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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 눈치 안 보며 사는 권세>의 줄거리:
세상이 내 마음에 대해 밖에서 안으로 강제 주입하는 의무, 책임, 부담과 억압에 눌려서 눈치 보기를, 전혀 안 하고 살 수는 없을까요? 밖에서 내 마음 안으로 주입되는 이유가 아니라 내 마음 안에서부터 밖을 향하여 나오는 이유로부터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살 수는 없을까요? 예수님의 권세가 눈치 안 볼 자유를 가져다줍니다.
세상 눈치 안 보며 사는 권세
(마가복음 1:21~22)
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상 눈치 안 보며 사는 권세>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 눈치 안 보며 사는 권세’
세상 눈치를 본다는 것은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의 질을 규정할 수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은 해야 되는 일투성이입니다. 가능하면 잘해야 하고 마지못해서라도 해야 하는 일들로 가득합니다. 이러한 마음은 모두 세상의 눈치 보기입니다. 세상의 눈치를 보자니 취직도 해야 하고 결혼도 해야 합니다. 결혼했으니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세상 눈치 보기이고 반대로 이만치 참았으면 이혼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세상 눈치 보기입니다. 자녀를 낳고 잘 키우고자하는 것도 세상 눈치 보기가 될 수 있고, 부부간에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도 세상 눈치 보기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질 때도 있으며 의무감이나 책임감으로 해나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이 모든 일이 세상의 눈치 보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눈치 볼 일이 없으면 의무감이나 책임감이라는 말로 포장된 부담을 짊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의무감이나 책임감이라는 말을 거룩한 윤리적 덕목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적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의무감이나 책임감은 세상의 눈치 보기일 뿐입니다.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눈치 보기가 변형되어 착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삶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의무도 책임도 부담도 지지 않고 사는 삶이란 생각하기 어려우실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은 보다 근원적 차원에서 보자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의 대답이 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우리는 세상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충만함으로 넘쳐나는 기쁨과 만족을 표현하면서 살아야만 합니다.
90세가 넘으신 권사님과 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대화를 하던 중에 저희 아들은 어느 대학에 갔느냐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재수를 하던 중에 군대에서 영장이 나왔고 미루지 않고 입대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권사님이 깜짝 놀라시며 야단을 치셨습니다. 아이를 재수를 시켜서 대학을 보낸 다음에 군대를 보내야지 어떻게 그렇게 잘못했느냐는 말씀이셨습니다.
사실 이러한 결정을 내린 데에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재수를 앞두고 기도를 하는 중에 군대부터 다녀오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 말을 아이에게 직접 하면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아서 그야말로 눈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병무청에서 상근예비역으로 근무할 수 있다는 내용의 영장이 나왔습니다. 상근예비역은 말 그대로 집에서 출퇴근 하는 군인입니다. 이것이 일반사병 복무보다는 조건이 낫다고 여겨졌기에 아이에게 제안을 했고 아이도 받아들여서 그대로 군대에 가게 되었습니다.
권사님께서 야단을 치신 이유는 대학과 군대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일단 대학을 목표로 한다면 재수 삼수를 해서라도 합격을 해야 하고, 군대는 일단 대학을 들어간 뒤로 미루어야만 한다고 확고히 믿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고정관념이야말로 전형적인 세상 눈치 보기입니다.
다른 일화를 하나 더 소개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오래전 일입니다. 어떤 집사님과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차안에서 우연히 저의 설교를 듣게 되셨는데 충격을 받으신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제가 “돈은 벌어서 뭐합니까? 어디에 쓰겠다고 돈을 법니까? 돈 벌지 마세요.”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 분께서는 중소기업의 사장님이셨습니다.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돈 벌지 말라는 말은 처음 들어봤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맴돌며 떠나지 않으셨답니다. 그 일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십자가 복음방송을 듣기 시작하셨다고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떠십니까? 어떠한 이유에서든 돈은 벌어야 될 것 같다면 이 세상의 눈치를 보고 계신 것입니다.
본문에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놀랐다는 내용이 중요합니다.
이와 똑같은 표현이 마태복음에서도 등장했습니다. 7장 28~29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하였습니다. 산상수훈이 끝난 후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이 놀라는 내용입니다.
마태복음의 말씀은 산상수훈의 말씀이고 오늘 본문 21~22절의 말씀은 회당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마태가 예수님의 말씀에 담긴 내용에 집중했던 것에 비하여 마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살펴보았듯이 사람들이 예수님께 놀랐던 이유는 바로 그 말씀이 권위 있는 자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즉 권세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가의 시점은 우리의 신앙에도 중요한 지침이 되어줍니다.
본문에서 ‘놀라다’라는 말은 헬라어 엑세플레쏜토(ἐξεπλήσσοντο)입니다. 이 말은 “안에서 밖으로 쳐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렛 출신 목수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출신 성분을 생각해보자면 말씀에 권세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된 사람들은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마음을 묶고 있던 쇠사슬이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마음을 억압하고 부담을 주고 의무감과 책임감을 느끼게 하던 것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뭇 사람들이 놀라고 권위를 느꼈던 이유였습니다.
이러한 권위가 표현된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31~32절을 보면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의 걱정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엇을 먹을까’라는 말은 단지 내일 먹을 메뉴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끼니를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입에 풀칠할 방법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걱정한다는 것은 삶의 불확실성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이유도 이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 이러한 걱정은 깨어져 나갑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권세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확실한 미래를 염려합니다. 이 미래에 대한 염려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에 대한 걱정으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세상 눈치를 보는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기에 나 또한 그 범주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의무감이나 책임감도 이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이것이 나쁜 방향으로 나타날 때에는 부담과 억압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놀라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잘 해내야 한다, 어쩔 수 없어서라도 해야만 한다, 마지못해서라도 한다.”는 마음이 깨져버렸던 것입니다. 기존에 회당에서 서기관이나 랍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해줄 때에는 이러한 놀라움을 경험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들과 예수님의 차이는 바로 권세에 있었습니다. 세상의 눈치를 보게 되는 이유는 세상의 권세 아래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눈치 보는 것을 원리나 규칙이라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탐관오리인 고을 사또의 학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입에 풀칠할 것도 없이 농사지은 것을 빼앗깁니다. 이때에 암행어사가 나타나서 탐관오리인 사또를 처벌하게 되었습니다. 암행어사는 임금과 밀착된 신하입니다. 임금의 권세가 암행어사를 통해 나타나기 때문에 암행어사의 출두는 곧 임금님의 등장과 다름없습니다. 이때에 비로소 백성들은 사또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됩니다.
예수님의 출현은 마치 암행어사의 출두와 같았습니다. 암행어사가 임금님의 권세를 행사하듯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권세를 행사하시자 마음은 더 이상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됩니다. 마음에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에 대한 부담이 깨어지고 박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권위란 헬라어 엑수시아(ἐξουσία)입니다. 이는 곧 “본질로부터 비롯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한편 회당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은 세상과 밀착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임금과 밀착된 암행어사가 임금의 권세를 행사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밀착된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권세가 담겨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서는 암행어사 출두와 같은 효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권세가 나타나자 피조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은 물론이고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이 더는 억압과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암행어사로 인해 사또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세상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의 일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재수 삼수를 해서라도 우선 아이를 대학에 보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과 이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고 어떻게 살아 갈 수 있을까요? 세상은 ‘해야 한다’는 말을 강요합니다. 취직해야 한다, 결혼해야 한다, 아이를 낳아야 한다, 이러한 모든 해야 한다는 말에서 비롯된 의무감과 책임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위해서는 바로 예수님을 따라서 하나님과 밀착되어야만 합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을 이룰 수만 있다면 당장 내일 먹을 쌀이 없어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몸으로 살고 있는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못 먹으면 죽을 텐데”라는 생각은 세상의 눈치 보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탐관오리인 사또 아래에서 끼니걱정을 하며 사는 것과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될 수 없다면 악령세례를 받은 상태에서 세상의 눈치를 보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하나님과 밀착시킬 수 있다면 이 세상 전체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체감하게 됩니다. 내가 먹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으니 더는 세상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서는 이러한 변화가 나타나야만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를 전하는 것입니다. 세상 권세아래에서 눈치만 보며 살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권세를 전하는 것입니다. “당신도 하나님과 밀착될 수 있다!”라는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시대에 회당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종교생활의 중심지였습니다. 성전이 존재했지만 모든 사람이 수시로 성전을 방문할 수는 없었기에 각 고을마다 있었던 회당이 실질적인 삶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전파되자 사람들은 처음으로 하나님의 권세를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스스로의 권세를 드러내시지는 않았습니다.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시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권세의 통로가 되셨습니다. 본래 이러한 역할은 회당에 모인 사람들을 가르치던 서기관이나 율법사나 랍비와 바리새인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권세를 처음 경험한 것이야말로 놀랍고 이상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세는 늘 경험되어야만 했고 삶에 적용될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권세를 경험할 수 없었던 이유는 가르치던 자들이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현재 기독교가 예배당 모임에 과도하게 집중하게 된 것처럼, 회당에서의 모임이 하나님과의 밀착보다 우선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서기관과 랍비와 바리새인들은 회당에서 이루어지는 말씀의 선포를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 위한 기회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가르치는 이들이 하나님과의 밀착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과 밀착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대중의 인기를 얻으려는 시점에서 이미 세상의 눈치를 보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대중의 인기를 얻어야만 했던 이유는 그것이 세상에서 이룰 수 있는 성공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만든 기준을 따라 살다 보니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을 감시할 수 없었습니다. 마음에 세상이 들어온 상태에서는 하나님에 대해 말할지라도 하나님의 권세는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과의 차이였습니다.
어제 악령세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아담의 타락의 실체는 악령세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무도 무서운 말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사람들의 삶에서 악령세례의 결과는 세상의 눈치를 보며 사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에 주님 안에서 하나님과의 밀착을 이루기 위한 십자가 생활화의 필요성도 생겨납니다.
신학에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상태를 자연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자연인의 상태가 곧 정상은 아닙니다. 그동안 정상이라고 생각해온 자연인의 상태는 실제로는 악령세례를 받아 살아온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하나 되어 밀착되어 있던 상태가 죽자 삶은 완전히 변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에 하나님 대신에 세상을 담고 밀착하여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세상 것을 담았으니 반드시 이 세상의 눈치를 보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과의 밀착을 회복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세상에 대해 눈치를 볼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살아갈 뿐입니다. 의무감과 책임감 대신 마음에 넘쳐나는 충만한 기쁨과 만족의 표현이 삶이 되어야만 합니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대학가야 하고, 좋은 상대를 만나 결혼해야 하고, 자녀를 낳아 엘리트로 키워야 하고, 늙기 전에 노후연금을 준비해야 하고, 일 년에 두세 번은 해외여행을 다녀야 한다는 생각은 세상이 만들어낸 고정관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고정관념을 유지하고자 한다는 것은 세상의 눈치 보기입니다. 이대로 살지 않으면 세상에서 실패자라는 소리를 들을까 두려워합니다. 세상은 그렇게 살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고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의 눈치를 보며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세상의 가치를 담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마음에 하나님 대신 세상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예배당 모임이 문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신경 써야만 하는 것은 언제쯤 예배당 모임을 다시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염려가 아닙니다. 본문 말씀에서 나타나듯이 회당에 모인 백성들은 하나님의 권세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에 세상을 담은 채로 이루어지고 유지되는 모임이란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회당에서 하나님에 대해 배운 사람들이 정작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되었던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늘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설교하고 듣던 사람들이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못 박아 죽인 사건은 너무도 모순적이지만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회당 중심의 종교생활을 유지하던 이스라엘은 AD.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멸망하면서 2000년간을 나라 없는 민족으로 유리방황하게 됩니다.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사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모임은 열매입니다. 그러나 그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각자의 마음에서 먼저 하나님과의 밀착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모임은 서로의 마음에 세상이 들어왔는지를 살피고 깨우쳐주는 일을 위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만 계셔야 합니다. 마음은 하나님만 들어오실 수 있는 상태로 관리되고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성전은 명목상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실질적인 종교의 중심지로써의 역할은 회당에서 이루어지는 모임에 옮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자 했다면 성전의 생활화는 이루어져야만 했습니다. 성전 생활화의 중심은 상번제입니다. 세상 눈치 보는 마음을 번제단에서 죽어가는 어린양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 성전 생활화를 했던 대표적인 사람이 다니엘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머나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도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고 기도하였습니다. 다니엘의 마음에서 성전 생활화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 성전의 존재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마음에서 하나님과의 밀착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연합할 때에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세상이 주는 억압과 부담과 의무와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이제부터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마음을 관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할 수 있도록 유지 관리 보존함으로써 삶은 저절로 살아지게 될 것이고, 성도의 모임 또한 아름답게 열매 맺힐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로 하나님과 밀착을 유지 관리 보존함으로써 이 세상 권세아래 눈치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삶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