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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용의 승천과 예수의 승천>의 줄거리:
꿩도 먹고 알도 먹으면 좋으련만 복음적 삶에서는 성공과 승천의 양자택일만이 성립합니다. 이것은 용의 승천과 예수의 승천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괄목할 지상의 성공을 이루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용의 승천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사탄의 자녀 됨의 증명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의 승천에 올라탑니다.
용의 승천과 예수의 승천
(마가복음 9:5~13)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 그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11. 이에 예수께 묻자와 이르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2.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13.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용의 승천과 예수의 승천>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용의 승천과 예수의 승천’
우리는 용의 승천과 예수님의 승천 중에 반드시 하나를 선택하면서 살아갑니다. 선택은 매일매일 순간순간 범사에 반복됩니다. 용의 승천 대신에 예수님의 승천을 선택한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고 하나님의 자녀다움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시작하기 전에 용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용은 가상의 동물입니다. 따라서 용이 승천하여 도달하고자 하는 하늘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용의 승천은 이 세상에서의 괄목할만한 성취나 성공과 출세로 비유되고는 합니다. “개천에서 용났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열악한 환경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업적과 성공을 이루어 냈음을 뜻합니다.
용이 되기 전의 모습은 이무기라고 합니다. 이무기 역시 가상의 동물입니다. 뿔이 나서 용이 되기를 기다리며 물속에서 몇 백 년을 살고 있는 큰 구렁이가 이무기입니다. 성경에서는 뱀과 용이 모두 사탄을 상징하는 대상입니다. 이사야서 27장 1절을 보면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상징이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용이 사탄이라면 실제로 이 세상에서 성공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은 용처럼 승천하기를 바라는 사탄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용의 승천을 꿈꾸는 것은 사탄의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성공적 해결, 성공적 결말, 성공적 성취를 원하는 마음이 곧 용의 승천을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성공적 결말을 바랍니다. 실제로 성공을 하든 못 하든 그 바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바람자체가 사탄의 자녀임을 드러내는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여기서 아비는 생물학적 아비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귀의 자녀다움의 특징은 용의 승천을 꿈꾸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장사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장사하는 현장에서 용의 승천을 꿈꿉니다. 성공적인 수익을 간절히 바랍니다. 이러한 마음은 장사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당연한 마음처럼 여겨집니다. 장사하는 사람이 성공하기를 바라지 실패하기를 바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은 실은 마귀의 자녀라는 증거를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장사를 하면서도 예수님의 승천을 바랍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승천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이러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주기도를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시작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라면 장사를 하는 사람일지라도 세상에서의 성공이라는 용의 승천을 원하는 대신에 예수님의 승천을 바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예수님을 믿고 산다는 것과 마귀의 자녀로 산다는 것에 대해 피상적인 이해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단순 명확하게 말해서 세상에서 성공을 바란다면 마귀의 자녀입니다. 세상의 기준에 따라서 성공적 결말과 성공적 성취를 바란다면 마귀의 자녀가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러한 마음을 품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10~13절에서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용의 승천 대신에 예수님의 승천을 바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에서의 성공을 바라는 대신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마음이 올라가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려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에 반복하여 믿음의 표현은 예배당이 아닌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는 것임을 강조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용의 승천을 바라는 마귀의 자녀와 예수님의 승천을 바라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은 매사에 갈라집니다. 예배당에 가면 하나님의 자녀이고 안 가면 사탄의 자녀인 것이 아닙니다. 삶의 현장에서 용의 승천을 바란다면 마귀의 자녀이고 예수님의 승천을 바란다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승천하게 되면 세상을 등지고 버리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서의 삶이 방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뜻이 강림하기를 바라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뜻이 강림할 때에 세상의 가치관에서 비롯된 성공이나 실패는 의미가 사라집니다. 그러한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성공이라고 하고 실패라고도 말하겠지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일어나는 현장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떤 식으로 일어나든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감사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큰일 났다고 여기며 걱정하는 순간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감사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잘됐다고 좋아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감사를 합니다. 세상 사람이 안 됐다고 여기든 혹은 부러워하든 일 년 365일 하루 24시간 오직 감사할 뿐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하늘로 승천하고 삶에는 하나님의 뜻이 강림하는 모습을 보며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입니다. 반대로 마음을 땅에 머물게 하고 세상의 가치관에서 비롯된 성공을 바란다면 예수님께서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부르신 것과 같이 마귀의 자녀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사실 어렵고 복잡한 일이 아닙니다. 매사에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승천하기를 바라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생겨서 신경 쓰일 때마다 성공적 결말이나 성공적 해결을 바라지 말고 마음을 하늘로 보내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엘리야에 대한 언급이 세례 요한과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12절에서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다시 온 엘리야는 세례 요한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과 엘리야는 같은 인격체는 아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세례 요한이었고 엘리야는 엘리야였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다시 온 엘리야라 말씀하신 것일까요?
이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먼저 9절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변화산 사건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엘리야에 대한 말씀도 하고 계십니다.
엘리야는 하늘로 승천한 대표적 인물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제외하고 살아서 하늘로 승천한 사람은 에녹과 엘리야뿐입니다. 엘리야는 살아서 불말들이 이끄는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승천하였습니다. 이러한 엘리야의 승천으로부터 예수님이 이루고자 하신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 변화하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이 너무나 좋았던 나머지 인간세상에서 꿈꾸었던 모든 일들을 망각하고 그 자리에서 영원히 살기를 바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자의 마음에서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일들이 단 하나도 좋게 여겨지지 않게끔 만드는 하나님의 좋으심의 기운을 쐬면서 영원히 사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구원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을까요? 지상에서 구원을 이루는 자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좋으심은 영원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의 육체의 눈에는 그 하나님의 좋으심이 가려져 있습니다. 눈으로 보는 대신 마음으로 믿음으로써 그 좋으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세상에서는 다른 좋음을 추구하지 않게 됩니다. 좋음을 추구함에 있어서는 세상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구원을 이루어가는 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을 등지지 못한 채 성공적 결말과 성공적 해결과 성취만을 바란다면 그것은 구원을 이룬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좋으심을 믿음으로 못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좋으심을 믿음으로 보았다면 세상에서 붙들고 싶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이것은 단 번에 이루어지는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좋으심을 믿지만 여전히 세상이 좋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건강하고 오래 사는 것이 좋게 여겨질 수 있고, 돈 많이 벌어서 쓰고 싶은 대로 쓰면서 살아가는 것이 좋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 좋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이 하나님의 좋음 앞에서는 휴지조각 같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로 마음이 가기를 원할 수 있고 또한 실제로 갈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고 하신 이유는 아직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좋으심을 내 것으로 만들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하나님의 좋으심을 눈으로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좋으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 참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변화산의 체험을 나의 것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좋으심에 마음이 닿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이 이루어져야만 되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함구할 것을 당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엘리야를 언급하십니다. 엘리야가 언급된 이유는 말씀드린 대로 바로 엘리야가 살아서 승천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 또한 살아있는 동안에 이루어져야만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동안에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 함을 엘리야를 반복하여 언급하심으로써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엘리야의 승천처럼 하늘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올라타야만 하는 불수레입니다. 불수레이신 예수님을 올라탄다는 것은 곧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세상을 등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적 결말을 바라던 용의 승천을 바라던 자들이 마귀의 자녀 됨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인 자들만이 예수님의 승천을 따라 하늘로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세례 요한을 다시 온 엘리야로 언급하신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세례 요한이 했던 일은 그 이름대로 물세례 즉 침례를 준 것이었습니다. 침례는 물에 빠져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용의 꿈을 가졌으나 용이 되지 못한 존재가 이무기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무기와 같은 상태로 삶을 살아갑니다. 이 세상의 성공적 결말과 성공적 해결과 성취를 바라는 동안 마귀의 자녀가 되어 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삶은 물에 빠져 죽어야 한다는 것이 침례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가져오실 구원의 세계는 땅에서부터 하늘로 길이 뚫리게 될 것입니다. 그 길을 따라서 엘리야처럼 마음을 승천시키기 위해서는 마음이 땅에 붙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자기부인을 강조하셨습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을 보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신 바와 같습니다. 세상에서 용의 승천을 꿈꾸는 나는 부인되어야만 합니다.
삶에서 당면하게 되는 문제에 대해 세상적인 기준으로 해결을 원한다면 마귀의 자식이 된 것입니다.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성공적인 결말과 성공적 성취를 바란다면 용의 승천을 꿈꾸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죽어야만 하는 죄의 상태임을 알고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세상에서 용의 승천을 꿈꾸는 것이 죄인 이유는 최고로 좋으신 하나님을 포기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좋으심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휴지조각과 같은 세상의 좋음을 붙잡으려 한 것입니다. 최고의 좋은 것을 포기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의 정의입니다. 나쁜 일을 저지르는 것은 죄의 결과일 뿐입니다.
이러한 말씀의 의미를 종합하여 살펴보자면 지금까지 우리가 구원에 대해 가졌던 이해 또한 부족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예배당을 구원의 방주로 여겨왔습니다. 예배당에 출석하는 것이 구원의 방주에 올라타는 것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이전 설교에서 말씀드렸듯이 건물로써의 예배당은 구원의 방주도 아니며 예수님의 교회도 아닙니다. 그 건물에 아무리 열심히 출석해도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이라는 불수레와 예수님이라는 구원의 방주를 마음으로 탄 사람들 전체입니다. 예수님이 불수레이고 예수님의 구원의 방주입니다. 그리고 구원이란 이 세상에 발목이 묶이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마음이 승천하지 않으면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3장 13~15절을 보면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대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오신 분이십니다. 이것을 강조하신 이유는 예수님이 가실 하늘로 우리의 마음도 가야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늘로 가는 길을 내시기 위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구원은 마음이 승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면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 마음을 하늘로 보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또한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이는 그를 보는 자마다 승천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게 바로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승천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우리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좋은 것이 느껴지는 마음상태를 유지한 채로 예수님의 승천에도 참여하려고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좋으심을 받아들였다면 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휴지조각처럼 여겨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확인하지 않고 단지 예수님이 승천하셨으니 그 예수님을 부르는 나의 마음도 승천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에서는 여전히 돈이 좋고 건강이 좋습니다. 엘리트 코스를 밟아 출세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세상의 가치를 바라는 상태를 묵인하고 승천을 기대하지만 그렇게 이루어질 수 있는 승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음에서 세상의 가치를 좋아하는 상태에서 하늘로 승천을 한다한들 하늘에는 내가 좋아하는 가치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하늘에는 돈도 없고 학력도 없고 외모의 우열도 없고 권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좋게 여기는 마음상태로 예수님의 승천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승천은 귀양살이고 유배일 수밖에 없습니다. 귀양과 유배가 형벌인 이유는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모든 가치로부터 단절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가치들을 좋게 여기는 상태에서는 예수님을 따라 승천하는 것은 형벌로 여겨지게 됩니다.
종교화 된 기독교가 악을 범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기독교가 해야 할 일은 하늘의 좋음을 믿음으로 느끼게 만들어줄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일을 제거하고 세상이 좋게 느껴지는 상태를 인정하며 그것을 위해 복음을 덧입혀 버렸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의인이 되었음만을 강조합니다. 스스로 의인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세상 것을 좋아하고 추구하는 일에 누구도 제동을 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보다 더 지독하게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뒤에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나 종교가 되어버린 기독교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한강에 돌 던지듯 의미 없는 반향만을 일으키는 사건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따라서 죽고자 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이 가신 하늘을 좋게 여긴다면 서로 하늘로 빠지겠다고 뛰어들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게 하늘로 빠지고자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오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을 따라 승천하는 사람이 없으니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으로써 하늘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에 내려오셨음에도 세상에서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좋게 여기시지 않았습니다. 하늘에 좋음과 비교하자면 어떤 것도 마음을 둘 만한 대상이 없으셨습니다. 그렇기에 부활을 통해 십자가의 사명을 다 마치시고 곧 승천하셨습니다. 이왕 부활하셨으니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을 누려보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좋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세상의 가치를 휴지로 여기시고 하늘로 되돌아가시는 일을 우선시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땅에 남은 제자들과 마가 다락방에 모인 성도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시며 하늘의 좋음을 믿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아내나 남편보다 더 우선적인 현실로 느끼게 하십니다. 이 땅의 어떤 가치도 휴지처럼 느껴질 정도로 하늘이 좋은 곳임을 믿게 하십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하늘이 최고로 좋아서 이 세상을 휴지처럼 여기는 믿음이 생겨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한 믿음이 생기자 전도를 위해 필요한 능력도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능력을 받고자 성령으로 충만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을 무엇보다 좋게 여기는 믿음이 우선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승천하게 되자 삶에는 하나님의 뜻이 강림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유무상통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내 주머니에 있는 돈을 돈 없는 사람에게 거저 준다는 것은 돈을 휴지처럼 여기지 않고는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요즘 코로나19 사태로 나라에서 긴급재난지원금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에는 소상공인을 살리고자하는 분명한 경제적 의도가 있습니다. 돈을 휴지처럼 여겨 거저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에서 유무상통이 일어났던 것은 이들의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승천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제와 기부를 강요할 필요가 없습니다. 헌금과 헌신을 강요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배당에서 교인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마음이 승천해야만 한다는 복음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예배당이 앞장서서 용의 승천을 꿈꾸도록 가르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복음과는 반대되는 일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잘 나가던 사람이 경제적 위기에 처하면 복음으로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패를 두려워한 나머지 자살을 결심하기까지 합니다. 경제적인 실패가 신앙적 실패로까지 여겨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에 올라타야 할 사람들이 용의 승천을 바라며 살아가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바라는 삶의 모습은 어떻게 나타날 수 있을까요? 용의 승천을 꿈꾸던 때에는 돈 문제가 일어나면 세상적인 기준을 가지고 문제가 성공적으로 해결되기를 바랐습니다. 이것이 마귀의 자녀로써의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바라는 자들은 돈 문제를 받아들이는 마음을 부인합니다. 하늘의 좋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돈 문제는 더 이상 문제로 여겨질 수 없음을 믿습니다. 그렇기에 돈을 문제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문제로 여겨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부활과 승천의 길이 됩니다. 매사에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입니다.
자녀에게 문제가 있든, 건강에 문제가 있든 마음은 하늘의 좋음을 믿으며 주님을 따라 승천해야만 합니다. 용의 승천을 꿈꾸기를 멈추고 예수님의 승천을 꿈꾸는 것입니다. 그러면 삶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강림하시게 됩니다. 그럴 때에 세상의 모든 일은 감사할 대상이 됩니다. 세상적인 기준에서는 성공처럼 보일 수도 있고 실패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 성공도 아니며 실패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하시는 모든 일이 감사의 재료들이 될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과 실패를 따지고자 하는 것은 용의 승천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극히 적습니다. 1%가 성공하고 99%는 성공한 용을 바라보는 이무기로 살아가게 될 뿐입니다. 이제는 용의 승천을 꿈꾸는 삶을 끝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꿈꿀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나의 불수레가 되시는 예수님을 올라타고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서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의 승천에 올라타서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승천을 나의 승천으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세상 모든 사람이 용의 승천을 꿈꾸는 이무기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을 바라면서 십자가를 붙잡고 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을 등지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럴 때에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뜻이 강림하여 성공도 실패도 없는 감사만 주어지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