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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가진 게 하나님뿐인 배짱>의 줄거리:
사전은 배짱을, 조금도 굽히지 아니하고 버티어 나가는 성품이나 태도라고 설명합니다. 부언하자면 예측되는 불리함이나 손해나 걱정거리에도 굽힘이 없는 마음가짐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은 일상의 현장으로 파송된 제자로서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제자들이 삶의 현장을 누빌 때 이 세상의 눈에 비친 특징이 바로 배짱입니다.
가진 게 하나님뿐인 배짱
(마가복음 6:1~13)
7.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8.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9.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10.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11.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12.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13.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가진 게 하나님뿐인 배짱>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가진 게 하나님뿐인 배짱’
가진 것이 하나님뿐인 사람이 이 세상을 향해 배짱을 보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내리신 지시들이 나타납니다.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나 두 벌 옷도 준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님의 지시를 그대로 받아들여서 활동하는 제자들에 대해 “무슨 배짱이냐?”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전에서 배짱이라는 말을 찾아보면 “조금도 굽히지 아니하고 버티어 나가는 성품이나 태도”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본문과 연관 지어서 신앙적 관점에서 이해해보자면 “예측되는 불리함이나 손해 혹은 걱정되는 상황에도 아무런 장애를 느끼거나 굽힘이 없는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걱정되고 염려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전혀 구애받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가진 것이 하나님뿐인 사람의 모습은 바로 그러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분명히 손해를 볼 수 있고 걱정되고 염려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당사자는 전혀 걱정과 염려에 구애받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가지고 그 외에 다른 것들을 더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복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가지고자 할 때에만 하나님 갖기는 가능합니다.
마음에서 돈을 가진 사람이 결코 하나님을 덧붙여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9장 24절에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돈뿐만이 아닙니다. 자녀를 지독하게 사랑하는 부모나, 사업을 지독하게 사랑하는 사장님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무슨 배짱인가?”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굽힘이 없는 마음가짐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본문의 맥락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향해 어떤 배짱을 부리실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은행에 거금을 저축해둔 사람이 당당한 것은 배짱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믿는 구석이 있을 뿐입니다. 노후걱정을 하지 않는데 그것이 연금 때문이라면 이 또한 배짱은 아닙니다. 연금을 믿고 있을 뿐입니다. 젊은이가 공부도 안하고 취직할 생각도 안합니다. 대체 무슨 배짱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상속받은 유산이 어마어마합니다. 유산이 믿는 구석이 된 것입니다. 유산도 없고 돈도 없고 학력도 없는데 씩씩하고 행복하게 살아간다면 그것이야 말로 배짱을 부리는 모습일 것입니다.
앞서 우리는 열두 해를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고침 받은 사건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또 회당장의 열두 살 된 소녀가 죽었는데 예수님이 살리신 사건에 대해서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제자 파송의 사건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병을 앓던 여인은 누구와도 접촉이 불가능한 상태를 상징합니다. 율법의 규정상 하혈하는 여인은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을 부정하게 만드는 존재였고 부정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 상태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접촉을 이루는 계기가 됩니다. 이는 곧 마음이 세상과 접촉을 이루는 동안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가능함을 상징합니다. 이 여인은 마음에서 세상과의 접촉이 제로상태였기에 예수님과 접촉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이 어떤 상태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이 세상과 어떠한 관계도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가 되어야만 예수님과의 접촉을 통해 하나님과 밀착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열두 살 된 소녀가 죽었다가 예수님에 의해 살아난 사건은 마음이 성년이 되어야함을 상징합니다. 열두 살은 성년식이 이루어지는 나이입니다. 성년식이란 지금까지는 부모를 의지하고 살았으나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이 열두 살 소녀가 예수님에 의해 살아났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성년이 되고자 한다면 예수님을 의지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앞서 혈루병 여인이 예수님과 접촉을 이루었던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밀착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밀착을 이루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목표로 해야 하는 영적인 성년의 삶입니다. 이 영적 성년의 상태가 예수님의 상태이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배짱을 부릴 수 있는 이유도 생겨납니다. 마음이 오직 하나님과 밀착되어 있는 동안 마음에서 세상은 겉돌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해서는 내가 아닌 하나님께서 접촉을 이루십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부르셨을 때에도 제자들과 마음으로 접촉을 이루셨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과 밀착되어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과 일체가 되어계셨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뜻으로 제자들과 관계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지정의와 언행을 장갑삼아 제자들과 관계하셨고 또한 개별적으로 관계하셨습니다.
한편 우리가 읽지 않은 본문의 1~6절까지를 보면 이러한 삶의 모습을 보이신 예수님이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당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출생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로써 네 형제와 자매들이 있었으며, 아버지의 목수 일을 도우며 함께 어울려 지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지혜와 권능을 보이시니 이상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런 지혜와 권능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지혜와 권능은 하나님과의 밀착을 통해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밀착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그러한 가능성을 자신에게 적용할 수도 없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알지 못하니 볼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유명한 3대 랍비의 문하생으로 십 년 정도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오신 것도 아니었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마주한 것 같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나타내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밀착되어 계시다는 것을 표면적으로는 알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배척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후보가 대통령에 출마를 하였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 후보가 기준 이상의 자질과 경력을 갖추었으리라 예상할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에 들어서 지지를 했는데 이윽고 학력이 중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지지하는 마음이 불현듯 사라집니다. 학력이 낮다는 사실이 걸림돌이 되어서 실제로 그 사람이 어떤 능력과 지혜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도 이와 닮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목수 일을 하던 것을 잘 알았고, 예수님과 형제자매들과도 면식이 있었습니다. 그저 동네 청년인줄 알았는데 어느 날부터 지혜와 권능을 보이시니 그 이유를 찾기보다는 그저 이상하다고 여겨 배척하였던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의 집안이 좋았고 학벌이 대단했다면 고향 사람들의 반응도 전혀 달랐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파송에는 이렇게 고향에서 배척당하신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파송이라는 의미를 공간적으로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부터 예수님이 안 계신 다른 지역으로 보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시키신 일을 염두에 두자면 “예수님이 안 계신 자리에서 예수님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대신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이 받으신 배척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권능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심으로써 지혜와 권능을 드러내셨으나 사람들은 배경과 학력이 있어야 그럴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적어도 유명한 랍비의 문하생 정도의 경력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자리에 제자들을 세우는 것이 바로 파송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파송은 열두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파송 받은 제자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파송이란 예수님이 안 계신 곳에서 예수님의 자리에 서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자리는 오직 하나님과 접촉을 이루는 자리입니다. 혈루병 여인이 오직 예수님과 접촉했던 것과 같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자리는 신앙적 성년의 자리입니다. 부모에게 의존하고 살아가던 열두 살 소녀가 죽었다가 예수님에 의해 살아나게 된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접촉을 통하여 하나님과 밀착하며 사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자리에 설 때에 나타나는 일이 있습니다. 먼저 8~9절을 보면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돈은 고사하고 지갑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마태복음을 보면 지팡이도 갖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행자들에게 지팡이는 힘을 덜게 하는 기능 이상의 도구로써 호신용 무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마태는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만 이러한 차이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예수님께서 이러한 요청을 하신 이유는 우리가 살펴보았던 파송의 의미를 강조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의 자리에 서야한다는 것입니다.
혈루병 여인이 세상과는 어떠한 관계도 맺을 수 없는 상태였던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오직 하나님과 관계하셨던 것과 같이 우리 또한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를 갖는 것이야말로 파송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선교사님들이 오지로 선교를 떠납니다. 다만 몸은 멀리 떠날지라도 마음이 세상과 단절을 이루지 못하고 하나님과 밀착될 수 없다면 파송 받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서울 시내 한 복판에 살고 있더라도 세상과 관계 제로상태를 이루고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며 살아간다면 파송 받은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국을 떠나 타지에서 복음을 전하는 분들을 선교사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의미에서 누구나 선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음에 하나님만 가진 자들이야말로 파송 받은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결혼도 파송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남자에게 한 여자에게 파송을 받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밀착된 상태에서 결혼생활이 이루어질 때에 파송이 됩니다. 또 하나님과 밀착 된 상태에서 자녀를 양육할 때에 부모로 파송 받은 것이 됩니다. 나의 위치가 어떠하든 예수님의 자리에 서서 하나님만 가진 상태가 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업하는 사장님은 사업장에 파송 받은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몸은 사업장에 있을지라도 마음에 하나님만 계시는 상태가 되면 파송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에서 살펴보았듯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파송을 받을 때에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마음에 하나님만 가질 수 있다면 삶의 현장에는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31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바와도 이와 같습니다. 그리고 33절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나를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가질 때에 아무 염려를 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천지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백오십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였을 때에 광야 사십 년을 부족함 없이 먹고 마시고 입고 살았습니다. 광야에서의 삶은 하나님 한 분만을 가지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 한 분을 가질 때에 모든 것은 필요를 따라 주어질 것입니다. 반대로 삶에 대한 모든 준비를 다 했어도 하나님을 가지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인류역사상 가장 발전된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화성탐사를 계획할 정도로 우주공학이 발달했고, 불과 몇 십 년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핸드폰이 보편화 되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전 세계와 연결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최첨단의 시대에도 코로나19를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진국들이라 불리는 나라에서 속수무책으로 수만 명씩 죽어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코로나19를 연달아 두세 번만 더 일으키신다면 병에 안 걸린 사람들도 두려움에 의해 죽어갈지 모릅니다. 지구는 인류의 공동묘지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코로나19 사태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어야만 합니다. 최첨단의 시대를 자랑하면서도 전염병 하나를 막지 못해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약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모든 것을 다 준비하고 다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을 가지지 못하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을지라도 하나님만 가졌다면 다 가진 것입니다.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두벌 옷도 없이 제자들이 파송된 모습은 우리에게는 재력도 없고 배경도 없고 학력도 없는 것으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한 분을 가짐으로써 다 가진 것이기 때문에 아무 염려 말고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처럼 배짱을 부릴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나는 하나님 말고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어쩔래?”라고 자랑스럽게 드러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기준에서는 별 볼일 없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노후를 위해 준비한 연금도 없고, 부동산이 있어서 세를 받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자리에 설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양식 걱정하지 말고 지갑 걱정하지 말고 예수님의 자리에 서라고 말씀하십니다. 혈루병 여인처럼 세상과의 모든 관계가 끊어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어떠한 대상과도 접촉이 이루어지지 않는 마음상태에서 오직 하나님과 접촉을 이루는 것입니다. 또한 열두 살 소녀가 죽었다 살아나 예수님의 손을 붙잡았던 것처럼 이제는 하나님과의 밀착상태를 유지함을 통해 신앙의 성년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배척당하셨듯이 세상은 파송 받은 자의 삶을 배척합니다. 노후자금이 없으면 쪽박 차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은퇴하면 뭘 먹고 살 것이냐 묻습니다. 아직 자녀들이 대학도 졸업하지 못했고 결혼도 시켜야하는데 그 자금을 어디서 대겠느냐고 합니다. 건강을 염려해서 보험을 안 들 수 있냐고 묻습니다. 세상은 항상 이러한 질문들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준비된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웃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 보여야 될 파송 받은 자의 배짱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정상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배짱을 부릴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혈루병 여인과 같은 마음상태가 되어야만 합니다. 세상의 어떤 대상과도 접촉할 수 없는 상태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연합할 때에 세상과의 관계는 끊어지게 됩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배우자나 자녀에 대해서 관계할 수 없습니다. 이 상태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마음이 세상과 접촉하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과도 접촉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밀착하고 계셨기에 우리 또한 예수님의 자리에 설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세상에 대한 죽음을 대신 이루신 것입니다. 혈루병 여인처럼 세상과 끊어질 수 있어야만 비로소 하나님과 접촉이 가능하고 밀착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통해 세상과의 관계를 제로상태로 만들 때에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충만하셨던 것처럼 나도 하나님으로 충만해집니다. 이 충만함을 경험할 때에 세상의 어떤 근심과 걱정거리도 깃털처럼 가볍고 사소하게 여겨지기 시작합니다.
어떤 분들은 돈 없는 노후가 너무나 걱정스럽게 여겨질 것입니다. 걱정이 앞서는 이유는 여러분의 마음이 굶주렸기 때문입니다. 한 일화를 예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암이 온 몸에 전이되어 죽음을 앞둔 환자분을 위해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 여름이라 더워서 몸에 땀이 흐르는데 에어컨도 틀수가 없었습니다. 환자분이 에어컨 바람에도 괴로워하셨기 때문입니다. 땀을 닦은 수건을 무의식중에 이불위에 올렸더니 환자분께서 무겁다고 하시기에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이처럼 손수건 하나를 무겁게 느끼는 그 상태가 우리의 마음에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세상 걱정거리가 엄청나게 무겁고 두렵게 느껴지는 것은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배부르면 세상 사람들이 “무슨 배짱이냐?”라고 물을 정도로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아무리 봐도 믿을 구석이나 보장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아무 이유 없는 배짱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마음이 배불렀기에 나타나는 배짱입니다.
우리는 “가진 게 하나님뿐인 배짱”인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한 관계가 제로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까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가서 하나님과 밀착하게 됩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배부르면 세상의 관점에서는 걱정되는 상황임에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 배부르기가 쉽지 않다는 말씀을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하나님으로 배부를 때에 나타나는 증거들을 제시하며 우리의 믿음을 독려합니다. 지금 당장은 하나님으로 배부르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으로 배부르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게 될 것임을 봄으로써 배부름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광풍 만난 배 위에서 예수님께서 주무셨던 모습을 떠올려보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마음이 하나님과 접촉하고 밀착을 이루어서 배불렀을 때에 나타나는 평강입니다.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하늘에서의 모습으로 변하신 예수님을 뵈었을 때에 산 아래 인간세상의 일들을 모두 잊어버렸던 것을 떠올려보시기를 바랍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그 평강이 깨지지 않았던 것을 떠올려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러한 증거들을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으로 배부르기를 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배부르면 노후 연금이 없다고 해서 걱정할 리가 없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하나님으로 배부르고자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믿음만으로도 걱정이 사라져가는 것을 경험하실 수 있습니다. 세상을 향하여 배짱을 부릴 수 있게 됩니다. 이 배짱은 내가 지금 하나님과 밀착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밀착되어야만 한다는 믿음의 증거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밀착되고 싶다는 소망의 증거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내가 처한 상황은 마땅히 걱정하고 염려하고 주눅 들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배부름으로써 배짱을 부리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 이유를 세상 사람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시고 그 아버지를 십자가를 통하여 밀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밀착의 가능성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 믿음은 현실이 될 것입니다. 이 믿음을 통해 세상 사람들은 “저 사람은 도대체 무슨 배짱이야?”라는 말을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향해 배짱을 부리는 배짱이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하나님을 가진 자로써 배짱이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연합함으로 혈루병 여인이 상징하는 의미가 내게서 실현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과의 접촉과 관계의 제로상태에서 하나님과 밀착함으로써 세상이 볼 때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의 사람이 배짱을 부리는 당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