예수님께 접촉을 시도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참 신비한 광경이 펼쳐집니다. 여인이 간절한 바람을 가지고 예수님과 접촉하자 예수님으로부터 능력이 빨려들어 가고 여인의 온전하지 못했던 상태가 온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능력이 빠져나감을 느끼셨고 접촉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과 연결되고 일체되어 계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의 능력이 흘러들어와 마치 댐의 물처럼 머물러 있었습니다. 마치 결재 과정과도 같이 순서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곳에 예수님의 의식이 향하게 되고 또 그곳에 하나님의 능력이 흘러나가 병을 고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신비로운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의도적 결정단계가 없이 능력이 흘러나갔다는 점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병자들의 고침은 모두 만남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베푸심으로써 병이 나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는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이 그냥 빠져나갑니다.

예수님과 하나님과 여인의 관계를 예로 들어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새 집을 지을 때에 기존에 땅 밑으로 흐르던 수도관에서 파이프를 연결합니다. 본문의 상황이 마치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물을 담고 계시는 예수님이라는 수도관에 파이프를 접촉시키고 연결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예수님과의 접촉과 연결입니다. 다른 병자들이 병 고침을 받은 것과의 차이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고치신 다른 병자들은 마치 물동이로 물을 길어가듯이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능력을 받아가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께 파이프를 연결한 것처럼 자신 안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오게 한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수도관처럼 접촉하는 모든 대상에게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제공하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본문에 언급된 대로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싸 밀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30~3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옷에 손 댄 사람을 찾으시자 제자들이 기가 막혀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과 접촉한 사람을 찾고자 한다면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몸의 접촉이 아닌 믿음의 접촉을 이룬 사람을 찾고 계셨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볼 여지가 생깁니다. 28절을 보면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는 여인의 믿음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34절에서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이 여인만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마가복음 310절을 보면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고 하였습니다. 656절에서도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 접촉하면 병이 낫는다는 생각은 예수님께 몰려왔던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생각을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믿음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접촉하고 있는 중에 특별히 이 여인을 접촉의 대상자로써 찾고자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여인에게는 다른 사람들과의 분명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이 세상에 있는 사람 그 누구와도 어떤 접촉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열두 해 만에 만난 첫 번째 접촉의 대상이었습니다. 반면에 다른 군중들의 예수님과의 접촉은 사회생활의 연장선 속에 있는 한 부분이었을 뿐입니다. 이 차이가 예수님이 보신 믿음의 차이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 문제로 예수님을 찾아오게 되었다고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사람의 마음은 먼저 배우자와 접촉한 상태입니다. 접촉은 곧 감염과 전도와 전달의 현상이 나타납니다. 코로나19 사태에 빗대어 생각해보자며 접촉은 감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배우자와 접촉한 상태에서는 마음은 배우자로 전달된 셈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다른 대상의 기운으로 감염되어 있고 전달받고 있는 상태에서는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본의 아니게 혈루병으로 열두 해를 사회와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그 누구와도 접촉할 수 없었기에 그 누구의 기운으로부터도 감염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예수님과 접촉하자 하나님 아버지의 기운에 감염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온전하지 못하던 부분이 온전한 상태로 바뀌게 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마주하고 불쌍히 여김을 받기를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았기에 그 마음은 누구의 기운으로도 감염되지 않았습니다.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는 부정하다 규정된 이 여인은 실질적으로는 누구보다도 깨끗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인에게 예수님은 마음의 첫 번째 접촉의 대상이 되셨고 그 결과 예수님 안에 들어와 있던 하늘기운이 여인의 마음과 몸을 정복하고 감염시키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서도 나타나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마음으로의 접촉입니다. 이 여인처럼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접촉할 때에 예수님은 항상 첫 번째 대상이 되셔야만 합니다. 마음이 가족과 접촉을 이루어서 배우자의 기운에 감염되고 자녀의 기운으로 감염되고 부모의 기운으로 감염되었다면 예수님과의 접촉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가족뿐만이 아닙니다. TV를 볼 때에 감염 될 수 있고 어떤 방식으로 접하든지 세상은 마음을 감염시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예수님을 불러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 자체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성령님을 통해 일체되어 계심에 참여함을 전제로 합니다. 이 삼위일체에 참여함이 없다면 믿음이 아닙니다. 여인이 병을 고침 받은 것도 예수님과 첫 번째 접촉이 이루어지고 첫 번째 마음을 드리는 대상이 예수님인 것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이 사건의 궁극적 목적은 바로 믿음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코로나19에 감염되듯이 세상과의 접촉을 통해 세상기운으로 감염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이 여인과 같이 접촉을 끊고 마음이 깨끗해진 상태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여인은 본의 아니게 병으로 말미암아 부정하게 규정되어져 접촉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여인과 접촉하면 사회생활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고 이 여인 자신도 어떠한 사회생활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역으로 예수님과의 접촉을 이루고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할 수 있는 놀랍고도 신비한 역사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마음을 열두 해를 혈루병 앓던 여인과 같이 만들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수많은 대상과 접촉하고 그러는 동안 마음은 세상기운에 감염되었습니다. 이 상태로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아무리 불러도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하는 믿음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여인은 혈루병 때문에 세상과 접촉할 수 없었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자의 자아의식을 가짐으로써 세상과의 접촉을 끊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누구에게도 관여할 수 없고 관계를 맺을 수도 없으며 문제를 해결해기 위해 손을 내밀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가질 때에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세상과의 접촉은 끊어지고 오직 예수님과의 접촉만이 남게 됩니다. 예수님과의 접촉이 첫 번째가 될 때에 하나님과 예수님이 성령님을 통해 일체되심에 참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라는 수도관에 파이프를 연결하는 것처럼 나에게 하나님의 뜻과 능력이 흘러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사안별로 무엇을 이루어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서 필요한 일들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첫 번째 접촉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과 능력이 때를 따라 삶의 부분마다 온전하게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담긴 의미입니다.

 

코로나19 사태는 우리에게 기존의 접촉에 대한 반성과 회개를 촉구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라는 자아의식을 통해서 마음에서 세상과의 접촉을 끊고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첫 번째 접촉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진짜 접촉, 참 접촉, 유일한 접촉을 통하여 삶 전반에 걸쳐 온전함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수도파이프를 통해 흘러들어오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에 못 박힌 자의 자아의식을 통하여 혈루병 여인의 접촉상황이 내게도 이루어지게 하여 주심으로써 내 마음이 예수님을 첫 번째 접촉의 대상으로 만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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