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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카드 돌려막기 삶의 진면목>의 줄거리:
영적으로 즉 살아계신 영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신용카드 돌려막기식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이 카드 돌려막기가 반복되면 결국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연체이자로 인해서 파산에 이르고 맙니다. 그런데 영적인 신용카드 돌려막기는 내가 망하는 것 외에 정말 고질적으로 특이한 행동을 반복하게 됩니다. 세례요한 목 베기입니다.
카드 돌려막기 삶의 진면목
(마가복음 6:14~29)
17.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18.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19.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20.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
21. 마침 기회가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22.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그와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소녀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23. 또 맹세하기를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24. 그가 나가서 그 어머니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머니가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25. 그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니
26.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27.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28.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다가 소녀에게 주니 소녀가 이것을 그 어머니에게 주니라
29.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카드 돌려막기 삶의 진면목>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카드 돌려막기 삶의 진면목’
본문은 마치 단편소설을 읽는 기분이 듭니다. 헤로디아와 살로메 모녀가 등장하는데 참 상식 밖의 인물들입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이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강탈하여 아내 삼은 것을 문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헤롯의 수양딸 살로메도 이후 헤롯의 두 번째 동생인 빌립 2세 즉 자신의 삼촌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참 골치 아픈 가족 구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본문에 담겨있는 신앙적 교훈을 신용카드 돌려막기와 연관 지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용카드 돌려막기에 대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삼성카드로 500만 원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재일이 다가왔는데도 지급할 현금이 없는 상태입니다. 연체이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기에 롯데카드에서 현금서비스를 560만 원 받아서 삼성카드 대금을 갚았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에 이번에는 롯데카드의 결재일이 다가왔고 현금서비스 받은 것에 더해서 다른 지출도 했기에 700만 원을 갚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현금이 없었고 이번에는 신한카드에서 또 현금서비스를 받아서 메꾸었습니다. 또 다음 달이 되어 신한카드 결재일이 다가왔고 갚지 못하자 이자가 붙어서 800만 원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다시 삼성카드에 가서 800만 원을 현금서비스 받습니다. 신용카드 돌려막기로 망해가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와 비교될 수 있는 영적 상태가 존재합니다.
지금까지 마가복음에 등장한 주제어들을 살펴보자면 접촉과 밀착이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떤 대상과 접촉하고 밀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열두 해 동안 혈루병을 앓았던 여인은 세상과의 접촉과 밀착이 불가능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관계 제로의 상태에서 예수님을 접촉하고 만날 때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체되심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삼위일체 안에서 운용되고 있던 기운이 예수님을 통해 빠져나가 여자에게 임했고 병이 낫게 되었습니다. 참 인상적인 내용의 본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대해 빚쟁이와 같은 상태로 살아갑니다. 비어있는 마음을 강박적으로 채우고자 하는 모습이 마치 빚을 진 사람이 의무적으로 이를 갚아나가는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사람들이 돈을 벌려고 하는 이유, 결혼하고자 하는 이유,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승진하고자 하는 이유는 결국 행복하고자 함입니다. 다만 행복은 마음의 공백이 채워질 때에 느껴지는 기쁨과 만족의 상태입니다. 결국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강박적 의무감이 삶을 움직여가는 셈입니다.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것도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것도 실은 모두 마음의 채움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마음을 전제로 해서 마가는 하나님과의 접촉과 밀착을 이루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마음 채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완결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아내를 마주대할 때에 아내는 마음을 채울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내는 하나님으로 마음이 채워진 상태에서 마주해야할 대상입니다. 마음 채움은 다른 말로 하자면 만족함입니다. 이 만족이 지속될 때에 기쁨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접촉하고 밀착할 수 있다면 아내를 마주 대할 때에도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만족과 기쁨을 전해줄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지 못해서 아내를 통해 마음을 채우고자 한다면 부담감과 의무감과 빚진 마음으로 압박을 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아내를 만나면 또 다른 대상을 찾게 되고 카드 돌려막기와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마음의 만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계산이 끝나야만 합니다. 삼성카드에서 500만 원을 썼으면 재정능력 안에서 계산이 끝나야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계산이 끝나지 않으면 다른 카드에 빚을 지는 돌려막기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마음 채움이 끝난 상태에서 아내를 마주하면 기쁨과 만족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지 못하면 아내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게 됩니다. 그러나 본래 아내라는 존재는 나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따라서 불만이 이자처럼 늘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번에는 자녀를 통해 마음을 채워보고자 하지만 마찬가지로 자녀 또한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갑니다. 또 회사에 나가서 승진으로 마음을 채워보려고 하지만 설령 원하는 대로 승진을 하더라도 승진은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불만은 해소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마음 채움이라는 계산이 끝나지 않으면 다른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 채워지고자 하는 카드 돌려막기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결과는 세례 요한의 목을 벤 헤롯과 같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세례 요한의 목을 벤 것은 헤롯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도 75억 모든 사람의 마음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카드 돌려막기 삶을 살아간다면 이러한 일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이라도 이루어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바로 우리의 삶에서 세례 요한의 목 베기가 중단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헤롯은 자신의 동생 빌립1세의 아내를 빼앗습니다. 이 헤롯은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에 살해하려고 했던 헤롯 대왕과는 별개의 인물입니다. 이 헤롯 대왕에게 여러 부인이 있었고 아들이 많았는데 이 아들들을 분봉왕으로 세워 이스라엘 각지를 분할하여 다스리게 합니다. 분봉왕이란 한 나라를 넷으로 나누어 그 한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입니다. 그 중에 오늘 본문에 등장한 것이 분봉왕 헤롯입니다. 이 헤롯에게는 이복동생들이 있었는데 헤로디아는 동생 빌립1세의 아내였습니다. 그런데 헤롯은 자신에게는 제수씨가 되는 헤로디아를 빼앗아 아내로 삼습니다. 심지어 헤로디아 자신도 빌립을 버리고 헤롯의 아내가 되는 것을 기뻐하였던 것 같습니다.
분봉왕 헤롯이 다스리던 때에는 지도자들로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있었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율법사와 서기관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 외에는 이들 누구도 분봉왕 헤롯이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강제로 취하고 또한 헤로디아는 그 일을 좋게 여긴 것에 대해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을 극히 미워하여 죽이고 싶어 했습니다. 다만 그럴 수 없었던 것은 헤롯이 세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여겨서 공개적 비판과 지적들을 다 들어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헤롯이 반성을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죽이지도 않았던 상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던 중 헤롯이 생일을 맞이하여 대신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벌이게 되었습니다. 보통은 전문적인 무희들을 불러다 춤을 추게 합니다. 이 무희들은 노출이 심한 복장을 하고 관능적인 춤을 추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로디아의 친딸이자 헤롯에게는 수양딸이 되는 살로메가 나와서 춤을 춥니다. 여기서 소녀라 언급된 헬라어는 결혼을 해도 되는 성숙한 처녀를 일컫기에 살로메의 나이가 14~20살일 것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 소녀가 관능적 춤을 추자 헤롯이 기뻐하는 모습이 22~23절에 나타납니다.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살로메는 어머니인 헤로디아에게 세례 요한의 머리를 선물로 받으라는 사주를 받게 되었고, 사람들 앞에서 맹세한 체면을 지켜야만 했던 헤롯은 마음의 거리낌을 느끼면서도 세례 요한을 처형시킵니다.
헤롯을 중심에 놓고 이 사건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헤롯은 세례 요한과 헤로디아 사이에서 번민하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의로움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말과 행동을 할 때에 넘지 말아야 하는 선으로써의 의로움의 경계를 지키는 파수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헤로디아와 살로메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마음을 잡아끄는 대상들을 상징합니다.
의로움의 경계라는 말이 성경에 문자적으로 기록된 율법이나 상산수훈의 가르침 등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만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이는 마음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헤롯이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보았을 때에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의지함을 통해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다만 이 지정의와 언행의 기준은 헤롯이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우리의 삶에도 적용됩니다. 가정에서 배우자나 자녀 혹은 부모를 대할 때나 직장에서 동료들을 대할 때를 비롯한 모든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따라야 될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나의 지정의와 언행이 넘어가서는 안 되는 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선을 따라 우리가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의지하며 그로부터 비롯된 말과 행동을 할 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물건이나 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정하신 선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선을 지키는 모습은 마치 글자연습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점선을 따라서 선을 그으면 글자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지정의와 언행이 따라야 될 기준을 점선으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이 점선을 따르는 방법이 바로 하나님과의 밀착입니다. 하나님과 밀착할 때에 마음 채움에 대한 계산은 끝나게 됩니다. 그럴 때에 점선을 따라 글씨를 쓰듯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생각하고 느끼고 의지하며 말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접촉과 밀착이 이루어져서 만족과 기쁨의 계산이 끝나야 합니다.
반대로 하나님과 마음이 접촉과 밀착을 이루지 못하여 마음 채움을 세상으로 채우려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스스로의 지정의와 언행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헤로디아에게 마음을 접촉시킨 헤롯이 이윽고 마음을 채우고자 시도하게 됩니다. 그것이 동생 빌립1세의 아내를 빼앗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비판한 세례 요한의 존재는 하나님의 점선이자 따라야만 하는 의로움의 경계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헤롯을 비판했다는 것은 이 점선을 어겼음을 드러낸 사건입니다.
살로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본래 조카였으나 수양딸인 살로메가 관능적 춤을 추는 것을 본 헤롯은 이번에는 살로메에게 마음을 접촉시킵니다. 세례 요한의 비판을 받아들여서 뒤늦게나마 회개하고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었더라면 조카의 관능적 춤을 즐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헤롯은 이번에도 선을 넘어 조카이자 수양딸인 살로메에게 관능미를 느끼고 빠져듭니다. 23절의 ‘또 맹세하기를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이라는 구절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나라의 절반이 주는 마음의 채워짐보다 살로메의 춤에서 얻는 마음의 채움이 더 크다고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살로메는 어머니의 사주를 받아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하게 되었고 체면을 중시한 헤롯은 그 소원을 들어주게 됩니다. 세례 요한의 목을 벤다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의로움의 경계를 따라 살기를 포기했음을 상징합니다.
말씀드렸듯이 헤롯의 마음에서 일어난 일은 우리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지정의와 언행이 움직여야 될 점선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점선을 따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계산을 하나님으로 끝내는 것입니다. 더 이상 어떤 기쁨도 만족도 더할 필요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배우자를 대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려두신 점선을 따라 나의 지정의와 언행이 실선을 그으며 글자를 써내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마음의 기쁨과 만족의 계산이 끝나지 않는다면 헤롯처럼 스스로의 지정의와 언행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설령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울 수 없다면 하나님의 점선을 따라 살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배우자를 마주할 때에 나타나는 지정의와 언행은 하나님의 점선에서 어긋나 있습니다. 나의 지정의와 언행으로 하나님의 뜻을 끊고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을 목 베어 죽인 것과 같은 일입니다. 마가는 본문의 사건을 통해 이러한 주제를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만이 아닙니다. 어떤 물건이나 지위나 성과와 같은 일들도 헤로디아나 살로메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보고 싶고 갖고 싶고 하고 싶은 일들이 모두 마음을 잡아끄는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끌리는 대로 행동할 때에 세례 요한의 목을 베는 것과 같은 일이 마음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그어두신 의로움의 점선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있다고 해서 멋대로 살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마음의 기쁨과 만족에 대한 계산을 끝내버릴 수 없다면 단순히 내 생각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의 의로운 기준을 끊어내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헤롯이 세례 요한의 목을 치는 것으로 상징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몇 번이나 세례 요한의 목을 치는 삶을 살아왔을까요?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지 못한 만큼 우리의 마음은 살인자가 되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과의 밀착을 이룰 수 있을까요? 사람이든 사건이든 사물이든 내 마음을 잡아끄는 대상에 대해 끌려가서는 안 됩니다. 의로움의 점선을 끊어버리면 복지도 주어질 수 없습니다. 복지에서의 삶은 선민이자 의인에게만 허락된 은혜입니다.
헤롯은 분봉왕으로써 얼마든지 아름다운 여성들을 둘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고 그 딸인 살로메에게도 같은 식으로 대한 것은 마음이 끌려가는 대로 방치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에서도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혈루병 여인의 상태로 돌아가고 거지 나사로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 마음이 세상과 접촉하고 밀착을 이룰 수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에 끌리는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여길 때에 세상과의 접촉은 중지됩니다. 세상에 끌려가는 중에 생각하고 느끼고 의지하며 그로부터 말하고 행동하는 삶은 하면 할수록 연체이자가 늘어나는 카드 돌려막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음에 부담을 주고 걱정과 염려와 불만이 생기게 되고 삶을 괴롭고 지치게 만듭니다.
누구를 만나든 무엇을 하든 마음에서는 하나님과의 밀착을 통해 카드 돌려막기가 중단되어야만 합니다.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봄을 통해 하나님 이외의 모든 대상에 대해 죽어야만 합니다. 혈루병 여인이나 거지 나사로처럼 세상과 접촉하지 않는 마음이 되어서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접촉하고 밀착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을 통해 마음의 기쁨과 만족에 대한 계산은 끝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다면…”이라는 기준을 적용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다면 저 사람이 마음을 잡아끌지는 못할 것이다, 저 물건이 매력적으로 느껴질 리가 없다.”고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을 발동시켜서 마음이 세상에 끌려감을 끊어낼 때에 하나님과의 밀착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마음이 세상에 끌려감을 끊어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입니다.
세상에 끌려가지 않고 하나님과의 접촉과 밀착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할 때에 삶은 하나님께서 공짜로 살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반대로 헤로디아를 찾고 살로메를 찾으며 마음에서 세상을 끊어내지 못한다면 마음의 계산은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만나는 관계마다 하는 일마다 짜증과 불만이 이자처럼 쌓여갈 수밖에 없습니다. 헤롯의 콩가루 집안 같은 혼돈과 공허의 무질서를 결실로 얻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세상 것을 좋게 여기는 마음을 반드시 중단시키고 죽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의 접촉과 밀착을 유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구를 만나든 무엇을 하든 어떤 사물을 대하든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마음의 기쁨과 만족에 대한 계산은 끝내야만 합니다. 카드 돌려막기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불만과 불평은 이자처럼 불어나 삶을 짓누를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우리의 삶에서 헤로디아나 살로메들이 등장할 때마다 끌려가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쁨과 만족에 대한 계산은 완전히 끝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