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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목표가 인생의 반이다>의 줄거리:
시작이 반이라고들 합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목표는 인생의 반입니다. 목표만 바로 세워도 성공적인 인생의 절반을 성취한 셈입니다. 그런데 이 목표를 세우는 일 자체가 그리 쉽지를 않습니다. 이 어려움의 핵심은 바로 인생목표에 얽힌 내막에 대한 우리들의 무지입니다. 이 내막을 알고 지금 목표를 다시 세워도 결코 늦은 인생이란 없습니다.
목표가 인생의 반이다
(마가복음 7:1~13)
1.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2.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3.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4.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6.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목표가 인생의 반이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목표가 인생의 반이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어렵게 보이는 일이라도 일단 시작하고 하면 생각했던 것만큼 어렵지 않고 순조롭게 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격언에서 힌트를 얻어 신앙적 의미를 부여해보자면 “목표가 인생의 반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어렵고 고통과 불안과 슬픔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인생의 목표가 잘못되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목표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불필요한 실패와 걱정과 염려와 슬픔을 겪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실제로 목표를 바로 정하기만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여러분의 마음에서 수많은 문제나 단점이나 장애는 사라질 수 있습니다. 목표가 잘못되었음으로 인해 생겨나는 인생의 폐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인생의 목표는 각 사람마다 인격적 속성, 특성, 자질, 장단점 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간단히 말해 내 인생의 목표는 내 스스로 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생이 어려워지는 이유는 인생의 목표를 스스로 정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목표가 이루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면 목표의식도 없이 단지 그날 그날 먹고사는 것을 문제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75억 명이 살아가는 이 지구에서 인생의 목표는 창조주 하나님이 정해주신 단 하나가 존재할 뿐입니다. 이 한 가지 목표를 분명히 붙잡을 때에 75억 명에게서 나타나야할 다양성은 하나님에 의해 표출됩니다. 다른 사람과 달라지기 위해 차별화를 시도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에 의해서 차별화 되게 됩니다. 외모가 남과 같지 않듯이 나의 인생 또한 하나님에 의해 나만의 것으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말씀드렸듯이 인간의 목표는 단 하나입니다. 이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갈 때에 75억 명이 고유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이 하나의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8절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읽지 않은 9절에서도 이와 동일한 의미에서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라고 하셨고, 13절에서도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토록 강조하시는 문제는 바로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계명으로 바꾼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가르치며 지키기에 온 힘을 다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들에게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일까요? 이것이 바로 인생의 목표와 연결이 됩니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허락하신 인생의 목표는 단 한 가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목표를 붙잡지 못하고 스스로 목표를 정하게 될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백발백중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말씀이 됩니다. 듣는 자들은 사람의 말씀으로 바뀌게 된 말씀만을 가치 있게 듣고, 전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말씀을 사람의 말씀으로 바꾸어 전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단 하나의 인생의 목표를 붙잡지 못할 때에 나타나는 일들입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삶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본래 교회는 단 하나의 예수님의 교회뿐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교인이란 각자의 삶에서 철저하게 창조주 하나님이 허락하신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목표를 놓치게 된다면 교회의 의미는 예배당 건물로 전락하게 됩니다. 어느 예배당에서 교인수를 배로 만들자는 목표로 세웠다고 생각해보겠습니다. 그 목표를 향해 가는 동안에 전파되는 성경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과는 무관해집니다. 사람이 만든 목표를 이루기 위한 사람의 말씀으로 바뀌어 전해지게 됩니다. 또 당회에서 금년 예산을 20% 늘리기 위한 목표를 세웠다고 해보겠습니다. 이제 그 예배당에서 전파되는 모든 말씀은 항상 예산이라는 목표를 향하게 됩니다. 목사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제거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이와 동일한 지적을 하십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파견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조사하고 흠을 발견하고자 예수님의 사역현장으로 왔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의 제자들 중 몇이 떡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율법보다도 더 강조하였던 것이 정결의식이었습니다. 그 중에 식사를 할 때에는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관점에서도 손을 씻는 것은 위생적이지만 당시에는 종교적 의미까지 더하여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이러한 행동을 변명하시거나 변호하시지 않고 구전되어온 장로들의 전통 자체를 문제시하십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계명과 하나님의 법을 사람의 계명과 사람의 법으로 바꾸었고 그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과 법에 담긴 의미도 폐지시켰기 때문입니다.
장로들의 전통이란 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며 깨달은 바를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율법사들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들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말씀으로 둔갑하게 되었고 그 말씀의 의미 또한 폐지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하십니다. 6절을 보면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으로부터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해주신 목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선민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목표를 따르기 위함이었습니다. 선민뿐만이 아닙니다. 본래 타락하기 이전의 사람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목표를 따르며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목표에서 벗어나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씀으로 바꾸게 되었고 말씀에 담긴 의미 또한 폐지시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 목표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 즉 계명이 사람의 계명으로 변한 것을 문제시하고 계십니다. 계명이란 정해진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지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신 목표란 바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육체의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잡히는 어떤 대상보다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하나님을 먼저 좋아하고 마음을 밀착해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인생의 목표입니다.
인생은 기회입니다. 우리는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에 오감으로 느끼는 것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습니다.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고 냄새 맡고 맛봄으로써 대상들을 인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육체의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인생은 그러하신 하나님을 세상보다 먼저 좋아하고 마음을 밀착시켜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우리가 몸을 입고 태어나지 않는 영적인 존재였다면 하나님을 인식하고 좋아하는 일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몸을 입고 태어났기에 비로소 세상과 하나님 중에서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목표는 세상에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돈 많이 버는 사업가가 되거나 정치에 몸을 담고 대통령이 되거나 교수가 되고 대학총장까지 가보자는 거창한 꿈들은 물론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기초적인 소원까지도 우리의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본래 창조주가 허락하신 목표를 향해 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창조주 하나님이 허락하신 목표란 육체의 감각으로 느끼는 세상의 어떤 대상보다도 하나님을 먼저 더 좋아하여 마음을 밀착시키는 것입니다.
인생은 이 일을 해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 목표를 좇는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정하신 뜻을 땅에서 이루어 가실 것이고, 몸으로 만나는 관계들의 영역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주권을 행사하십니다. 이러한 삶은 나에게도 기회이며 하나님께도 기회가 됩니다. 내게는 몸으로 만나는 어떤 대상보다 하나님을 먼저 좋아하고 마음을 밀착시킬 기회이며 하나님은 하늘에서 이루신 뜻을 땅에서 이루시는 쌍방 간의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러한 기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라와 대통령을 위해 기도할 때에 대통령이 나라를 잘 다스려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은 신앙적이지 않습니다. 대통령 자리에서 나라보다 국민보다 개인의 영달보다 하나님을 더 먼저 좋아하고 마음을 하나님께 밀착시킬 수 있기를 기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대통령이 하나님을 목표로 할 때에 우리나라를 향하신 하늘에서 정하신 뜻이 이루어질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가정을 예로 들어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배우자를 주신 이유는 배우자를 마음에 담고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을 주신 것은 배우자보다도 하나님을 좋아하고 배우자에게 마음을 밀착시키는 대신 하나님께 마음을 밀착시킬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배우자와 함께 있는 동안의 인생의 목표입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를 잘 키워서 나라에 도움이 되는 역군으로 키워내는 것이 부모의 일이 아닙니다. 자녀보다도 하나님을 더 좋아하고 자녀에게 마음을 밀착시키는 대신 하나님께 마음을 밀착시키는 기회가 부모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자녀와 함께 있는 동안의 인생의 목표입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승진은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승진보다 하나님을 먼저 좋아하고 일보다 하나님께 마음을 밀착시키는 것이 목표가 됩니다. 장사하는 분들도 많은 이익을 남기는 것은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손님이 많이 오는 것보다 하나님을 먼저 좋아하고 하나님과 마음을 밀착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장사 현장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자리가 되고 나는 하나님의 장갑으로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서 이러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완벽했습니다. 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했고 백성들을 가르치며 귀감이 되는 모습을 보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마음은 행위와는 달랐습니다. 잘못된 인생의 목표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땅에 있는 것들로 인생의 목표를 삼게 되자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계명으로 전락시키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4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외식하는 자들 즉 위선자라 책망하셨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며 공경하지만 마음이 더 좋아하고 밀착하고자 하는 대상은 이 세상의 가치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마음으로 좋아하는 대상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이었으며, 목표로 했던 것은 하나님과의 밀착이 아닌 세상과의 밀착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지식은 방향을 잃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한 만큼 사람의 말씀으로 바꾸게 되었고, 말씀에 담긴 의미를 폐지시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는 무서운 일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거리가 벌어지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마음 사이에 다른 대상이 끼어들었기에 벌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먼저 좋아하고 목표로 삼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풍습에 아기가 태어나서 1년이 지나면 돌잔치를 하면서 돌잡이를 합니다. 아기 앞에 여러 가지 물건을 가져다 놓고 잡게 하여 미래를 점쳐봅니다. 그 물건들은 모두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가치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실이나 국수 같이 긴 것을 잡으면 무병장수하겠다고 여깁니다. 돈을 잡으면 부자가 되겠다고 여기는데 요새는 좀 더 구체적으로 달러도 놓고 엔화도 놓는다고 합니다. 어느 나라에서 돈을 벌 것인지 점쳐 보겠다는 것입니다. 책이나 연필을 잡으면 학계에서 성공하리라 여깁니다. 청진기를 잡으면 의사가 되겠다고 여깁니다.
이것이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염원이 담긴 전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어린아이조차도 무언가를 잡아서 가지려 한다는 특성으로부터 인간의 본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난 시점에서 아무리 어리더라도 어떤 목표를 가지게 됩니다. 그것이 비록 본능적이고 일시적이라고 할지라도 무엇인가를 목표로 합니다. 돌잡이 때에 부모가 가져다 놓은 물건들은 자신들이 평생 붙잡고 살아왔고 세상이 좋다고 여기는 목표들입니다. 만약 사람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돌잡이라는 전통은 생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돌잡이로부터 시작해서 평생 세상을 목표로 삼아 살아가는 것은 원죄의 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은 회복을 목표로 삼게 됩니다. 아픈 것이 낫기를 바라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일이지만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마음이 하나님보다 건강을 좋아하는 대상으로 삼고 밀착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과는 단절되게 됩니다. 이것이 본문이 문제시하는 내용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할지라도 마음이 하나님의 목표에서 벗어나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읽는 말씀마다 사람의 말씀으로 전락시켜 해석하게 되고 기도를 하더라도 하나님이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만약 제가 건강을 목표로 해서 하나님 믿으면 건강할 수 있다는 설교를 할 것입니다. 진심으로 여러분에게 사랑과 배려를 담아서 그러한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말씀은 하나님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의 말씀입니다. 건강을 목표로 하는 사람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은 건강을 좋아하는 마음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목표는 하나님으로 바뀌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건강 문제는 하나님의 손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또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처해있는 분은 돈을 목표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한 상태를 묵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말씀이 됩니다.
본문을 보면 장로들의 전통이 신앙적 양심을 억압하는 식으로 나타남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예가 오늘날 예배당에서 성수주일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중요한 것은 주일날 예배당에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믿음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에 참여할 수만 있다면 예배는 공원에서든 집에서든 산속에서든 직장에서든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에 참여할 수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예배당 조직의 회원이 되느냐 마느냐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성수주일이 불문율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일요일만 주일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일주일 내내 주님과 함께하는 주님의 날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것부터 장로들의 전통과 같은 것입니다.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교인들의 신앙적 양심을 제한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통탄하실만합니다.
이렇게 성수주일을 강요하게 된 이유는 예배당에 교인이 가득한 상황을 목표로 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을 목표로 하였고, 많은 예산을 목표로 하였고, 훌륭한 예배당 건물을 목표로 하였기에 성경의 모든 말씀이 사람의 말씀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무엇을 신앙생활로 여기며 살아왔는지를 생각해본다면 그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는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문제시되어야 할 것은 예배당을 비롯한 단체뿐만이 아닙니다. 나 자신의 목표부터 문제시 되어야만 합니다. 몸으로 만나는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더 먼저 좋아하고 하나님께 마음을 밀착시키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을 수 없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절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세상을 좋아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QT를 한다고 하지만 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씀으로 바꾸고 그 의미를 폐지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차라리 읽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폐지시키는 죄를 덜 지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을 목표로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을 중단하는 것이 죄를 덜 짓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목표를 분명히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세상의 어떤 대상보다 더 좋아하고 하나님께 마음을 밀착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돈이 없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돈이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더 먼저 좋아할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돈과 밀착된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이고 하나님과 밀착할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이런 식으로 매 순간을 하나님을 목표로 삼아 나갈 때에 어느덧 삶에는 문제될 것이 없어질 것입니다. 내가 문제 삼았던 일들이 하나님이 해나가실 일들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목표만 바뀌면 지금 느끼는 문제나 장애나 단점은 더 이상 유지되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실패하고 잘못된 인생을 살아왔다고 여길지라도 실은 제대로 된 인생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습니다. 진짜 목표를 향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성공도 아니지만 아직 실패도 아닙니다.
이제 목표를 바로 정해야만 합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져지는 세상의 가치들보다 하나님을 더 먼저 좋아하고 하나님께 마음을 밀착시키겠다는 목표를 세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아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세상을 좋아하고 세상과 밀착했던 마음을 죽은 자로 여긴다면 하나님과의 밀착은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이 목표가 이루어질 때에 삶은 성공한 것입니다. 설령 요절해도 실패가 아니고 돈이 없어도 실패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목표만 바로 세우면 인생의 절반은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제 인생의 가장 찬란한 순간을 염두에 두시고 계십니다. 그 찬란한 순간은 하나님을 목표로 삼을 때에만 주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도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을 좋아하고 세상과 밀착했던 마음을 죽은 자로 여기면서 기필코 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그럴 때에 삶이 얼마나 좋을 수 있고 얼마나 쉬울 수 있고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를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