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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자기부인, 이것만하다 죽자>의 줄거리:
세상에 태어난 나 자신을 재료로 삼아서 내가 할 수 있는 최고 최대 최선의 일이 무엇일까요? 자기부인입니다. 내가 나를 부인하는 것이 내 생애 최고의 업적입니다. 나라를 구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최악의 일은 내가 나를 긍정하는 것이고 용인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긍정하면 지옥이, 부인하면 천국이 열립니다.
자기부인, 이것만하다 죽자
(마가복음 8:31~38)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자기부인, 이것만하다 죽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자기부인, 이것만하다 죽자’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생애동안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무엇일까요? 내가 나 자신을 밑천으로 삼아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자기부인입니다. 주체적인 인격자로 세상에 태어난 이상 무엇인가를 하며 살아갈지를 결정해야만 합니다. 이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란 대통령이 되는 것도 아니고 대학총장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빌게이츠처럼 돈을 많이 벌어서 기부하면서 멋지게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이순신 장군이 나라를 구한 것은 위대한 일이지만 그보다도 대단한 일이 있습니다. 바로 자기부인입니다.
나를 재료삼아 나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라면 아버지로써의 나를 부인하기 위한 재료로 써야 합니다. 남편이라면 남편인 나를 부인하기 위한 재료로 써야 합니다. 직장에서 부장이라면 열심히 해서 전무가 되고 사장까지 오르는 것이 아니라 부장으로써의 나를 부인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자기부인은 마치 암을 고치려는 시도와 같습니다. 암이 발병하였다면 그 상태의 나를 용인하고 묵인하고 긍정할 수는 없습니다. 암이 발생한 상태를 부인할 때에 치료의 가능성도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부인이라는 말에서 율법과 계명에 얽매인 수도사의 삶을 연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난과 고통과 괴로움을 스스로 자처하는 삶의 모습이 떠오르실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자기부인만큼 중독성이 강할 정도로 쉽고 재미있고 좋은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나를 재료삼아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기까지 합니다. 자기부인이야말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에 인간이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성과이며 업적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부인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먼저 이러한 말씀을 하시게 된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경에서 전도를 하시면서 다니시던 중에 베드로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함구하게 하십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주시려는 구원과 사람들이 원하는 구원의 내용이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리스도이심을 확인하고 기뻐하기도 전에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제자들로써는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자들 또한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 일어날 좋은 일들만을 꿈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따르던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이 분명해지자 그보다 기쁘고 경사스러운 일은 없었습니다. 그 경사스러운 기분을 만끽하기도 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32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무어라 말도 못하는 상황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했던 베드로가 이번에도 먼저 나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대 십자가에서 죽으시면 안 된다고 만류하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반응은 제자 된 도리로써 당연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지혜와 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분명해진 이 시점에서 십자가에서 죽음은 있을 수 없는 일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3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을 문제시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를 사탄에게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참 무섭고도 냉혹하게 느껴지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의 반응이 진리에 입각한 일이 아니었을지라도 제자로써 마땅히 해야 될 사랑의 표현으로 받아들이실 수는 없으셨던 것일까요?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거침없는 말씀으로부터 우리가 해야 될 자기부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자기부인은 곧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나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생애에서 나를 재료삼아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입니다.
남편으로써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남편인 나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엄마로써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자녀 앞에서 엄마인 나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남편이든 엄마든 세상에 속한 입장을 가진 상태에서는 사람의 일 외에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장이라는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해야 사람의 일 중에서도 회사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묵인하고 긍정하고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아래 허락된 사탄의 지배 하에서 삶을 살다 마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옳은 일이란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나를 계속해서 부인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은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구원은 이루어야만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천지를 창조하신 조물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임을 믿고 고백함으로써 구원을 받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티를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구원을 받았음에도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자녀다울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구원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사탄의 지배는 되풀이됩니다.
이제 본문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하는 방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구분함으로써 자기부인을 할 수 있는 명분이 생겨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38절에서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곧 자기를 부인함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지속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사람들이 십자가 생활화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부인의 과정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왜 자기부인을 지속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의 일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분명히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럼으로써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나를 부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만 할 수 있다면 십자가 생활화의 필요성은 저절로 느껴지게 됩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생의 과제로 분명히 느껴지게 되고, 십자가 생활화를 해나가는 동안 하나님의 자녀답게 구원을 이루는 삶이 진행되어 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든 사람의 일을 생각하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을 받은 상태에서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처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심을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제자들은 공생애의 기적과 능력을 베푸시고 지혜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끝에 십자가를 향해 가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십자가로 가시는 지점부터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직전에 마음을 돌려세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죄 사함을 받았다는 생각을 가지고는 있으나, 나도 예수님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베드로의 항변에서 드러난 마음가짐입니다. 기적의 예수님, 능력의 예수님, 지혜의 예수님은 따르려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자리에는 함께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포기한 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끌고 가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좋게 여겨지는 가치들이 있는 곳으로 예수님을 끌고 가려는 것이 예수님께 항변한 베드로의 마음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은 단지 예수님이 죽는 것이 싫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실 때에 따라가고 싶지 않으니, 예수님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돌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나라의 독립과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그 밑에서 신하가 되는 날을 위해서 예수님을 끌고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책망하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권세와 자격을 허락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받은 자로써 해야 할 일은 십자가에서 죽음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마음의 방향을 돌려서 이 세상의 가치들을 향해 예수님을 끌고 가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은 사탄의 주도하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마음이 사탄에게 정복당해 생각이 움직이는 증거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해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함으로써 베드로는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사탄은 구원을 이루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여 구원을 이루지 못하도록 사람의 일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의 일이란 세상에서 원하는 가치를 얻고자 예수님을 끌고 가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까지는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부여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공생애의 예수님은 따라가기에 좋습니다. 기적을 일으키시고 지혜의 말씀을 하시며 능력을 보이십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면 십자가 사건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때에 고민이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계속 따라가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모든 가치를 잃게 됩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지고 싶었던 것, 이루고 싶었던 것, 도달하고 싶었던 고지, 생각했던 행복의 그림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면 십자가의 예수님을 끝까지 따를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까지 예수님을 따라가는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습니다.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일에 대해 죽고, 세상에서 가지고 싶었던 것들에 대해 죽고, 세상에서 도달하고 싶었던 고지에 대해 죽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함께 죽은 마음은 무덤에 들어가심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 머물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서 나타나야만 하는 하나님이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삶은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점으로 해서 계속해서 따라가는 사람이 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지점을 향해 예수님을 끌고 가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의 차이입니다. 세상을 다 버릴 각오를 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만이 보좌 우편까지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에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 되신 것처럼 예수님 안에 있는 마음도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은 하늘에 올라가 평강을 유지하게 되고 하나님으로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또한 땅을 살아가는 몸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두 가지입니다. 내가 생각해야 될 하나님의 일이 있습니다. 또 그러한 나에게 나타나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내가 생각해야 될 하나님의 일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라간 사람의 삶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며 하나님의 일을 해나가시게 됩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께서 삶을 책임지십니다. 이것이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자기부인이란 십자가의 예수님까지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에서 원하는 것들이 있고 갖고 싶은 것들이 있고 도달하고 싶은 고지가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나를 부인하는 것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담은 마음을 부인하고 십자가까지 따라갔을 뿐인데 마음에는 조물주이신 하나님을 얻게 됩니다. 이순신 장군이 나라를 사랑하여 나라를 얻었다면, 우리는 십자가까지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나라는 물론이고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실제로 구원을 이루는 삶입니다. 이 땅에서 어떤 상황이 일어나도 어떤 풍랑 속에서도 마음의 평강이 깨어지지 않는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이보다 더 위대하고 대단한 일은 없습니다.
이러한 자기부인이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입니다. 회사에서 승진을 하려면 나를 재료로 삼아서 소모시켜야만 합니다. 그러한 일은 힘들고 괴롭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따라가려하지 않고 예수님을 승진이라는 일로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 나를 부인하는 일은 나를 소모시키지 않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십자가 생활화를 통한 자기부인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마음에서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는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일이 있고 해결하고 싶어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길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길을 예수님께 기도로 강요합니다. 기껏 하는 기도가 “예수님 응답해주시옵소서.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가르쳐주시옵소서.”라는 내용입니다. 이 마음은 이미 세상의 문제가 해결되는 상황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결이 될지는 몰라도 어떻게든 예수님을 해결이라는 상황으로 끌고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로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생각을 하니 충돌이 일어나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세상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한다고 느끼는 그 마음 자체가 부인되어야만 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이 되려하지 말고 해결하려는 마음을 부인해야만 합니다. 마음에 세상이 담겨져 있다는 것은 몸에 암이 발생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본래 마음에 담겨야 하는 대상은 세상이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실 세상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고 내가 관계하는 가족이나 일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배우자를 사랑하시고, 나의 직장을 사랑하셔야만 합니다. 내가 나를 사랑해서도 안 되고, 나의 배우자를 사랑해서도 안 되며, 직장을 사랑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셔야 할 일을 내가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세상을 담는 것은 암이 생긴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꾸만 마음에 세상을 담고 그것이 해결되는 지점으로 예수님을 끌고 가고자 합니다. 이러한 마음은 예수님께 항변하는 베드로와 같습니다. 마음으로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지 않기로 결정했으니 아무리 십자가 생활화를 하려고 해도 충돌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항변과 같은 마음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가지고 싶지도 않고, 도달하고 싶은 고지도 없는데 마음에 담고 고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생각을 하는 나를 십자가에서 죽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한 나를 보존한 채로 십자가 생활화를 시도하고자 하니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대로 죽어지지도 않고 무엇에 대해 죽어야할지도 모르고 왜 죽자고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가 계속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항변한 마음상태가 어떠했는지를 염두에 두고 나의 마음상태와 비교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제일 흔하게 부딪히는 문제는 돈 문제입니다. 돈이 없는 상태에 대해 두려워하고 떨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마음 상태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일은 돈 문제가 아니라 구원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의지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돈 문제가 마음에 들어온다면 돈 문제가 해결되는 상황을 위해 예수님을 끌고 가고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책망하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마음이 사탄의 주도권 하에서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돈 문제가 아닌 돈 문제가 마음에 들어온 상태를 문제시하여 부인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자기부인입니다. 이렇게 나를 부인할 때에 비로소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를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래도 어떻게 눈앞에 놓인 문제를 모른 척 할 수 있느냐? 문제가 부인되어야지 문제와 당면한 나를 부인해서 어쩌자는 것이냐?”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삶의 문제가 부인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나 문제가 부인되기를 바라며 문제를 끌어안은 나를 긍정하는 동안에는 결코 예수님의 십자가는 따를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베드로의 생각과 다를 바 없습니다. 베드로는 나라가 식민지에 처한 상태를 부인하고 싶었습니다. 로마의 황제가 지배권을 가진 상태를 부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문제를 마음에 담게 된 자신을 부인하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베드로와 같은 마음을 주장하며 문제를 부인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능력만을 베풀어주시기를 기대한다면 구원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삶에 주어진 문제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끌어안은 자신을 부인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자기부인을 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구원을 이루게 됩니다.
이러한 자기부인을 통해서 십자가를 붙잡을 명분이 생겨나게 됩니다. 문제를 부인하지 말고 나를 부인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해야 할 일은 자기부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문제를 부인하고 싶어서 문제를 끌어안고 예수님을 이끌어가며 살았습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탄의 주도권 하에 종이 되어 살았습니다. 이제는 문제를 부인하는 대신에 문제를 끌어안은 나를 부인하게 하여 주심으로써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함께 감으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구원을 이루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