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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 탄식 따라하는 신앙실력>의 줄거리:
바리새인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자 예수님은 절망감으로 깊은 탄식을 하십니다. 그런 것 관심조차 없는 사람이 더 많은 세상인데 어쨌든 영적 관심이 크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세리와 창기들 그리고 간음 현장에서 잡혀온 여자 앞에서조차 이런 탄식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대체 예수님 탄식의 이유가 뭘까요?
예수 탄식 따라하는 신앙실력
(마가복음 8:1~13)
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12.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3.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 탄식 따라 하는 신앙실력>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 탄식 따라 하는 신앙실력’
본문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신앙실력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는 증거는 바로 예수님의 탄식을 따라할 수 있느냐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처럼 탄식하는 사람이 참 신앙인이며 신앙실력자입니다.
본문에서 중심이 되는 구절은 12절입니다.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깊이 탄식을 하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누구나 탄식을 할 수는 있으나 구원자이시고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탄식이라는 점이 특별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탄식은 그 자체로 말씀이 됩니다.
예수님의 사명과 존재이유는 인류의 구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관심 또한 구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께서 탄식하셨다는 것은 인류의 구원에 대한 절망을 느끼셨음을 의미합니다. 바리새인들의 마음과 같다면 도저히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절망감의 표현이 깊이 탄식하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상태를 확인하셨기에 이토록 구원사역에 대한 절망감을 느끼시면서 탄식하셨던 것일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탄식을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에 예수님이 원하시는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절망하신 상황에 대해서 우리 또한 절망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절망에 공감할 수 있을 때에 참 희망과 참 소망도 생겨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탄식을 따를 수 없다면 참 희망과 참 소망도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도저히 구원하실 수 없다고 여기신 사람들이 과연 어떠한 사람들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또 예수님으로부터 탄식을 나오게 하는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서도 살펴보겠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도 이러한 상황을 접할 때에 예수님과 똑같이 절망하고 탄식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나를 바라보실 때에 절망하고 탄식하지 않으시도록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님께서 탄식하지 않을 상황이 되기를 바랄 수 있어야만 합니다.
1~7절까지는 칠병이어 기적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만나십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십니다. 도저히 이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열매가 맺혀질 수 없겠다고 여기시며 절망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받드시려고 하셨지만 도저히 구원할 수 없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이들은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타가 공인하던 자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구한 하늘로부터 온 표적은 말 그대로 예수님이 하늘과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들이 바랐던 표적이란 대표적으로 모세에게서 나타났던 일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모세가 지팡이 하나 짚고 바로 앞에 설 때에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었음이 열 가지 재앙의 기적을 통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홍해가 갈라졌고 애굽의 군대를 수장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출애굽 이후에는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먹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기적들이 모세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증거이고 표적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이러한 표적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요청 속에 담긴 악함을 아시고 이들이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겠다고 절망하시며 탄식하십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의 몸 자체가 성령으로 잉태되신 하늘로부터 온 표적이었습니다. 또 요한복음 17장 8절을 보면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오신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신 표적이었으며 그 말씀과 모든 기적 행위가 예외 없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계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나타난 모든 표적을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을 부정하기 위해 다른 표적을 구합니다. 이러한 악함에 예수님은 탄식하셨던 것입니다.
12절 하반부를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7장 8절의 말씀에서 나타난 대로 예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오신 표적을 분명히 드러내셨고 제자들은 이를 믿었습니다. 그런데도 새삼스레 바리새인들을 향해서는 이와 상반된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표적과 바리새인들이 보고자 했던 표적이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로부터 온 표적은 예수님의 몸과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지만 바리새인들이 요구하는 표적은 절대 주시지 않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이 세대’란 바로 접촉성 더러움과 그 더러움으로부터 나오는 악함의 상태를 정상으로 알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지난 시간에 접촉성 더러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마음이 하나님보다 이 세상의 가치들을 더 좋아해서 밀착을 이루게 된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가정에 아기가 태어나게 되면 부모의 온 마음은 아기를 향하게 됩니다. 여기서 접촉성 더러움이 발생하게 됩니다. 아기도 더럽지 않고 부모의 마음도 더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기는 본래 마음에 담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에 담았을 때에 더러움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더러움으로부터 발생한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모두 악이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 접촉성 더러움을 더러움으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정상인줄 알고 그로부터 나오는 악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부모가 아기를 마음에 담는 것은 문제시 하지 않는 것처럼 돈이나 건강에 대한 인식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돈을 마음에 담는 것을 문제시하지 않고, 건강을 마음에 담는 것을 문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을 마음에 담고 추구하여 확보하는 것이 마땅한 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라 여깁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이 상징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이지 않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이란 지금 땅에 있으면서도 하늘과 이어져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잘못된 방식으로 구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오히려 바른 방법으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이 중요한 이유는 땅에서 하늘로 갈 수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부터 대전은 약 200km 떨어져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대전에서 서울까지는 200km 남은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하늘로부터 이 땅에 왔다는 것은 곧 이 땅에서 하늘로 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땅에 사는 우리가 하늘로부터 온 표적을 구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땅에 있는 우리가 하늘로 가는 길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좋아서 하늘로 가고 싶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좋아서 마음으로 밀착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간절히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는 것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표적으로 삼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마음은 이와 같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마음은 세상과 밀착되어 있었습니다.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살인을 하고 간음을 하는 등 십계명을 어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세상과 밀착할 때에 더러움은 발생하게 됩니다. 마음이 배우자에게 밀착하고 자녀에게 밀착할 수 있습니다. 돈이나 건강장수 혹은 외모와 밀착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음의 밀착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과 밀착된 상태에서는 반드시 이 세상에서 가지고 싶고 도달하고 싶어 하는 이상적인 상태를 바라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상태에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찾았습니다. 하늘과 연결되기를 바랐던 것이 아니라 하늘의 힘을 빌어서 이 땅에서 이루고자하는 이상적인 상태가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조국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하기를 바랐습니다. 다윗 왕국 시절의 전성기가 재현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들이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6장 14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이 바랐던 것은 하늘과의 연결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받은 증거로써 돈을 많이 버는 것이었습니다. 돈이 많은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겼기에 그로부터 사람들의 존경심이 유지되기를 바랐습니다. 이렇게 마음의 배를 땅에 밀착시킨 상태에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기에 예수님께서 탄식하셨던 것입니다.
이들이 바랐던 메시아는 이 땅에서 원하는 이상적 상태로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는 자였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한 일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시기에 하늘로 가시는 길을 만드시고자 하셨고 그것을 표적으로 드러내시고자 하셨습니다.
이러한 이해로부터 우리가 취해야 될 태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이민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친구로부터 친척이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자리 잡고 살다가 한국에 잠시 들어오게 되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친구의 친척이면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지만, 미국이민을 간절히 원하는 입장에서는 조언을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상대가 됩니다. 미국의 상황을 묻고 정착하는 요령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반응 또한 이와 같아야만 합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에 대해 관심을 드러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천국이 어떤 곳이며,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시며, 영생이 무엇인지를 궁금히 여기고 관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하나님을 거룩하신 분이라고 부르면서도 대체 얼마나 좋도록 구분되셨기에 거룩하다고 부르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가져본 적이 있으십니까? 천사들은 어떤 존재이며 천사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도 요한이 이러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고 그 대답으로 들은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리고 계시록에 기록된바 천사들이 늘 감탄하며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밤낮으로 찬송하는 그 광경을 우리 또한 바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 또한 이와 같은 입장에서 고린도후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보일 수 있는 올바른 반응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시기에 땅에서 하늘로 가실 수도 있겠다.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라도 하늘로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것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자들의 태도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묻기도 전에 하늘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변화산 사건입니다. 당시에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제각각 땅에서 이루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화하신 예수님을 보고 산 아래 인간세상에서 바랐던 모든 일들을 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의 좋음은 이 땅의 어떤 좋음도 잊게 할 수 있는 지극히 좋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좋음의 장소인 하늘로부터 오신 이유는 땅에 있는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갈 수 있음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원했던 것은 하늘이 아닌 땅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목표를 땅에서 이루게 해줄 힘으로써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던 것입니다.
본문 1~7절에는 칠병이어의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적 또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연결을 통해 나타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오병이어의 기적과 다른 점은 예수님께서 주도적으로 사람들을 챙기셨다는 점입니다. 군중들이 배고프다고 호소하지도 않았고 제자들이 사람들을 보내어 먹을 것을 해결하자고 제안하지도 않았습니다. 2절을 보면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삼일 간의 집회에서 사람들이 준비해온 모든 식량이 소진된 상황이었으리라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주도적으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고자 하십니다.
바리새인들 또한 이러한 기적을 보고 들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이 기적을 하늘에서 오는 표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신 분이 아니라면 이러한 기적은 일어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신경써주시니 나는 하나님만을 신경 쓰면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들으며 하늘을 바라보기는커녕 자신들의 창고를 채울 기회로 여겼습니다. 하늘에서 오는 표적을 땅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과 영적인 간음을 하는 용도로 사용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의 삶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병에 걸렸던 사람이 예수님을 전도 받고 병이 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마땅히 예수님께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예수님을 건강하고 장수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아 더욱 세상에 열중합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예수님은 탄식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식은 하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에 공감한다면 우리 또한 그러한 삶의 모습에 대해 탄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탄식할 수 없다면 우리의 신앙실력이 없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니는 예배당에서 목사님과 장로님과 권사님의 마음이 예배당 건축이나 수적인 부흥에 붙어있는 것을 본다면 탄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예수님의 구원이 주어질 수 없음을 깨닫고 절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절망과 탄식은 또한 나를 향해서도 나타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가 이 땅의 목표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고 있음을 자각하였다면 스스로 탄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유전 죄의 속성을 가진 우리는 끊임없이 땅에서 좋은 것을 찾고자 합니다. 세상의 가치와 마음을 밀착시키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나를 향해 절망하고 탄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실력입니다. 이 절망과 탄식이 우리를 십자가 생활화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이유는 나에게 절망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좋아서 세상과 밀착하고 싶어 하는 속성을 스스로는 끊어낼 수 없는 나 자신에게 절망하고 탄식하는 것이 신앙실력입니다. 이를 통해 십자가 생활화를 날마다 해나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이 되셔서 내 마음을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서울에서 대전으로 가면 또한 대전에서 서울로 올 수도 있듯이, 우리의 마음이 하늘에 도달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식은 말씀입니다. 나 자신을 향해 탄식할 수 있는 진정한 신앙실력자들로써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에 전념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신앙실력자들이 되어서 내 속에서 꿈틀대는 유전 죄의 속성을 바라보며 절망하고 탄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오늘도 끊임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는 생활화에 전념을 다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