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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2

녹취문: 생각하면 죽고 들으면 산다_태승철 (마가복음 7:31~37)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5.08|조회수96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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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생각하면 죽고 들으면 산다>의 줄거리:

사람에게는 생각능력은 주어져 있지만 생각면허가 주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주어진 생각능력을 생각하는 데 사용하는 것은 심각한 불법입니다. 그래서 그 대가가 너무 혹독합니다. 삶을 지옥으로 살고 결과적으로 완전한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생각능력은 하나님의 생각을 듣기 위한 필수적인 준비물일 뿐입니다. 생각하면 죽고 들으면 삽니다.


생각하면 죽고 들으면 산다

(마가복음 7:31~37)

 

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2.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36.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생각하면 죽고 들으면 산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생각하면 죽고 들으면 산다

이 말을 패러디해보면 사즉사(思卽死) 청즉생(聽卽生)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복음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삶이 이렇게 쉬워도 될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각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생각의 면허를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갈 때에 맞이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들음입니다. 생각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판단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들음은 밖에 있는 판단을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듣기의 반대는 말하기로 여겨집니다. 다만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각 즉 판단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근본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듣기의 반대는 생각하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마가복음 7장에서는 더러움과 깨끗함이 문제시되고 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사건에서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개로 비유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이방인을 개로 비하하였습니다. 개라는 단어에는 더러움의 속성이 담겨있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여인이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개로 비유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유대인 중에서 가장 깨끗하다 여겼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혹은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을 돼지 같이 더러운 자들로 여기셨고 세리나 창녀보다 천국에 들어가기 힘든 존재들로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반적인 유대인들처럼 선민의식을 가지고 이들을 경멸하거나 무시하시고자 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이들의 상태를 거룩한 천국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기준으로 바라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드러내시고자 하셨던 천국은 거룩하고 깨끗하고 지극히 좋으신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모든 인간은 더러운 돼지나 개와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주시려는 구원은 바로 이렇게 더럽고 추악한 사람들에게 맞추어진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스스로를 깨끗하고 거룩하게 여기는 자들은 이 구원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더럽고 추악한 나의 모습을 인정하는 자들만이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오늘 본문에서도 이 더러움과 악함은 계속하여 문제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어장애인을 고치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마가가 성령의 감동하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내용은 바로 왜 더러움과 악함이 생겼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대체 우리가 어떻게 행하며 살아가고 있기에 더러움과 악함이 발생되게 되었는지를 실천적 측면에서 그 이유를 드러내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로부터 더러움과 악함을 방지하고 피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나의 더러움과 악함을 번역해 놓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주어진 경멸과 고통은 본래 예수님을 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모든 경멸과 고통을 당하기에 합당한 자는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당하신 이 일들이 본래 내가 당하여야 하는 일임을 깨닫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나의 더러움과 악함은 제거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육체를 입고 살아가기에 오늘도 더러움과 악함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를 바라봄은 지속되어야만 합니다. 이는 루터가 데일리 뱁티즘(Daily Baptism, 날마다 세례)”을 주장하고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31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던 바와 같습니다. 계속해서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매일같이 생겨나는 더러움과 악함은 용서 받게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을 반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다만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이전과 같은 삶이 반복되면 그것은 신앙적으로 미성숙한 일입니다. 십자가 바라보기를 지속한다면 삶에서 변화가 일어나야만 합니다. 더러움과 악함의 상황이 점점 줄어들고 거룩함과 깨끗함이 나타날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 오늘 본문을 통해 제시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치유사건들은 하나의 설교입니다. 즉 행위로 말씀하시는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장을 비롯하여 많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들만이 예수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병자를 고치시고 기적을 일으키신 모든 행위들 또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신 비유의 말씀이 됩니다.

본문에서는 언어장애인을 고치신 사건이 나타납니다. 32절을 보면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헬라어로 모길랄로스(μογιλάλος)로써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언어장애인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장애인을 고치실 때 특별한 행동을 하십니다. 33절을 보면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라고 하였습니다. 위생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꺼려지는 광경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굳이 이렇게 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과의 접촉을 통해 질병의 치유를 받을 수 있다는 미신적인 민간요법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미신적 수단을 쓰시지 않고도 얼마든지 병자를 고칠 수 있었습니다. 말씀만으로 들리게 하실 수 있었고 말도 할 수 있도록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특별히 이러한 모습을 취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난 설교에서 접촉성 더러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 접촉이 문제가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 이외의 대상과 마음을 접촉시키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생각을 들을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육체적 접촉을 통해서 이러한 마음의 문제를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접촉성 더러움이 발생하고 그로부터 악도 생겨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언어장애인의 귀에 손가락을 넣으신 것은 하나님의 생각을 듣는 귀를 이식한다는 비유적 의미가 담긴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침이 묻은 손을 혀에 가져다 댄 것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생각만을 말씀하시던 예수님의 입을 이식하신다는 의미를 담은 행위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복음 530절을 보면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826절에서는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세상 모든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귀머거리이고 벙어리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서 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언어장애인에게 이러한 행위를 하신 것은 미신적 민간요법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과의 접촉을 통해서 예수님의 귀와 입을 이식하는 상징적인 행위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생각을 듣고 말하지 못하면 스스로 생각하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은 결코 접촉성 더러움과 악함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마가는 이러한 의도를 담아 이 사건을 조망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 더러움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이 더러움에서 나오는 악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들음에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까지 계획 속에서 주관하시고 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에 대해서도 반드시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참 건방진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배우자에 대해 불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배우자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가십니다. 이때에 선택지가 생깁니다. 배우자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일 것인가 나의 생각을 고집할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 자체가 건방진 이유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임금님이 말씀하시는데 신하가 끼어들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내가 말하겠으니 임금님은 조용히 하라고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이러한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살겠다는 것은 창조주이시자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조용히 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만은 빌려보고자 합니다. 우리 모두가 얼마나 건방을 떨며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를 다른 예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돈 문제가 생긴 상황을 떠올려보겠습니다. 재정상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나쁘다 여기는 판단이 생기고 그 판단으로부터 해결을 위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사고의 과정이 아닙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과는 과정에서 마음은 돈 문제와 접촉을 하게 됩니다.

혹은 자녀의 진로에 대해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때에도 내가 판단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내 아이가 이대로 가다가는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겠구나라고 판단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녀가 승승장구하고 있다면 앞으로도 이렇게만 하면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성공할 수 있겠구나라고 판단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판단하고 생각하는 동안에 마음은 자녀와 접촉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접촉으로부터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접촉성 더러움이 발생하게 됩니다. 돈도 더럽지 않고 자녀도 더럽지 않습니다. 내 마음도 더럽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돈이든 자녀든 세상의 가치들과 접촉하게 될 때에 더러움이 발생합니다. 그 더러움에서 비롯된 행동들은 모두 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의 생각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각의 능력을 주신 이유입니다. 생각의 능력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내기 위한 그릇으로써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이 세상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생각면허는 없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일들에 면허가 필요합니다. 낚시를 하려면 낚시면허가 있어야 하고, 운전을 하려면 운전면허가 있어야 하고, 장사를 하려면 영업면허가 있어야만 합니다. 면허 없이 운전을 하거나 영업을 하면 불법입니다. 생각의 능력이 주어졌다고 해서 마음대로 생각해도 된다는 것은 사탄의 소리입니다. 생각능력과 생각면허는 별개의 것입니다. 본래 사람은 삶의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하면 안 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없는 일은 없으므로 반드시 들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생각하고 계시는데 내가 생각하면 불법입니다. 나 스스로 생각하고자 할 때에 더러움은 발생합니다. 스스로 생각할 때에 마음과 세상의 접촉이 이루어지고 그로부터 더러움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정치인에 대해 생각할 때에 자연스럽게 마음에는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과 생각이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그 순간 정치인이라는 대상과 마음의 접촉이 이루어지고 더러움은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나의 사건으로 인정함으로써 나의 생각과 판단을 멈추면 마음의 접촉은 중단되게 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마음을 접촉시키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문제가 생겨도 일이 잘 풀려도 자녀에 대해 판단하고 생각하는 동안 마음은 접촉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적이 형편없든 좋든 판단을 하지 않으면 마음의 접촉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당장 실천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판단과 생각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수 만수 앞을 내다보시면서 계획하시는 중에 내가 받아서 말하고 행동해야 될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을 다 붙잡을 수 없고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 말하고 행동으로 나타야 할 하나님의 생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권 안에 들어있는 생각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게 될 때에 지금 주어져야 할 하나님의 생각들은 무효처리가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날 수 없는 삶은 자멸의 길로 들어갈 수밖에 없고, 마음은 세상과 접촉하여 더러움이 생겨나고 말과 행동으로는 악을 표현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불행한 이유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하기 때문에 접촉성 더러움이 발생하고 더러움에서 악함이 삶을 덮게 됩니다.

우리가 딱 한 가지 생각해도 되는 것이 있다면 계획 중에 하나님의 생각이 없는 대상입니다.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는 계획 중에 생각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계획 중에 생각이 없으신 대상이 하나님 자신이니까 내 생각의 능력을 가지고 마음껏 생각해도 됩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계획 중에 있기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대상은 오직 그 계획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생각면허가 허락된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보고 싶어서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갖고 싶어서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접촉하고 싶어서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껴안고 싶어서 생각합니다. 하나님으로 배 부르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2절에서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생각을 받고 들을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바로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내가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여 죽은 자임을 고백하기를 지속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 됨의 포인트를 판단과 생각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었다는 것은 육체의 오감으로 느끼는 대상들에 대해서 판단과 생각이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불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에서도 유사한 가르침은 있습니다. 불교 같은 경우에는 일각 즉 한 번의 분별을 하는 의식을 발동함으로써 삼라만상이 다 살아서 꿈틀대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생각과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 있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가르침과 십자가 생활화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수련을 통해 생각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의 접촉과는 무관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여 나의 생각과 판단에 대해 죽었음을 고백 할 때에 또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과의 접촉을 이루게 됩니다. 이 하나님과의 접촉을 통해 나타나는 첫 번째 결과는 마음의 평강입니다. 마음의 채워짐이고 만족함이며 감사함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 채워지고 나면 내 앞에 나타나는 대상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의 능력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것이 한 마디로 듣는 것입니다.

 

본문 33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고치시기에 앞서 무리를 벗어나신 이유는 이 사람이 처음 듣는 소리가 하나님의 소리이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무리가 외치는 세상의 소리를 듣기를 바라시지 않았습니다. 이 또한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행동이셨습니다. 본래 사람이 들어야 할 소리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 들음이란 하나님의 생각을 받는 과정입니다. 생각하는 능력을 통해 하나님의 생각을 듣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진 생각의 능력은 내 스스로 생각하도록 허락된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의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생각하고 계시기에 우리에게는 생각면허가 주어지지 않은 셈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타락한 인류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체질이 되어버렸습니다. 17~18세기에 대두된 계몽주의의 특성은 스스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외부로부터 들리는 음성에 귀 기울이기를 호소하는 종교는 어리석고 악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본래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스스로 생각할 때에 마음에는 세상이 담기게 되고 접촉성 더러움이 발생하게 됩니다. 더러움은 거룩함과 반대이고 깨끗함과 반대이고 좋음과 반대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좋음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마음이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더러워진 이유는 마음이 세상과 접촉하였기 때문이고, 접촉하게 된 이유는 스스로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각과 분별없이 삶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생각과 판단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한 순간도 빠짐없이 내 삶에 대해 생각과 판단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을 들을 수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 방법이 바로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십자가에서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것들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하려는 나를 죽은 자로 여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접촉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과 접촉을 이룰 때에 마음에는 평강과 만족과 기쁨은 주어질 것이고,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이 세상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떠오를 때에는 앞에 있는 문제와 상관없이 평강과 만족과 감사가 넘쳐납니다. 이때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은 다 하나님의 생각이 되고 모든 생각이 하나님께 들은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의 생각 듣기는 십자가에서 나의 판단과 생각을 죽임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접촉함으로써 하나님의 생각을 들음도 이루어지게 됩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마음대로 하라(Dilige et fac quod vis)”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 하는 모든 행동이 하나님의 생각에 부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곧 하나님과의 접촉이고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접촉했다면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하나님과 접촉의 증거는 기쁨으로 나타납니다. 주어진 상황이 어떠하든 감사와 평강과 기쁨이 샘솟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어떤 것도 나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는 바랄 것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면, 떠오르는 생각대로 마음대로 하여도 하나님의 생각을 듣고 행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어떤 말과 행동을 하더라도 더 이상 더러움과 악함이 나타나지 않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육체의 오감으로 느끼는 모든 대상들에 대해 나의 판단과 생각이 죽었음을 고백할 때에 하나님의 생각 듣기는 이루어지게 됩니다. 생각하면 죽습니다. 들으면 삽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는 너무 더럽고 악해서 티끌만큼의 천국 입성의 가능성도 없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맞춤형 구원을 준비하여 주셨습니다. 이제 십자가에서의 주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임을 고백합니다. 특별히 나의 생각과 판단이 죽었음을 고백하오니 하나님의 생각을 듣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과 접촉하여 거룩함과 깨끗함이 말과 행동에서 끊임없이 열매로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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