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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2

녹취문: 접촉성 더러움을 벌벌 떨자_태승철 (마가복음 7:14~23)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5.06|조회수62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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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접촉성 더러움을 벌벌 떨자>의 줄거리:

속담에 "개똥이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라고 합니다. 악한 자를 정면으로 마주대하지 않고 피하는 것은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흔히들 더러움을 무서움의 대상은 아니라고 분리하여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러움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입니다. 사람 마음의 더러움이 모든 악독함의 어미입니다.


접촉성 더러움을 벌벌 떨자

(마가복음 7:14~23)

 

14.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17.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19.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20.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접촉성 더러움을 벌벌 떨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접촉성 더러움을 벌벌 떨자

우리가 벌벌 떨고 두려워해야 될 일이 하나 있다면 바로 접촉성 더러움입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악하거나 같잖은 사람을 피하는 것은 무서워서가 아니라 상대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다만 용례에 따라서는 비겁함의 변명이나 자기합리화가 될 수 있는 소지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정말로 두려워해서 상대할 수 없는데도 상대를 비하함으로써 자신을 변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속담에서 무서움의 대상과 더러움의 대상은 분리되어 있습니다. 더러운 것은 무서워할 대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적 의미에서 보자면 이 말은 틀렸습니다. 제목에서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두려워해야 될 일이 하나 있다면 바로 더러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더러움의 무서움을 모른 채로 살아가기에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오히려 무서워해야 할 더러움을 친숙하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더러움이야 말로 인간이 마주하는 모든 종류의 불행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밤늦게 퇴근을 하면서 연쇄살인범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이 상황이 무서운 이유는 연쇄살인범에게는 악독함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더러움이 문제가 됩니다. 연쇄살인범에게서 드러나는 악독함이란 마음의 더러움이 만들어낸 결과일 뿐입니다. 이는 연쇄살인범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의 모든 악독함은 예외 없이 더러움으로부터 발생하게 됩니다. 악하지만 더럽지 않을 수 없고 더러운데도 악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연쇄살인은 물론이고 가정파괴, 아동학대나 성범죄, 강간, 강도, 정치적 음모나 술수, 권력다툼에 이르기까지 모든 악의 원인은 더러움에 있습니다.

또한 한 사람의 더러움으로부터 나타나는 악의 크기는 무한대입니다. 히틀러는 악을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러나 더러움을 가진 모든 사람이 히틀러가 될 수 있습니다. 히틀러는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하였고 전 유럽의 사람들을 전쟁의 불행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히틀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더러움을 가진 사람에게 권력이 주어질 때에 얼마든지 동일한 악독함은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특별히 죄를 짓지 않고 교도소에 가지 않았다고 해서 더럽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히틀러에게 있었던 더러움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권력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히틀러와 동일한 더러움이 우리의 내면에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오히려 권력이나 사회적으로 힘이 주어지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이처럼 우리의 모든 문제가 더러움으로부터 나타나기에 문제의 근원적 해결 또한 더러움의 해소와 연결됩니다. 더러움이 사라지면 죄로부터 자유로워지기에 평안은 찾아올 수 있습니다. 돈 문제가 생겼더라도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는 마음의 더러움입니다. 마음을 불안하고 괴롭게 하는 것은 돈 문제가 아닌 더러움이기 때문입니다. 자녀에게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도 우선적으로 문제시 되어야 할 것은 자녀가 아닌 부모의 마음에 존재하는 더러움입니다. 우리는 더러움과 친숙해서는 안 됩니다. 더러움을 무섭게 여기고 벌벌 떨 때에 비로소 더러움의 문제를 해결할 길도 찾을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씻지 않는 손으로 떡을 떼는 제자들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지적하였던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주장하는 정결의식에 대해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계명으로 바꾼 결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평생 성경을 연구하고 해석하여 사람들에게 가르쳤으며 실천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사야서를 인용하셔서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들의 마음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과 밀착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마음이 하나님과 먼저 밀착할 수 없었던 이유는 세상의 가치들을 더 좋아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들이 전하는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씀으로 변질시키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주님이 지적하셨던 것은 정결의식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깨끗함을 목적으로 하는 정결의식 자체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깨끗함이란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관계하기 위한 마음가짐입니다. 깨끗함은 앞서 말씀드린 더러움과 대비되는 개념으로써 하나님과 관계가 요구되는 선민들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조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정도로 구분된 좋으심을 의미합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습니다만 마가복음 9장을 보면 변화산 사건을 통해 이 거룩함이 강조되어 나타납니다. 3절을 보면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는 굳이 빨래를 예로 드는데 이러한 표현은 마태복음에서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빨래는 깨끗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마가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하신 예수님의 거룩함을 깨끗함과 연관 짓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는 세상에서 빨래하는 어떤 사람도 만들 수 없는 깨끗함이야말로 예수님의 거룩함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거룩함에 매료된 베드로는 산 아래 인간세상의 일은 모두 잊고 그 자리에 초막을 짓고 살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나름대로의 희망과 소원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하신 예수님의 거룩함을 접하자 너무나 황홀하여서 세상의 모든 일들을 잊어버릴 정도가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더 좋은 것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좋음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깨끗함과 거룩함과 좋음은 삼위일체처럼 하나의 개념으로 정리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 좋음이 삶에서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지를 예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직장에서 사장님께 꾸지람을 듣고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 기분 나쁜 상태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생각하자면 그 원인은 사장님의 꾸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전혀 다릅니다. 내 마음 안에 있는 더러움이 드러나게 되었을 뿐입니다. 좋음은 곧 거룩함이고 거룩함은 또한 깨끗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내 마음에 좋음이 사라졌다면 그것은 곧 마음의 상태가 거룩하지 못하며 더러움이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다른 예로 장사가 안 되는 상황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장사가 안 되면 마음이 불안할 수 있습니다. 이 불안함 또한 마음이 나쁜 상태에 놓이게 되었기에 발생한 감정입니다. 이 불안함의 성분을 분석해보면 발생 원인은 장사가 안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마음에 잠재되었던 더러움이 불안이라는 형태로 표현된 것뿐입니다.

마음이 깨끗하면 사장님께 꾸중을 들어도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다. 장사가 아무리 안 되어도 불안하지 않습니다. 꾸중 듣고 장사가 안 되는 것을 좋아하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깨끗하면 꾸중을 듣고 장사가 안 된다고 해도 좋음이 깨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족에 대한 불만이 생기는 이유는 배우자나 자녀가 잘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불만이 생기는 이유를 분석해보면 마음의 더러움 때문입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면 배우자나 자녀가 잘못했다고 해서 불만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깨끗함은 좋음이고 좋음은 거룩함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좋음의 반대되는 모든 마음의 상태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지만 그 근원은 더러움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이 사실을 모르고 단지 겉으로 나타나는 안 좋음의 상태만을 문제시하였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일은 몸이 아픈 것이 아닙니다. 일이 안 풀리거나 가정에 불화가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에 더러움이 생긴 것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밖에서 그 이유를 찾는 한 해결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마음의 모든 불행은 더러움에서 비롯됩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면 돌에 맞아 죽어도 평안은 깨어지지 않습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면 어떤 상황이 주어져도 불만은 생기지 않습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면 어떤 환경에 놓여있어도 두렵거나 불안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마음에 더러움이 있다면 어떤 조건에서도 불행의 구덩이에 처박힐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깨끗함과 더러움의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15~16절에서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더러움과 깨끗함의 문제는 육체가 아닌 마음의 문제에 달려있습니다. 따라서 정결의식 또한 육체의 청결이라는 수준에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육체의 차원에서는 어떤 행실을 통해서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한 조건이 만들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율법을 잘 지키고 예배당 출석을 잘하고 목사든 장로든 권사든 거룩하시고 지극히 깨끗하시며 가장 좋게 구분되신 하나님과의 밀착의 조건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밀착하기 위해서 단 하나의 조건은 바로 마음의 깨끗함입니다. 부자든 학식이 많든 권력자이든 육체가 어떤 조건을 갖추었더라도 마음이 깨끗할 수 없다면 하나님과 밀착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마음의 더러움이 발생하는 원인은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이사야서의 말씀대로입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부를지라도 마음으로는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인생의 목표는 육체의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하나님을 첫 번째 대상으로 좋아하고 마음을 밀착시키는 것입니다. 신명기 65절의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라는 말씀과 일치합니다. 이것이 지켜지지 않을 때에 더러움은 발생하게 됩니다. 하나님 대신에 세상의 가치들을 좋아하여 마음을 밀착시키는 것이 더러움입니다.

 

세상과 마음을 밀착시키는 모습을 접촉성 더러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치가 하얀 블라우스에 묻는 예를 자주 말씀드렸습니다만 가장 적절하기에 다시 한 번 언급해보도록 합니다. 맛있게 잘 익은 김치는 깨끗한 음식입니다. 그리고 하얀 블라우스도 깨끗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깨끗한 두 가지가 접촉하면 서로 더러워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접촉성 더러움입니다. 김치가 깨끗하다고 해서 결코 껴안을 대상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더러움을 무서워해야만 하는 이유도 여기서 발생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애인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럽게 여겨집니다. 어느덧 마음에서는 애인을 하나님보다 더 먼저 좋아하고 밀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래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기쁨과 만족을 표현할 대상은 될 수 있어도 마음에 담도록 지음 받은 대상이 아닙니다. 국물이 뚝뚝 떨어지는 김치가 맛있어 보인다고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끌어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 마음에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여 의지하고 살아가는 모습은 겉으로 보기에는 훌륭한 부부의 본보기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신앙적 관점에서 보자면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김치를 끌어안는 것처럼 더러운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무서워해야만 하는 접촉성 더러움의 진실입니다.

자녀도 그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대학입학 사법고시를 내리 통과한 자녀는 부모의 마음에 큰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외모도 출중하고 예절도 바르기에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녀 또한 본래 마음에 담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어마어마한 접촉성 더러움을 발생키는 존재가 됩니다. 자녀는 더러운 존재가 아닙니다. 배우자나 애인도 더러운 존재가 아닙니다. 돈 또한 본래 더러운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과 접촉할 때에 더러움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본문 21~23절을 보면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악함을 인수분해를 하는 것 같습니다. 이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모든 악한 감정들이 마음의 더러움으로부터 비롯됩니다.

내 마음도 더럽지 않고 세상에 있는 것도 더럽지 않지만 마음에 담는 순간 더러움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배우자나 자녀를 끌어안을 때에, 돈이나 명품을 끌어안을 때에, 권력과 명예를 끌어안을 때에 더러움은 발생합니다. 그리고 더러움으로부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온갖 악한 생각들이 표현되게 됩니다. 이것들이 악한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이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고 백합화 한 송이가 피고 지는 것까지도 주관하시는 이 세상에서 나타나면 안 되는 것들을 발생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악은 심지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는 경우에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이 마음에 목회를 담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목회 또한 마음에 담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목회는 김치이고 마음은 하얀 와이셔츠이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온갖 생각은 다 악한 생각뿐입니다. 목사님의 마음에 목회의 성공을 담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말씀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사님과의 밀착을 통해서 그 마음에 넣어주시려는 목회에 대한 생각들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하나님이 아닌 목회와 밀착하게 되자 하나님의 생각들은 전해질 수 없고 닫혀버리게 됩니다.

목회뿐만이 아닙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해야 할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계획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깨끗하게 유지하여 하나님과 밀착을 이룰 수 있다면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들은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보화와 같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주어지고 말과 행동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마음이 세상의 가치를 좋아하여 더러움이 발생하게 된다면 하나님과의 연결은 끊어지고 나의 독자적 생각과 감정과 계획들이 하나님의 뜻을 대체하며 채워지게 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좋은 학원에 보내고 여러 가지 일들을 시켜보려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이것이 하나님으로 비롯된 일이 아니라면 모두 악독함에 불과합니다. 꼭 음란과 도둑질과 사기와 절도를 해야만 악독함이 아닙니다. 근원적으로 하나님과 밀착되지 않고 세상과 밀착된 상태에서 나오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또한 이로부터 비롯된 말과 행동이라면 무엇이든 악독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다스려 가시는 이 세상에서는 절대로 나와서는 안 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장님이 마음을 사업과 밀착시키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마음은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사업에 대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뜻이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속으로 들어와서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사업과 밀착됨으로써 더러워지게 되었습니다. 이 더러움에 의해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일 때에 악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으로 다스리시는 세상에 나타나서는 안 될 생각이고 감정이고 의지이며 말과 행동입니다. 코로나19가 이전에는 없었던 신종 바이러스인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서 나타나는 악은 본래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신종 바이러스인 셈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육체를 통해 세상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밀착되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주권으로 다스리시는 이 세상에 신종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것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삶을 멸망으로 이끌어갑니다.

이로부터 십자가를 생활화해야만 하는 이유도 생겨납니다. 우리의 마음은 원죄의 속성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젖혀두고 이 세상과 밀착을 이루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마음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는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유지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마음은 세상과 밀착함이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만 세상과 떨어질 수 있습니다. 세상과 붙어서 사는 동안 생겨난 더러움이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지게 됩니다.

마음이 눈과 같이 양털같이 희게 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과의 접촉을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하나님과 접촉하게 되면 거룩하심 곧 깨끗함과 지극히 좋으심에 연합할 수 있는데 이보다 좋은 일이 없습니다. 무조건 좋음을 가지고 사업도 할 수 있고 직장생활을 하고 가정을 돌볼 수 있고 목회현장에 나갈 수 있습니다. 이 무조건 좋음은 오직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마음의 깨끗함을 유지할 때에만 나올 수 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중단된다면 마음은 더러움에 장악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더러움의 진실을 알고 벌벌 떨면서 무서워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영적인 능력이고 수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은사는 내 속에서 발생하는 더러움을 알고 무섭게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죽으신 주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여기는 십자가 생활화를 지속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붙잡아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깨끗함으로 유지되어 거룩하시고 깨끗하시고 지극히 좋으신 하나님과 밀착함을 유지해나갈 수 있도록 은혜위에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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