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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악령세례자를 성령세례자로>의 줄거리:
마가에 의하면 예수님 공생애 사역의 첫 번째 일은 제자를 부르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누구입니까? 사람을 낚는 어부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정의하십니다. 마가의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서로 다른 두 태초로부터 흐르고 있는 두 개의 세계 중,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사람을 낚아 올리는 자들이 제자라는 것이지요.
악령세례자를 성령세례자로
(마가복음 1:14~20)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악령세례자를 성령세례자로>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악령세례자를 성령세례자로’
1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목과 연관 지어 생각해보자면 악령세례자를 낚아서 성령세례자가 되게 하는 일이 바로 사람을 낚는 어부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낚시에는 낚는 자와 낚이는 자가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바다낚시를 할 때나 그물로 고기를 잡을 때 낚시꾼은 배 위에 있고 낚이는 물고기는 바다 속에 있습니다. 바다 속에 있던 물고기를 낚아서 낚시꾼이 있는 배 위의 광주리로 옮기는 것이 낚시입니다. 또 민물낚시를 할 때에 낚시꾼은 육지에 있고 물고기는 강이나 호수의 물속에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낚는 자의 위치와 낚이는 대상의 위치가 서로 다른 상태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17절의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에는 처지가 다른 두 세계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마가는 첫머리에서 예수님을 통해 시작되는 새로운 세계의 태초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1절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씀에서 등장한 ‘시작’이란 단어는 헬라어 아르케(ἀρχή)로써 창세기 1장에서 언급 된 태초라는 의미와 동일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세상에는 두 개의 태초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태초는 아담을 기준으로 하는 역사의 흐름입니다. 두 번째 태초는 예수님을 기준으로 하는 새로운 역사의 흐름입니다. 이것이 낚시에서 드러나는 처지의 차이와 일치합니다.
아담에서 시작된 옛 역사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예수님으로 시작되고 있는 새 역사로 끌어 올리는 것이 바로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시작하신 새로운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담이 시작한 옛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낚시하듯 건져 올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세계를 구분하는 핵심 단어는 바로 세례입니다. 어제 우리가 살펴본 1~13절까지 ‘세례’라는 말이 무려 여섯 번 등장했습니다. 한편 마태복음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19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라고 하신 예수님의 지상명령에도 세례가 언급되었습니다. 마태복음의 마지막 부분과 마가복음의 시작 부분이 세례라는 단어를 통해 이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이 세례를 통해 처지가 다른 두 세계의 본질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아담으로 시작된 옛 세계는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세계에 속한 사람들은 옛 세계에 속한 사람들을 끌어올려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아담을 태초로 해서 흐르고 있는 옛 세계는 악령세례를 받은 자들의 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태초로 해서 흐르게 된 새로운 세계는 성령세례를 받은 자들의 세계입니다. 즉 사람 낚는 어부가 된다는 것은 악령세례 받은 자를 성령세례 받은 자의 세계로 끌어 올려주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제 말씀에서 악령세례와 성령세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세례에는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요소는 죽음입니다. 두 번째 요소는 다시 태어남입니다. 세 번째 요소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세례라는 말은 관용적으로 무엇인가에 몸이 완전히 뒤덮인 상태가 되는 것을 일컫습니다. 정치인들이 죄를 지었을 때에 날계란으로 세례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세례라는 말의 표면적인 의미만을 사용한 경우입니다. 세례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는 물에 몸을 완전히 잠기게 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잠긴다는 행위가 세례의 전부가 아닙니다. 물에 잠기는 것은 옛 세계에 대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물 밖으로 다시 건져지는 과정이 이어집니다. 기존 세계에 대해 죽었다면 반드시 새로운 세계에서 다시 태어남이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죽기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새로운 삶이 시작되게 됩니다.
이 세 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사람 낚는 어부의 의미에 대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악령세례 받은 사람들을 성령세례 받은 사람의 세계로 이끌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성령세례 받은 자의 세계에 있는가에 대해서도 점검해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처지에 있느냐는 것은 단지 다른 사람을 끌어올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령세례 받은 자의 세계에 있을 때에 삶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부관계가 달라지고, 부모자녀 관계가 달라지며, 직장 문제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나 때문에 나라가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현재 전 세계가 코로나19 사태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각계각층에서 이 사태의 종식을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란 이 사태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부터 성령세례를 받은 자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야 말로 코로나19 사태에 대한 최고의 대응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럴 때에 악령세례를 받은 채 옛 세계에 머무는 자들을 건져 올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옛 세계가 악령세례를 받은 자들의 세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악령세례는 아담에게서 일어난 일입니다. 마음이 사탄의 영에 의해 정복된 것입니다. 사탄의 시험을 받아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아담은 스스로의 삶에 대해 판단하는 주권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권자로써 판단하셨고 아담은 하나님과 밀착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판단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사탄은 아담을 시험하였고 그 말에 따라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은 악령세례를 받은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담은 상태가 죽게 된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회개를 요청하십니다. 마음에 세상을 담은 상태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담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타락은 이와는 반대였습니다. 하나님을 담은 상태에서 돌이켜 세상을 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아담은 “내가 왜 마음에 하나님만을 담고 있어야 하지?”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밀착은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담은 마음을 죽게 하는 것이 악령세례입니다.
하나님과 밀착이 죽어버린 아담은 전혀 새로운 세계를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대신에 세상과 밀착된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아담의 후손인 모든 사람들의 마음 또한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로미오는 줄리엣과 밀착하고, 부모는 자녀와 밀착하고,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과 밀착하고, 목사님은 목회와 밀착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삶의 방식 또한 전혀 달라집니다. 타락하기 전의 아담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스스로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세상 것들을 담고 밀착하게 되자 스스로 판단하는 주체가 되었습니다.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 열심히 장사를 하거나 사업을 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악령세례를 받은 증거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상태와 비교해보자면 돈에 대한 태도에서부터 차이가 납니다. 성령세례를 받았다면 마음에서 하나님과 밀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마음이 돈이나 사업과 밀착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많이 벌기 위해 애를 쓰게 됩니다. 장사나 사업은 하나님의 주권에 맡길 뿐입니다.
악령세례를 받은 사람에게서는 두드러진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바로 종교입니다.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는 삶에서 나를 무조건 도와줄 대상으로써 신을 찾게 되고 섬기게 됩니다. 모든 종교의 신은 악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피조물입니다. 기독교 또한 악령세례를 받은 상태에서는 종교로 전락하게 됩니다. 마음이 세상과 밀착되어 있는 상태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해결의 방향을 정한 후에 절대자이시고 초월자이신 하나님의 능력만을 빌리려고 합니다. 악령세례를 받은 상태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만 부르고 있을 뿐입니다.
개인적인 소견입니다만 저는 기독교가 이러한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에 코로나19 사태가 일어나게 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배당에 모이는 사람들이 악령세례 받은 상태를 유지한 채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과 밀착되어서 세상의 가치들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나의 판단으로 살아갑니다. 이러한 악령세례의 삶으로부터 돌이키기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바람이 코로나19 사태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상태를 빨리 깨닫고 성령세례를 받은 자의 세계로 마음을 옮길 수 있다면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이 이 땅에 임하여 코로나19 사태도 종식될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성령세례에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죽음과 다시 태어남과 새로운 시작입니다. 간혹 성령세례를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능력을 받는 것으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또는 기도 중에 몸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며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세례는 이렇게 기능적이거나 현상적이지 않습니다. 성령세례는 전적으로 인격적인 변화입니다.
성령세례의 첫 번째 단계는 땅에 대해 밀착된 마음의 죽음입니다. 나 스스로 판단의 주관자가 되어 세상의 가치들을 추구하는 상태에 대해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로 다시 태어남의 단계가 이루어집니다. 아담의 타락과는 반대의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좋게 여겨지는 수많은 가치들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을 젖혀두고 하나님과 우선 밀착을 이루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들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심지어 나의 몸이나 가족조차도 끼어들 수 없음이 성령세례 받음의 특징으로 나타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사람은 마음에 밀착한 대상을 추구합니다.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었다면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날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가득차서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되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나의 지정의와 언행은 하나님의 주권의 장갑이 됩니다.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주권의 실체가 바로 성령이십니다.
마음에 세상을 담은 상태가 죽고 하나님을 담은 상태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성령세례입니다. 성령께서는 내 마음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추구할 대상으로 삼게 하시고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리고 삶에서는 나의 지정의와 언행을 장갑 삼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펼쳐나가실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와 악령으로 충만할 때에는 확연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돈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돈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대로입니다. 노골적으로 좋아하든 은근히 좋아하든 세상에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렇게 대부분의 사람이 돈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평소에 좋아하는 음식이 있더라도 한 번 체하면 한 동안은 거들떠보기도 싫어지기 마련입니다. 너무나 사랑해서 결혼을 했지만 살다보니 누구보다 미워져서 이혼하는 일도 있습니다. 좋아함이란 이렇게 상대적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왜 돈에 대해서만은 그렇게 무조건적인 좋음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본래 돈에 사람을 끌어들이는 성질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악령으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담배를 끊고 싶어도 끊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담배가 역겨워 질 때에만 담배는 끊을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돈이라는 대상이 마음에 담기에는 담배처럼 역겹게 느껴집니다.
부모에게는 자녀가 그러한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본래 자녀에게는 마음에 담고 추구할만한 성질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많은 부모들이 자녀에게 과도하게 몰입하게 되는 이유는 악령으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7~9절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전에는 유익하게 여겨지던 세상의 가치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지자 마음에서 좋아하기에는 배설물처럼 무가치하게 느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배설물처럼 여겼던 세상의 가치들을 좋고 예쁘고 맛있다고 여깁니다. 악령으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의 특징은 이와 반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며 냄새도 나지 않는 하나님이 세상의 어떤 가치보다도 좋아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서 여전히 세상가치들에 대한 추구함이 남아있다면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악령의 역사를 받고 있는 증거가 세상의 가치에 대한 추구함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면 오직 하나님이 너무나도 맛있고 좋게 느껴집니다. 눈앞에 보이는 배우자보다 자녀보다 하나님이 더 우선적인 관심의 대상이 됩니다. 이것이 성령세례 받은 자의 특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악령세례 받은 자의 삶으로부터 성령세례 받은 자의 삶으로 갈아탈 수 있을까요? 15절을 보면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회개는 악령세례 받은 상태에 대한 자가진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세상을 이렇게까지 좋아했구나, 마음에 자녀를 담았구나, 돈을 좋아했구나, 건강을 좋아했구나, 명품을 좋아했구나. 이것은 악령세례로 충만해진 상태이다. 이러한 나는 죽어야만 한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의미입니다.
악령세례로 충만한 증상이 나타날 때에 자가진단을 하고 그러한 상태가 죽어야 함을 느끼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렇게 느꼈다면 복음을 믿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악령으로 충만해진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임을 고백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물고기가 낚시 바늘을 물고 낚이는 성령세례의 과정입니다. 이렇게 다시 태어난 마음이 되면 성령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좋아하게 해주십니다. 또한 나의 지정의와 언행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장갑으로 삼으실 것입니다.
회개는 자가진단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믿는 것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세례가 주어지게 됩니다. 루터는 세례를 매일 반복한다는 의미에서 데일리 뱁티즘(Daily baptism)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고 또한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는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에 세상을 담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을 마음에 담을 때 삶의 문제들에 대한 걱정과 염려가 생겨납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악령세례의 증상이 나타나려고 할 때에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이 강조한 회개이고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죽음으로써 성령세례를 반복해 나간다면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살아갈 때에 악령세례 받은 세계 속에서 아직도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성령세계의 세계 속으로 낚아 올릴 수도 있게 됩니다. 마음이 세상과 밀착되어 있음을 점검해주고 하나님과 밀착되어야만 함을 깨우쳐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를 극복하는 방법은 오직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세상과 밀착된 상태를 죽은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임하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나의 마음을 하나님과 밀착되게 하실 것이고, 성령께서 나의 지정의와 언행을 주관하시는 실체가 되셔서 나의 삶을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수행해 나가는 것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낚인 자가 되고 또한 악령세례 자를 성령세례자로 낚아 올리는 어부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는 회개와 복음의 믿음의 과정입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악령세례 받은 자의 증상을 벗어나서 성령세례 받은 자로 살아가게 하는 비결임을 오늘 본문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내가 낚인 자가 되게 하시고 또한 낚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