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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2

녹취문: 변화산을 내 삶에 분양받기_태승철 (마가복음 9:1~8)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5.16|조회수65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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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변화산을 내 삶에 분양받기>의 줄거리:

날마다 우리가 삶을 사는 장소를 변화산으로 이사해 옮겨야 합니다. 인간세상에서 지금 내게 주어져 있는 상황은 그 자체로는 내 삶의 자리가 아닙니다. 그 자리를 떠나지는 말 것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지금 여기가 좋사오니"라는 고백이 나오도록 변화산으로 바꾸어서 살아야만 합니다. 베드로 체험의 변화산은 우리 삶의 모델 하우스입니다.


변화산을 내 삶에 분양받기

(마가복음 9:1~8)

 

2.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변화산을 내 삶에 분양받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변화산을 내 삶에 분양받기

본문 말씀에서 베드로가 체험한 변화산 사건은 모델하우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사건을 일으키신 이유는 우리가 베드로의 입장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델하우스를 둘러보고 새로 지은 아파트로 이사할 것을 결정하듯이, 변화산을 모델하우스로 삼아 잘 살펴보고 똑같은 변화산 아파트를 분양받아 살아가라는 취지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변화산 사건에서 예수님의 변화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제자들과 동일한 음식을 먹고 옷을 입고 주무시며 함께 생활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보는 가운에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본래 하나님의 모습으로 복귀하십니다. 인간의 육체라는 커튼에 가려져있던 영이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변화는 예수님에게서만 일어났던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에게서도 예수님 못지않은 극심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6절을 보면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서워하였다는 베드로가 정작 5절에서 했던 말은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비유적으로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돈을 전혀 못 벌던 사람에게 어느 날 현금 10억이 생겼습니다. 거금을 손에 넣자 마음이 너무나 좋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10억을 도둑맞을까 두려움이 생겨납니다.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연애할 때에 애인과 함께 있는 것이 너무나 행복합니다. 그때에 애인을 잃으면 나도 죽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이 동시에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전혀 관심 없는 대상에 대해서는 잃든 말든 두려움이 생기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잃을 때를 생각하면 두려워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볼 때에 베드로의 마음 상태가 이러하였습니다.

앞에서 본 8장에서 베드로는 십자가 사건을 예고하신 예수님을 만류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통해 얻고자 했던 좋은 것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 계시면 그 능력과 지혜와 기적으로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베드로는 십자가로 가시려는 예수님을 만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예고하신 뒤에 자기부인에 대한 말씀을 해주시고 6일 후에 변화산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을 경험하게 된 베드로에게는 불과 6일전에 예수님을 만류하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대한 좋아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반응은 베드로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화하신 영화로움을 볼 때에 인간세상에서는 어떤 것도 좋게 여길 수가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영광의 역전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광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께만 조명이 비추어 하나님만 보이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배우자나 자녀나 돈이나 건강을 비롯한 세상의 가치들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좋아한 나머지 스승이 결정한 일조차 막아섰던 베드로의 마음에서 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길 수 있는 일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마음에서 세상적인 영광이 종식되어버린 것입니다.

베드로가 꿈꾸었던 것은 나라의 독립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치하 때에 그토록 독립을 꿈꾸었듯이 베드로도 로마치하의 이스라엘이 독립하는 것을 꿈꾸었을 수 있습니다. 또한 민족의 번영을 꿈꾸었을 것입니다. 코로나19 사태가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대한민국이 세계제일의 방역국가로 모범을 보이는 것이 자랑스럽게 여겨집니다. 베드로 또한 유대민족이 세계에서 두각을 보이기를 소원했을 것이고 예수님께서 그러한 나라의 왕이 되실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 또한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될 것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렇기에 베드로는 십자가로 가시려는 예수님을 만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화하신 예수님을 보자 베드로의 마음에서는 역전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일어나기를 바랐던 세상에서의 좋은 일들을 모두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육체를 입고 계실 동안에는 이렇게 좋은 분이신지를 꿈에도 몰랐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마음에서 영광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믿어지던 세상의 가치들이 영광스럽게 느껴졌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시자 베드로의 마음에서 세상의 영광은 모두 사라지고 예수님의 영광만이 남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나타나야만 하는 교인의 삶이며 구원을 이루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변화산의 꼭대기는 인간세상과 동떨어진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상과 무관한 그곳에서 마음은 좋음의 극치에 도달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이루고 싶다는 생각이 더 이상 들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뵙자 하나님 외에는 좋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우리의 삶 속에서 재현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너무나 좋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교인입니다. 변화산을 분양받아 살아가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를 많이 가진 사람들을 대단하게 바라봅니다. 빌게이츠나 마윈이나 이재용 씨 같은 사람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하여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고 있는 천사가 바라볼 때에는 이들이 전혀 대단하게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들의 재산이 몇 조가 되든지 하나님의 영광과는 비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조금도 갖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휴지조각처럼 보일 것입니다.

또 삶에서 일어나는 걱정과 염려의 대상들이 크게 느껴질 때가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만 볼 수 있다면 근심과 염려는 머리털끝만큼도 느껴지지 않고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이유는 마음에서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을 보고, 건강을 보고, 자녀의 형통을 보고, 승진 등을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가치들을 영광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우선순위에서 무엇이 금메달을 따는지 사람마다 다르지만 결국 세상의 가치임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이렇게 영광스럽게 여겨지는 세상의 가치들을 이루지 못하게 방해를 받는다면 걱정하고 염려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만 있다면 세상의 가치는 더 이상 영광스럽게 보일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서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면 돈이 없어도 걱정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변화산을 어떻게 분양 받을 수 있을까요? 말씀드렸듯이 성경에 나타난 변화산 사건은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한 모델하우스입니다. 변화산의 모델하우스를 보고 얼마나 좋은지를 잘 알았으니 분양을 받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똑같은 아파트에 살아도 각자의 살림살이와 사정이 다르듯이 똑같은 변화산 사건이라도 우리의 삶에 합당하게 적용시킬 수 있어야만 합니다.

변화산 모델하우스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하나님 되신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변함없이 하나님 보좌우편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께서는 삼위일체로써 영광가운데 존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눈으로 예수님의 영광스러움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예수님의 영광스러움을 느끼며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변화산 모델하우스와 우리가 분양받는 삶의 공통점과 차이점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에는 변화가 없으되 우리 육체의 눈에는 그 영광이 가려져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써 베드로의 마음에서 일어난 변화를 그대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이 영광스럽게 보이는 상황을 종식시키고, 예수님과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느끼며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세상의 영광을 끝낸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변화산을 분양받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이를 영광의 역전현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마음에서는 더 이상 세상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변화산 위에서 베드로가 체험한 마음의 변화가 우리의 삶에서 그대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변화산 모델하우스를 보고 변화산을 분양받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께 보냄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에 변화산의 삶은 분양될 수 있습니다.

변화산을 분양받은 사람은 삶의 조건과는 상관없이 항상 기쁠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제일 크게 제일 먼저 보기 때문에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기뻐하고 만족해하는 동안에 내가 등지고 있는 이 세상의 삶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이끌려지게 되니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산을 분양받은 삶을 위해서는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는 말씀대로 우리의 마음이 항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이 항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야 항상 기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쉬지 말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야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범사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야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변화산을 분양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머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삶의 현장인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마음을 머물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신 후에 곧바로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에게 변화산을 분양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느꼈던 경험이 재현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변화산이 분양되기를 바라시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정확하게 활용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에서 세상의 영광이 보일 때마다 십자가는 활용되어야만 합니다. 돈 좀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 건강하게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가족들이 형통했으면 좋겠다, 지금 하는 일에 손님이 많았으면 좋겠다, 좋은 집과 좋은 차를 사고 싶다. 이렇게 마음에서 세상이 보인다는 것은 아직 변화산이 분양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변화산의 상황이 내게 분양되었다면 세상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드러내시는 가운데 세상의 영광은 사라져버리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같이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여전히 마음에서 갖고 싶고 성취하여 도달하고 싶고 걱정하고 염려할 대상으로 세상이 보인다면 세상의 영광이 아직도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함으로써 이 세상의 영광을 죽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베드로의 마음에서 일어났던 변화를 우리의 마음에서도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생각나고 세상이 보일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 나의 죽음을 이루셨음을 떠올립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유지해 나갑니다. 항상 십자가를 바라보고, 쉬지 말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범사에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생활화해 나갈 때에 변화산은 분양되게 됩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곧 변화산으로의 이사입니다. 변화산 사건을 통해 멋진 모델하우스를 보았으니 이제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분양받고 이사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배당이 아닙니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 때에는 기독교라는 체계로써의 종교는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만 계시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무리를 지어 예배당에 모일 필요도 없습니다. 십자가 바라보기는 개인적이어야 하며 항상 이루어져야 하고 쉬지 말고 이루어져야 하며 범사에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이렇게 십자가 생활화를 할 때에 베드로가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하신 예수님을 보았던 것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베드로의 변화산을 분양받지 못하고 체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려운 비밀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복음이 제시하는 구원은 영지주의처럼 신비한 지식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이 제시하는 구원은 너무나 쉽고 간단하기 때문에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변화산이 분양되지 못하는 이유는 십자가 생활화가 이루어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항상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쉬지 말고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범사에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띄엄띄엄 바라보면서 많은 시간을 세상에 할당한다면 변화산은 분양될 수 없습니다. 돈을 바라보고, 건강을 바라보고, 배우자의 문제를 바라보고, 승진을 바라보고 자녀의 형통 등을 바라봅니다. 목사님들은 목회를 바라보고, 총회를 바라보고, 예배당의 프로그램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동안에는 마음에서 세상이 영광을 받게 됩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듯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권사님 두 분이 강릉에 오셔서 말씀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에 대한 반성적 언급을 하셨습니다. 삶에 휩쓸려 살다보면 어느덧 십자가가 너무 오랜만이다.”라는 말이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말씀을 들을 때에 십자가를 한 번 떠올리고는 하루 종일 십자가를 잊고 산다고 하십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기는커녕 항상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고 쉬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고 범사에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야 십자가를 떠올리니 오래간만이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변화산이 분양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언제 어디서든 생활화되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서울대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든 이 일이 마음을 즐겁게 합니다. 직장에서 상사에게 꾸중을 듣는 중에도 아이 생각만 하면 마음이 즐겁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도 일어나야만 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로또에 당첨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동창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동창들이 돈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이 사람은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돈 자랑을 아무리 들어도 부럽지 않습니다. 마음에 로또에 당첨된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상황에 있든 마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다른 모든 대상은 마음에 담을 수 있으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만 마음에 담을 수 없다는 변명은 말이 안 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없다면 하나님의 좋으심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민이 있는 분들과 3분만 대화를 해보면 그 분들의 신앙상태가 짐작이 됩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좋으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좋으심을 믿지 못하기에 십자가 바라봄을 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변화산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에 이 세상의 영광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모델하우스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좋으심을 못 본척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또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 가기 위한 길입니다. 하나님의 좋으심을 믿지 못한다면 하나님께 가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고, 하나님께 가기 위한 길인 십자가 생활화의 필요성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항상 십자가를 보기가 중단되고, 쉬지 말고 십자가 보기가 중단되고, 범사에 십자가 보기가 중단됩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세상 보기를 좋아합니다. 항상 세상을 보고, 쉬지 않고 세상을 보고, 범사에 세상을 보고자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변화산이 분양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는 요원합니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영광은 뿜어져 나오고 있습니다. 세상의 영광을 크게 보느라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하늘로 가는 길을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영광도 보이게 됩니다. 그럴 때에 변화산은 분양될 수 있습니다.

 

제가 날마다 십자가 생활화의 말씀을 전하는 이유도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항상 보고, 쉬지 않고 보고, 범사에 보기 위해서입니다. 저도 말씀을 준비하고 전하면서 십자가를 보고, 여러분께서는 말씀을 들으시며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십자가 바라봄을 통해 변화산을 분양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에 변화산이 분양될 때에 삶에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변화산을 분양받지 못하는 바보 같은 삶은 중단되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항상 바라보고, 쉬지 말고 바라보고, 범사에 바라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쉬지 말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범사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야만 합니다. 그럼으로써 변화산을 분양받아 이 세상을 향해 세상아! 너는 나에게 아무 필요가 없다. 다만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면 된다.”고 외치며 떵떵거리며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항상 바라보고, 쉬지 말고 바라보고, 범사에 바라봄으로써 변화산을 분양받고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을 향해 가슴을 펴고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이 나타나게 하여 주셔서 스스로에게 깜짝 놀랄 정도로 은혜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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