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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2

녹취문: 나도 물위를 걸을 수 있다_태승철 (마가복음 6:45~56)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5.01|조회수70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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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나도 물위를 걸을 수 있다>의 줄거리: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으시고 제자들은 또 다시 기절할 정도로 놀라게 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을 받은 제자들은 이렇게 연속적으로 놀라다간 심장마비라도 오지 않나 염려가 될 정도입니다. 그런데 바다 위를 걸으심 자체가 말씀입니다. 들려주시는 대신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삶에 적용함이 우리의 몫이고요.


나도 물위를 걸을 수 있다

(마가복음 6:45~56)

 

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48.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49.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50.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51.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52.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나도 물위를 걸을 수 있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나도 물위를 걸을 수 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은 그 자체로 하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입으로 나온 말씀들이 들려주기 위한 것이었다면 행동으로 나타내신 이 사건은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도 삶에 적용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은 역사상 유래 없는 엄청난 기적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우리의 삶에 적용할 때에 더 큰 은총적 이득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이 말씀에 담겨있는 약속된 은총들을 살펴보고 삶에 적용하여 실제 여러분의 것으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물의 관계를 신앙적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예를 하나 들어 봅니다. 물가에서 시신이 발견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강변이든지 해변이든지 시신이 발견되면 형사들이 와서 사인규명을 위해 부검을 합니다. 부검을 통해 밝혀야 될 첫 번째 문제는 죽은 사람을 물에 던졌느냐, 산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느냐 입니다. 이것은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도 상식적인 선에서 판가름할 수 있습니다. 증거는 폐에 있습니다. 살아서 물에 빠져 익사한 사람은 폐에 물이 차게 됩니다. 호흡을 시도하는 중에 폐에 물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이미 죽은 사람이 물에 던져진 경우에는 폐 속에 물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시는 말씀의 내용에 근거하여 생각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세상이라는 물에 빠져서 익사 직전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체성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주체성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것들을 생각과 감정과 의지 안에 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의 폐에 물이 차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물속에서 숨을 쉬려고 애쓰니 힘들고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숨이 막히는 상태를 당연하게 여기며 평생을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물 위를 걷는 모습과는 반대되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사건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먼저 배를 태워서 벳새다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모였던 무리들을 배웅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십니다. 48절을 보면 예수님이 기도를 하시던 중에 갈릴리 바다의 거센 바람에 맞서며 노를 젓느라 고생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신 것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았다는 것은 꼭 눈으로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처한 상황을 아셨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이 때의 시간이 사경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 시간으로 환산하자면 새벽 3시부터 6시 정도를 말합니다. 떡을 떼신 후에 제자들을 먼저 보내셨으니 적어도 6시간 정도를 바다에서 사투하고 있었고, 예수님은 그 시간 동안 산에서 기도를 하시고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을 찾아오시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물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가 놀랍니다.

그런데 48절을 보면 다소 특이한 언급이 등장합니다.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라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괴로움을 당하던 제자들을 구하러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벳새다를 육로로 가기에는 멀어서 바다를 건너가시는 중에 제자들과 마주치신 것도 아닙니다. 곧바로 배로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바다 위를 걸으시며 지나시는 것을 보여주셨다는 것은 바로 행위를 통해 드러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의도적으로 물 위를 걷는 모습을 보여주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곧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 던져주신 메시지를 다시 한 번 재확인시켜 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은 바다와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결코 세상이라는 바다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가정도 직장도 일을 할 때에도 공부를 할 때에도 갈릴리 바다 위에 있는 셈입니다. 다만 바다에 있되 바다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다에 빠지면 숨을 쉴 수가 없듯이 마찬가지로 세상에 빠지면 절박하게 헐떡거리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걷는 삶을 살아갈 수만 있다면 호흡은 자유로워집니다. 베드로가 사도행전 319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했던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새롭게 되는으로 번역된 원문은 유쾌하고 상쾌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바다에 빠진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2절에서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무리한 요구처럼 들립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땅에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분명히 가능한 일이기에 사도 바울은 이러한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세상에 빠져서 괴로움 가운데 살아가는 모습은 물에 빠져 익사 직전에 놓인 상태와도 같습니다. 폐에 물이 차듯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것들을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안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익사 직전과 같은 상태에 놓여있기에 삶에는 유쾌함과 상쾌함이 없고 답답하고 괴롭고 무겁기만 합니다. 기분이 가라앉는다는 표현이 있듯이 실제로 마음은 세상이라는 바다 속에 가라앉고 있습니다. 마음이 축 쳐지는 이유는 물을 들이키듯이 세상 것을 들이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을 오늘 주제와 연관시켜 재해석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코로 입으로 물을 들이켜서 폐 안에 물이 차서 익사 직전의 상태가 되듯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세상을 생각과 감정과 의지 안으로 들이키지 말라. 그러면 걱정 근심 불안에 헐떡거릴 수밖에 없다. 대신에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처럼 위에 계신 하늘을 믿음으로 보고 듣고 만지며 생각 안으로 들이켜서 호흡하라. 그리하여 이 세상 바다 수면을 발로 딛고 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구체적인 예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셨음을 믿습니다. 또한 이 세상의 나라와 역사를 주관하심은 물론이고 개개인의 삶의 모든 순간과 참새 한 마리의 떨어짐과 백합화 한 송이가 피고 지는 것까지도 주관하심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라는 말은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어느 정도로 믿어야 할까요?

현재 코로나19로 인해서 많은 분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를 계기로 믿음을 점검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세상을 주관하심을 믿는다면 이 위기 또한 하나님의 주권아래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로 인한 경제문제를 생각과 감정과 의지 안에 담고 두려움과 걱정과 염려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주권과는 별도로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는 이유는 세상에 빠져서 세상을 들이키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이라는 명분이 믿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에 문제가 생길 때에만 하나님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는 이미 물에 빠진 사람이 물을 들이키는 것처럼 세상을 들이키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의지하는 동안 숨은 가빠집니다. 불안과 두려움과 걱정이 생기고 삶이 즐겁지 않습니다.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는 자괴감이 들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삶이 괴로운 이유는 물에 빠진 사람이 물을 삼키듯이 세상에 빠져 세상을 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세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삶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내가 부모로써 자녀를 걱정하지 않으면 누가 걱정해줄 것이냐?”라고 반문하실 수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반증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문제를 아시고 나를 사랑하시며 나의 자녀 또한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삶을 책임지지 않으면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확고한 불신앙이 하나님을 투명인간처럼 취급하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가 주권자가 되면 물에 빠진 사람처럼 세상을 들이키게 되고 헐떡거리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돈 문제 해결해주세요! 건강 문제 해결해주세요! 가정 문제 해결해주세요!”라고 고함치며 기도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부정하고 내팽개친 상태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코 이러한 상태를 지속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에게 바다 위를 걷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물 위를 걷는다는 것은 물에 빠진 것과는 정반대의 상태입니다. 익사 직전이 되어서 숨을 헐떡거리는 삶을 중단하고 세상 바다의 수면을 발바닥으로 밟으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앞서 익사자를 구분하는 사인규명의 방법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죽은 채로 던져진 사람은 물을 삼킬 수 없어 폐에 물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세상이라는 바다 위를 걷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 이와 닮았습니다. 먼저 세상을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 안으로 들이키는 것이 중단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생각과 감정과 의지 안으로는 하늘 기운을 들이킬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늘 기운은 가볍습니다. 튜브 속에 바람을 넣으면 물에 뜨는 것처럼 하늘 기운을 들이킨 사람은 세상이라는 바다 위에 뜨게 됩니다.

먼저 세상을 들이키지 않기 위해서는 죽은 시체와 같이 되어야만 합니다. 시체는 물에 던져놔도 물을 들이키지 않습니다. 어떤 삶의 현장에서든 세상을 들이키지 않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해 죽어야만 합니다. 그 죽음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가질 때에 세상을 들이킴은 끝나게 됩니다. 이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갖기는 일회성 사건이 아닙니다. 삶의 현장에서 지속되고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죽은 시체가 물속에 들어갔을 때에 물을 삼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 것을 들이키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십자가 생활화가 주는 어마어마한 효과입니다.

예를 들어 코로나19로 인해 돈 문제가 생겼습니다. 돈 문제라는 풍랑 속에서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돈 문제에 대해 죽습니다. 그러면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속에는 더 이상 돈 문제는 들어오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돈 문제를 들이키면 원망과 불평이라는 헐떡거림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도 함께 죽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다만 이 사실을 받아 들이냐 마느냐는 나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한다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이 예수님의 동선이 하나님을 향하는 터널이 되고 하늘 기운을 빨아들일 수 있는 빨대가 되고 대롱이 되어주십니다. 세상을 향해 죽은 자의 의식을 유지할 때에 예수님을 통해 하늘 기운을 호흡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나러 가시기 전에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마음을 하늘의 기운으로 가득 채우셨던 것입니다. 바다 위를 걸으실 때에 예수님은 하늘 기운으로 채워진 튜브와 같은 상태이셨습니다. 바람이 빵빵한 튜브가 바다에 빠지지 않는 것처럼 하늘 기운으로 가득하신 예수님은 세상이라는 바다에 빠지실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여 예수님 안에 머물게 되면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호흡하시는 하늘 기운이 나에게도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에 나도 하늘 기운으로 채워진 튜브가 됩니다. 큰 튜브든 작은 튜브든 바람이 빠지지 않으면 결코 물에 가라앉지 않습니다. 어떤 풍랑 속에서도 바다 위에 떠다닐 뿐입니다.

 

코로나19로 온 세상이 난리입니다. 풍랑 가운데 빠져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의식을 가질 때에 세상은 두렵지 않습니다. 죽은 자의 의식을 지속해나갈 때에 생각과 감정과 의지 속에 절대로 세상은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대신에 하늘 기운으로 채워진 튜브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들어오면 마음의 호흡이 온전히 상쾌하고 유쾌하고 막힘이 없습니다. 튜브의 모양이 다르듯이 하나님의 뜻은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통해 때를 따라 가지가지 형태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사시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주제는 바로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세상을 들이키는 익사자의 삶은 중단됩니다. 하늘 기운으로 가득 찬 튜브가 되어서 이 세상이라는 수면을 밟으며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채우고 하나님의 뜻의 열매들을 맺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삶의 모든 문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주권자가 되셔서 책임져 가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믿지 못하면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을 내 생각으로 들이킬 필요가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투명인간 취급할 때에 이 세상을 들이키며 헐떡거리며 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바다 위를 걸으심을 통해 우리도 세상이라는 바다 위를 걸어야 함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로 세상 들이키기를 중단하고 하늘 기운으로 채워진 튜브로 살아가게 하셔서 세상이라는 바다를 발바닥으로 딛고 살아가는 예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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