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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 이름에 달린 하나님의 댓글>의 줄거리:
인터넷 시대이고 댓글문화의 시대입니다. 악플 선플 베플이라는 신조어가 생겼습니다. 내 이름 아래 하나님이 댓글을 남기셨습니다. 나를 묘사하신 내용만으로 보자면 세상에 악플도 이런 악플이 없습니다. 그러나 악의가 있어야 악플임을 고려하면 절대로 악플일 수는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댓글로부터 열리는 구원의 길을 알아봅니다.
내 이름에 달린 하나님의 댓글
(마가복음 7:24~30)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내 이름에 달린 하나님의 댓글>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내 이름에 달린 하나님의 댓글’
요즘이 인터넷 시대이고 댓글 문화의 시대라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만큼 모두가 주지하는 사실입니다. 댓글을 영어로 리플라이(reply)라고 하는데 흔히 말하는 악성 댓글이 악플입니다. 또 좋은 댓글은 선플이라 불리기도 하고 그 중에서 추천을 많이 받은 댓글은 베스트 리플라이 즉 베플이라고 불립니다.
댓글 문화의 시대이니만큼 이 댓글의 힘은 강력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악플에 시달리던 연예인이 자살하였다는 이야기는 낯설지 않습니다.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이나 공인들에게 있어서 악성 댓글은 일반인들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시련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신앙적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님께서도 나의 이름에 댓글을 달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댓글은 평범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자면 어떤 악플보다 심각한 내용의 댓글을 내 이름에 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댓글은 세상의 악플과는 다릅니다. 세상의 악플은 상대를 비방하고 비판함으로 명예를 훼손하고자 하는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악한 의도를 갖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댓글을 악플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내용이 악플처럼 참담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마태복음에서 이 본문을 한 차례 다루었습니다. 수로보니게 족속의 이방여인이 귀신들린 딸을 고치고자 예수님께 찾아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딸에게서 귀신이 나가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다만 마가는 이 동일한 사건을 마태와는 사뭇 다른 관점에서 조망하고 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공관복음이라 불리는 마태 마가 누가 복음서에 더해 요한복음까지 살펴보자면 똑같은 역사적 사건이 다른 관점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차이에 대해 전혀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역사적 사건을 김치라고 한다면 마가는 김치로 찌개를 끓였고, 마태는 김치로 부침개를 했을 뿐입니다. 성령의 감동에 따라 복음서를 기록할 때에 같은 역사적 사실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의 이해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을 읽을 때에는 김치부침개를 먹는다고 생각하고, 마가복음을 읽을 때에는 김치찌개를 먹는다고 생각한다면 똑같은 김치를 먹으면서도 전혀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듯이 다양한 은혜를 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두고 오늘 본문의 중심이 되는 구절을 찾아보자면 2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5장 28절에서 예수님께서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라고 기록된 것과는 차이가 느껴집니다. 여기서 ‘크다’는 말이 메갈레(μεγάλη)로써 메가톤급으로 아주 크다는 의미라고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본문에서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는 기술은 독특합니다. ‘이 말’이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수로보니게 여인의 대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딸을 고치기 위해 찾아온 여인을 개에 비유하십니다. 27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고 하신 바와 같습니다. 그리고 28절을 보면 여인의 대답이 나타납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에 근동지방에서는 식사 전에 떡을 조금 떼어서 손을 닦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버린 떡을 개가 먹는 경우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개 취급을 하였으니 억울할 법도 한데 여인은 스스로 개를 자청하여 은혜의 부스러기라도 받고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임하는 은혜가 개를 자처한 여인에게도 임하리라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 사건과 관련된 오해를 하나 풀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여인을 개에 비유하신 이유를 생각해봅니다. 일반적으로 이 여인이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개로 비유되었다고 여겨집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선민의식에 고취되어 이방인들을 개나 돼지와 같이 부정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바로 앞에서 정결 문제로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예수님과 갈등을 빚었던 것을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잘못된 선민의식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이방여인을 모독하시며 개라고 부르셨을 리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15~16절에서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깨끗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하여 마음에서 온갖 더러움이 쏟아져 나오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마태복음 23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저주를 퍼부으시기까지 합니다. 25절을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라고 하셨고 27~28절에서는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처럼 겉으로는 정결을 가장하되 속에는 시체가 썩어 구더기가 들끓는 더러운 상태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스스로를 선민으로 여기고 이방인들을 개나 돼지처럼 부정하게 여겼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마음은 이방인들보다도 부정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민들 중에서도 가장 깨끗하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야말로 돼지보다도 부정하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방여인에게 개라고 한 것보다 더 지독하게 돼지새끼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럽고 가장 더러운 짐승을 돼지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33절에서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표현을 염두에 두자면 수로보니게 여인을 개로 비유하신 것은 오히려 상당히 점잖은 표현으로 느껴질 정도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이른바 공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지독한 악플을 다셨던 셈입니다. 가장 깨끗하다고 자타가 인정하던 사람들에게 “돼지 같이 더러운 놈들아. 너희는 시체가 썩어서 구더기가 들끓고 악취가 가득한 무덤과 같다.”고 하셨으니 악플이라는 말이 참으로 어울립니다.
훈련소에서 신병들을 교육시킬 때에 군인으로써 취해야 될 행동을 가르칩니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조교 한 명을 세워서 시범을 보입니다. 본문에 등장한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께서 등장시키신 조교와도 같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사람들에게 댓글을 달아도 자신의 이름에 붙은 댓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댓글이 무서운 이유는 다른 사람 눈에 비치는 나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비치는 나의 모습이 아름다고 좋기를 기대합니다. 공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일수록 이러한 경향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보통 사람들도 좋게 보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친구에게 의리가 있고 배려하는 사람으로 비친다면 참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배신자이고 이득만 챙기고 식사 한 번을 사지 않는 구두쇠 같은 놈으로 비친다면 기대는 깨지게 됩니다. 연예인들이 악플에 시달리다 자살하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대중들의 마음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망가지고 깨지고 허물어진 것을 견딜 수 없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의 이름 아래에 댓글을 달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댓글 속에 표현되는 우리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깨닫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런데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자신들의 마음이 더럽고 부정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이가 없었습니다. 만약 바리새인들이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예수님의 말씀에서 자신들의 진실을 발견하고 인정할 수 있었다면 “주님! 저는 돼지와 같이 부정한 자입니다. 제 안에 시체가 썩는 것 같은 더러움이 있습니다.”라고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회 안에서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대제사장과 장로들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1장 31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이들에게 달았던 예수님의 댓글이었던 셈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들었다면 “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사회적 존경과는 별개로 나는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치 않은 사람입니다.”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이들은 전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마치 조교를 세우듯이 수로보니게 여인을 통해 예수님의 댓글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그것을 완벽하게 수행했기에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스스로를 개 취급을 받아 마땅한 죄인이라 여겼고, 개에게도 받을 은혜가 있듯이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를 받고자 하였습니다. 이렇게 완벽한 조교의 모습을 보인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예수님은 이 여인이 관계하는 모든 일에 하늘나라가 임할 것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 결과 딸에게 들어간 귀신은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댓글 문화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권상우 손태영 부부가 받은 댓글에 대한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분들이 1남 1녀를 낳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올렸습니다. 공개된 인터넷 상에 사진을 올렸다는 시점에서 팬들로부터 좋은 반응이 나오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다만 지금까지 악플 공격을 받은 적이 많았기에 걱정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진에 “그냥 좋아요~ 태영씨~”라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그러자 손태영 씨가 댓글을 달기를 “그냥 싫어요 듣다가 그냥 좋아요 들으니까 아 역시 말의 힘이란^^ 기분이 좋아지네요 고마워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유도 없이 싫다는 댓글을 볼 때에는 마음에 상처를 받습니다. 그냥 넘어가도 되는데 굳이 싫다고 댓글을 남긴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들이 미움 받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사진을 보고 그저 좋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자 그 말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이들 부부에게 댓글을 다신다면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그 댓글이 성경에 담겨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를 포함하여 지구상에 살아가는 75억 명 모두에게 해당되는 댓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뺨을 치며 조롱하였습니다. 그리고 옷을 벗긴 후에 기둥에 손을 묶고 채찍으로 온 몸의 살갗이 너덜너덜할 정도로 때렸습니다. 또 손가락만한 가시가 박힌 면류관을 만들어서 머리에 눌러 씌웠습니다. 그 가시가 뇌 속으로 뚫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워 언덕으로 끌고 올라가서 손과 발에 대못을 박았고 십자가를 세워서 매달았습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창으로 배를 찔러 내장을 끊어 죽였습니다. 이게 손태영씨와 저와 여러분을 포함해서 75억 명 각자에게 달린 하나님의 댓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치욕과 고통을 당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십자가 형벌을 받아야 할 존재는 바로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75억의 인류입니다. 공인이든 연예인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누구나 벌거벗김과 침 뱉음을 당하고 뺨을 맞으며 조롱과 치욕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손발에 대못이 박히고 채찍질을 당해야 마땅합니다. 배를 창에 찔려야 마땅하고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 못 박혀 죽어야 마땅합니다.
우리가 인터넷에 올린 사진에 이러한 댓글이 달렸다면 고소를 해도 시원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로보니게 여인이 개 취급을 당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모습임을 받아들이고 인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여인의 모든 삶에 천국이 임하고 딸에게서는 귀신이 쫓겨나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이 당하신 모든 일을 나에 대한 댓글로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믿음이고 복음이 요구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깨끗하시고 거룩하시며 지극히 좋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더럽고 악합니다. 사람들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그렇게 더럽거나 악하다고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범죄자들을 기준으로 본다면 나 자신은 의로운 편에 속한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깨끗하심과 거룩하심과 좋으심 앞에서 어떤 사람도 의를 자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을 기준으로 나를 판단할 수 없으며, 범죄자를 기준으로 의롭다 여길 수 없습니다. 가족들 앞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 진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앞에 선 나의 모습이 진짜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나는 침 뱉음을 당하고 뺨을 맞아 모욕을 받아 마땅한 죄인입니다. 맨 몸에 채찍을 맞아 살갗이 너덜너덜 찢어지도록 고통을 받아 마땅한 죄인입니다. 가시 면류관을 써서 뇌 속에서부터 피를 흘리는 것이 마땅하며, 창에 배를 찔리고 사지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마땅한 더럽고 악한 죄인입니다. 내가 이렇게 더럽고 악한 죄인임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밀착할 가능성도 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죄인을 위한 맞춤형 구원입니다. 스스로를 선하다 여기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구원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스스로 뱀과 독사와 같이 악하고 돼지와 같이 부정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예수님이 가져오신 구원은 나와는 무관한 일이 되어버립니다.
나 자신이 모욕과 고통을 받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야 할 악하고 더러운 존재임을 받아들일 때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구원의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마치 수로보니게 여인이 스스로를 개로 인정하고 개가 받을 은혜를 구했던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 주어진 모든 모욕과 고통이 실제로는 내게 주어져야 할 합당한 일이었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야 십자가를 통해 주어진 구원이 나의 구원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근간은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모든 서신이 십자가 생활화를 그토록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십자가 생활화는 잊히고 있었습니다. 이는 곧 깨끗하시고 거룩하시며 지극히 좋으신 하나님과 밀착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은 적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과의 밀착을 목표로 했다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당하신 모욕과 고통이 본래 내가 받아야 할 모욕과 고통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도 나의 마음을 뒤흔드는 하나님의 댓글입니다. 우리가 인터넷에 올린 글에 “너에게 침을 뱉고 싶다. 너를 벗겨놓고 채찍으로 갈기갈기 치고 싶다. 너를 십자가에서 못 박아버리고 싶다”라는 댓글이 달린다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그러나 더럽고 악한 나는 그렇게 취급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댓글이고 그 댓글은 십자가로 표현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만 하면 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스스로를 개로 여기며 은혜를 구했던 것과 같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도 들려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언제 어디서든 “주님! 저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댓글에 표현된 대로 악하고 더러운 사람입니다.”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내 이름에 하나님께서 달아놓으신 십자가 댓글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세상에 정복되어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 얼마나 악하고 더러운지를 받아들이게 하셔서 악하고 더러운 자에게 맞춤형으로 준비된 구원을 충분히 받아 눈처럼 깨끗하시며 의로우신 아버지의 자녀로 거듭나는 삶이 매일 반복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