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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2

녹취문: (S) 코로나19는 폭로작전_태승철 (마가복음 1:23~34)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4.07|조회수73 목록 댓글 0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코로나19는 폭로작전>의 줄거리:

'코로나19'는 신종 바이러스지만 실은 오랜 역사를 통해 반복된 하나님의 폭로작전들 중 하나의 이름입니다. 거짓과 속임수의 화신인 사탄과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은 감추기 위해 온갖 작전을 동원하는 반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은 들추어내시기 위한 작전들을 동원하십니다. 사람을 사이에 둔 이 쌍방간의 줄다리기가 치열합니다.


코로나19는 폭로작전

(마가복음 1:23~34)

 

23.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29.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34.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코로나19는 폭로작전>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코로나19는 폭로작전

새벽에 일어나서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 인터넷을 켰습니다. 그리고 뉴스를 살펴보니 영국의 코로나19 사망자가 하루 사이에 708명이 늘어서 총 4,313명이 되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도쿄에서는 확진자가 두 배로 늘어나면서 제2의 뉴욕이 될 수 있다는 일본 의사의 염려도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는 확진자가 21만 명을 넘어섰고 사망자는 4,600명이 되었습니다. 이탈리아는 사망자가 13,000명에 이르고 스페인도 9,000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러한 세계적 재앙 속에서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잘 대응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전 세계의 나라들이 혹독한 어려움에 처해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한편 이러한 상황에서 십자가 복음방송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나누는 우리들은 신앙적 의미에서 코로나19 사태에 가장 잘 대응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주에 코로나19의 하나님 뜻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며 이 사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코로나19 사태에 대해 우리 편에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같은 내용이지만 우리를 기준을 놓음으로써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말씀을 보다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코로나19는 하나님의 폭로작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멸망으로 끌어들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귀신의 작전도 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이에 대응하는 하나님의 작전에 보조를 맞출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초기 사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초기 사역에 대해 귀신을 쫓으시는 것과 병을 고치시는 것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초기 사역의 모습과 현재 우리가 처해있는 코로나19 사태의 공통점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 배후에 귀신이 어떤 작전을 펼치고 있는가에 대해 살펴보고, 이에 대응하여 하나님께서는 어떤 작전을 펼치고 계신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작전이라는 말을 계속 하고 있는데 이 작전은 인간의 마음을 두고 펼쳐지는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인간의 마음을 세상과 밀착시키려는 작전을 씁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되게 하시려는 작전을 쓰십니다. 예수님의 초기 사역의 현장과 우리가 처해있는 코로나19 사태에는 공통적으로 쌍방의 두 작전이 불꽃을 튀기며 충돌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이해함으로써 코로나19 사태에 가장 잘 대응하는 나라에 사는 걸로 만족하지 않고 코로나19에 가장 잘 대응하는 성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3절을 보면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 중에 귀신들린 사람을 섞이게 하는 것이 귀신의 작전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은 말과 행동에서 비상식적이고 특이한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더러운 귀신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물론 귀신 중에 더럽지 않은 귀신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특별히 더럽다고 언급된 이유는 이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행동이 누가 보기에도 해괴망측했기 때문이리라 여겨집니다.

성경에 귀신에 대한 언급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 가다라 지방에 가셨을 때에 쇠사슬을 끊는 힘을 가진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으셨던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17장에서는 변화산 사건 이후에 아이에게 간질을 일으키게 하여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게 하는 귀신을 쫓으신 사건이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귀신이 하는 일이란 이처럼 몇몇 사람을 괴롭히고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사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치고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에베소서 22절을 보면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하였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사탄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시고 성령을 보내시듯이 사탄은 그 졸개들인 귀신들을 보내어 사람을 이끌어 갑니다. 그리고 사탄의 영향력을 받는 상태는 이 세상 풍조를 따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세상 풍조를 따른다는 것은 기이하고 특이한 행동과는 거리가 멉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돈 많이 벌어서 부자 되고 싶고, 남들처럼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형통하고 출세하고자 하는 것이고, 이왕 결혼해서 자녀를 낳았으니 왕자처럼 공주처럼 키우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엘리트 코스로 달리고 싶어 하고 좀 더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가구를 사용하고 좋은 음식을 먹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평범한 삶이라고 여겨지는 모습이야말로 정상이 아닌 사탄의 영의 이끌림을 받아 이 세상 풍조를 따르는 것입니다.

사탄의 작전은 교활합니다. 귀신의 이끌림을 받으면서도 스스로를 정상이라 여기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착각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곳곳에 이상한 행동을 하는 귀신들린 자를 배치한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가버나움에 있는 회당에서 귀신들린 사람이 더러운 짓을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저렇게 더러운 짓을 해야만 귀신이 들린 것이고 나는 정상이라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실제로는 이 세상 풍조를 따라 사는 모든 사람들이 사탄의 영에 이끌림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밀착되어 있지 않는 상태가 비정상임을 못 느끼고 사탄에 이끌리는 상태를 정상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한편 본문 30절부터는 시몬 즉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려있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마가는 이렇게 사탄의 영에 이끌리어 이 세상 풍조를 따르는 상태를 열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는 누구나 열병에 걸려있지만 그것을 정상으로 믿으며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열병을 열심이라 생각하고 열정이라 생각하고 성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열병에 걸린 상태를 열심히 살아간다고 믿는 것은 착각입니다.

마음이 세상과 밀착된 상태에서는 세상에서 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얻고자 열정을 가지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을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은 열병과 화병에 걸린 것이기에 자기소모와 탈진이라는 결과만이 나타나게 됩니다. 반면 하나님과의 밀착은 기쁨과 만족과 평강입니다. 삶은 내가 아닌 하나님의 열정과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나야만 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이 세상 풍조를 따르는 것을 정상으로 여기도록 사람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시는 사건,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시는 사건, 다른 병자들의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으신 사건을 보면 특이한 광경이 나타납니다. 이상하게도 귀신은 예수님을 드러내고자 하고 예수님은 스스로 드러나시는 것을 막으려고 하십니다.

24절을 보면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616절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였던 베드로의 고백과 표현상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귀신의 말에 대해 꾸짖으시며 잠잠하라 명하십니다. 또 본문 43~44절에서도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라고 하시며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나는 것을 막으십니다.

대체 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으려고 하신 것일까요? 또 귀신들은 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언급하면서 소문을 퍼뜨리려 하였던 것일까요? 여기에서 또 다른 귀신의 교활한 작전이 발견됩니다. 그리고 이 작전이 우리가 처해있는 코로나19 사태와도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람들이 세상과 밀착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기 위해서는 성전의 완성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우편에 앉으심에 연합하여야만 합니다. 이 예수님의 동선을 따르지 않는 한 결코 세상과의 밀착은 끝날 수가 없습니다. 이때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세상과 밀착된 상태였고 세상 것을 담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진다는 것은 신앙적인 관점에서는 역효과가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세상으로 끌어당기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제자들과 추종자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의 역할을 주셨습니다. 세상이라는 바다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을 배 위로 끌어올리라는 것입니다.

한편 귀신은 이것과는 반대의 일을 하고자 했습니다. 배 위에 계신 예수님을 세상이라는 바다로 끌어내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능력자이심을 선전함으로써 세상에서 가진 소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 또한 이러한 작전에 말려들고 말았습니다. 목사님으로부터 시작해 모든 교인들이 마음에 세상을 담고 있습니다. 목회의 성공, 수적인 부흥, 풍부한 예산, 커다란 예배당이 모두 세상에서 바라는 것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가치들을 마음에 담은 목사님이 예수님에 대해 설교합니다. 이때에 언급되는 예수님은 이러한 가치들을 이루어주시는 훌륭하시며 능력자이시고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나 어떤 수식어를 붙이더라도 그렇게 언급되는 예수님은 세상가치를 얻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마음에 세상을 담은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교인들도 마음에 세상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에 마음이 낚여서 하늘로 올라가기는커녕 예수님의 이름을 세상으로 끌어내리는 일에 열중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무엇과 밀착을 이루고 있는지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마음이 가족의 형통과 밀착 될 수 있습니다. 건강과 돈 문제에 밀착될 수 있습니다.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음식에 밀착될 수 있습니다. 멋진 취미생활과 밀착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부르는 예수님은 소원을 이루어주실 훌륭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가짐은 예수님의 이름을 세상으로 끌어내리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나의 바람을 이루기 위하여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열병에 걸린 현실입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전 세계의 개신교의 예배당 모임마다 이러한 열병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귀신같이 교활한 사탄의 작전에 예배당이 말려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예배당이라는 단체가 지옥으로 가게 생겼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예배당 모임이 중단된 현실은 이에 대한 반성을 강하게 촉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코로나19를 통해 지금 예배당 모임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폭로하고 계신 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지구에서 살아가는 75억 인구 전체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조차 주관하시는 세상의 주권자이십니다. 따라서 코로나19 또한 하나님이 모르는 곳에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우리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따라서 코로나19 사태에 대한 이유가 바로 우리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주된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사탄의 작전에 말려들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세상과 밀착된 상태에서 하나님을 훌륭하시다 부릅니다. 그러는 동안에 하나님의 이름은 이 땅으로 끌어내려지게 되었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이름은 마음이 예수님께 낚여서 하늘로 올라간 자들이 불러야만 합니다. 그런데 예배당에 모여서 정상이라는 착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코로나19 사태는 이러한 문제를 가진 예배당 모임에 대한 하나님의 폭로작전입니다.

 

이 비정상적인 상태를 폭로하시려는 하나님의 작전은 특별히 질병과 장애에서 절정에 달하게 됩니다. 말씀드렸듯이 귀신의 작전의 교활함이란 특이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귀신들린 사람으로 여기게끔 함으로써 마음이 세상과 밀착하고 있음을 비정상으로 여기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일을 하신 이유는 이제 귀신들린 사람대신 성령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자신이 비정상이라는 것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사람을 불쌍히 여기셨음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귀신을 쫓으신 것은 아닙니다. 회당의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귀신을 쫓으신 것에는 합당한 목적이 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과의 차이점을 보고 자신을 정상이라 여기는 삶을 멈추고 이제는 성령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자신이 비정상임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본래 계획하신 인간의 온전한 모습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봄으로써 본래 인간의 모습과는 동떨어지게 된 비정상의 모습을 자각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예수님을 본보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세상권력에 굴복하고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세상은 돈 없는 사람을 패배자 취급합니다. 세상은 병들고 나약한 사람을 하나님께 벌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결코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와 관련하여 오늘 본문에서는 질병과 장애가 하나님의 폭로작전의 도구로 사용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질병이나 장애는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들춰내시려는 폭로작전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세상과 밀착을 이루었다는 것은 세상을 첫 번째 관심사로 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여기고, 그것이 이루어져야만 기쁠 수 있다고 믿어집니다. 그러나 귀신의 작전대로 마음이 이 세상과 밀착된 상태는 이른바 고장 난 상태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88절에서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정상상태를 위해서는 육체의 질병이나 장애를 허락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시 되는 것이 바로 마음이 병에 걸린 상태입니다. 예배당에 모여서 세상의 일들이 잘되기만을 간구하는 상태야말로 가장 지독한 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상태를 정상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되지 않고 세상과 밀착된 상태를 정상으로 생각하는 이들을 깨우치시기 위한 작전이 질병과 장애로 나타나게 됩니다. 질병은 영어로 디스오더(disorder)로써 질서(order)가 깨어져버린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의 문제를 지적하시기 위해 몸에 질병과 장애를 허락하십니다.

 

이에 대해 납득이 안 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질병과 장애는 죄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 배웠기 때문에 낫는 것을 목표로 했고 치유의 은사를 사모했습니다. 물론 이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질병과 장애는 죄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다만 여기서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은 죄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죄는 바로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되지 않고 세상과 밀착된 상태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질병과 장애는 죄를 밝힌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죄가 있는데도 질병과 장애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문제입니다. 질병과 장애가 죄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면, 문제가 되어야 할 것은 질병과 장애라는 현상이 아닌 죄라는 본질입니다.

내 마음이 비정상적인 상태임을 전제로 한다면 육체의 질병과 장애가 있는 편이 좋은 상태인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되지 않고 세상과 밀착된 비정상적인 상태임에도 육체에 아무런 질병도 장애도 없다면 정말 무서운 저주를 받은 것이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질병과 장애는 세상과 밀착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향한 경종이며,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시기 위한 폭로작전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7절에서 평생을 따라다닌 고질병을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 사탄의 가시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도 끝에 깨달음을 얻은 사도 바울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9절을 보면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사탄의 가시로만 여겼던 질병이 실은 하나님의 충분한 은혜였던 것임을 깨닫자 오히려 크게 자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시는 한 권사님이 2년 째 한 쪽 눈이 망막박리증상으로 고생하고 계십니다. 이 기간 동안 몇 번이나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움직이지도 못하시고 고생을 하고 계십니다. 제가 그 권사님을 위해 기도를 하다 마음에 깨달음이 하나 생겼습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하는 일이 이토록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237절에서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시며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곧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권사님은 제가 아는 분들 중에서도 십자가 생활화를 특히 잘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분께서 장애로 고통 받으시는 이유를 가르쳐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자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만큼 하나님과 가까운 것으로도 아직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조금의 틈새도 없이 하나님과의 밀착을 이루기 위해 한쪽 눈의 망막을 떨어뜨리셨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망막과 수정체가 일체가 되듯이 하나님과 마음이 일체가 되어야 함을 드러내시기 위해 이러한 장애를 주셨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코로나19는 감사해야 할 은혜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마음에 세상 것을 담은 상태로 하나님과의 밀착은 생각지도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배당에 모여서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와 명분과 신학적 철학까지도 오류투성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이러한 오류를 지적해주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의 밀착을 위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귀신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십자가를 등지게 합니다. 훌륭한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비롯한 어떠한 하나님의 속성을 부를지라도 세상가치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킵니다. 십자가를 등지게 함으로써 마음이 세상에 밀착되어 있는 상태를 정상으로 여기게 합니다. 이러한 예배당 모임이 어느 곳에서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사태의 핵심은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세상과 밀착된 마음으로 사는 세계로 끌어내린 것에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코로나19 사태에 대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대응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신앙적으로도 이에 못지않은 훌륭한 대응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생활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철저하게 유지해나감으로써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과 밀착을 이룰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 명만 있었더라도 멸망을 피할 수 있었고, 기드온에게 오직 삼백 용사만이 필요했던 것처럼, 십자가 복음방송을 듣는 분들이 하나님과 철저한 밀착을 이룸으로써 코로나19가 진정될 수 있는 국면으로 접어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십자가 생활화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전 세계의 정부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이 코로나19 사태의 열쇠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생활화를 지속해나갈 때에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고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까지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사태의 변화를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눈의 망막과 수정체가 밀착되어야 하듯이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하나님과 우리 마음의 밀착을 이루는 것만이 코로나19 사태의 해결을 위한 유일한 방법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코로나19 사태는 세상과 밀착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이름을 세상으로 끌어내리려는 우리의 죄악 된 마음을 들춰내시는 하나님의 폭로작전입니다. 이 은혜에 올바르게 응답하기 위해서 십자가 생활화에 목숨을 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불쌍히 여겨주시고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하나님께서 알려주시고자 하시는 은총의 메시지를 바로 깨닫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과의 밀착을 위해 십자가 생활화에 목숨을 걸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이 땅의 삶은 하나님의 열정과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하나님의 주권이 책임지심을 믿고 조금도 염려하지 않고 하늘을 향해 주님을 따라 질주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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