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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2

녹취문: 복음적 부부관계가 드문 이유_태승철 (마가복음 10:1~12)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5.27|조회수63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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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복음적 부부관계가 드문 이유>의 줄거리:

예수님 당시, 가부장적인 분위기 속에서 부부관계의 성립과 유지를 위한 주도권을 쥐고 있던 남자들에게 아내를 버리는 일은 식은 죽 먹기만큼 쉬운 일이었고 그래서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여성의 권리가 대등해진 지금 역시 이혼은 마찬가지로 빈번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한 번 물어봅니다. 복음적인 부부관계란 과연 어떤 것일까요?


복음적 부부관계가 드문 이유

(마가복음 10:1~12)

 

1.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4.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10.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물으니

11.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복음적 부부관계가 드문 이유>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복음적 부부관계가 드문 이유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의 요지는 이혼이 옳은가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모세의 가르침을 통해 반문하십니다. 다만 우리는 오늘 본문의 주제를 이혼에 국한시키기보다는 포괄적으로 부부관계의 문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실제로 이혼하지 않았어도 마음으로는 열두 번이라도 이혼을 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부부가 많이 있습니다. 인간관계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남보다도 못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법적으로만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경우 또한 많습니다. 그렇기에 실제로 이혼을 하느냐 마느냐에 앞서 복음적 부부관계의 정석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복음적 부부관계에 대해 알고 실천할 수 있다면 이혼까지 갈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결과적으로 이혼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다만 이 말씀의 진짜 의미는 이혼을 하고 싶어도 참고 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복음적 부부관계의 중요성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복음적 부부가 무엇인지를 알고 살 때에 온전한 부부관계도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령 이혼하지 않더라도 복음적 부부관계를 이루지 못한 채 살아간다면 이혼한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본문을 살펴보기에 앞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모세는 신명기 241절에서 이혼의 규정을 정하며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 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물론이고 당시의 이스라엘 사회의 남성들은 이 말씀을 곡해하여 이혼을 식은 죽 먹기처럼 여겼습니다. 아내가 마음에 안 들면 이혼 증서를 주어서 쫓아내기 위한 도구로 삼았던 것입니다. 당연히 재산의 분할이나 자녀양육권에 대한 배려는 일절 없었습니다. 여성의 인권이 굉장히 낮았던 시대였습니다.

결과론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이 문제의 원인이 모세에게 있다고 보여 집니다. 남성위주의 사고방식 즉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혔던 모세의 가르침을 따른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의 가르침은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가부장적인 사회분위기 속에서 여성은 학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이혼을 못하도록 율법으로 정해두었다면 여자는 미워하는 남편의 학대로부터 평생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모세는 이러한 부조리한 일들을 막기 위해 이혼을 허락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모세의 의도를 아셨기에 남성위주의 이혼을 언급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5절에서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라고 하십니다. 당시 사회에서 아내의 허물이 아니라 남편의 완악함 때문에 이혼의 문제가 주로 발생하고 있었음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세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말씀을 요즘 시대에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요즘은 가부장적인 분위기도 대부분 사라졌고 이혼에 대해서도 어느 한쪽의 허물이나 완악함을 원인으로 지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러한 세태이기에 완악함은 더욱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될 문제가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주로 남자에게서 완악함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지금은 남녀 모두에게서 완악함이 나타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시대에 특별히 여자가 남자보다 선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가부장적 분위기에 의해 여자의 완악함은 드러날 기회가 적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지적하고 계시는 완악함은 남녀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6~9절에서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한 몸이 된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흔히 부부의 미덕은 일심동체 즉 한 마음 한 몸이 되는 것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하나 됨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하지 않으시고 한 몸이 되는 것으로 부부의 정의를 국한시키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본래 디자인하신 인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부부란 몸은 하나 되어야 하지만 마음이 하나 되어서는 안 되는 관계인 것입니다.

이는 곧 남편이든 아내든 마음은 서로가 아닌 다른 대상을 향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다른 대상이 배우자 외에 다른 이성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배우자보다는 자녀에게 또는 사업에 마음을 두라는 내용도 아닙니다. 부부가 몸으로는 하나가 되지만 마음이 하나 되어야 될 유일한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부부의 마음은 각각 하나님과 일심을 이루어야지 결코 부부간에 한 마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완악함의 의미 또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일심이 되지 못하고 몸을 따라 배우자와 일심동체가 되는 것이야말로 부부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완악함입니다.

여기서 왜 마음이 몸을 따라갈 수 없느냐는 반론을 제기 할 수 있습니다. 몸이 가는 곳에 마음이 가는 것은 인간으로써 당연하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간 본연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몸과 마음의 방향이 따로 존재하도록 지으셨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몸을 따라가는 것이야말로 완악함의 표출입니다. 이 완악함이 부부관계에서 나타날 때에 부부관계는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창조주 하나님의 의도를 염두에 둔다면 결혼하는 부부에게 해주는 세상의 덕담들은 오히려 저주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제일 무서운 말은 일심동체, 잉꼬부부로 살라는 말일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한 글을 보았습니다. “일심동체의 환상에 빠지면 서로가 다르다는 사실을 용인하기 어려워지고 상대가 타자임을 무시하는 행동이 나타날 수 있다. 부부일심의 맹신이 정반대로 부부갈등을 초래하는 원인이 된다. 부부관계가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일심동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서 부부는 이심이체임을 인정해야 한다.”라는 내용입니다. 본문 말씀의 의도와 얼핏 비슷한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또 다른 내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부부관계는 일심동체도 아니고 이심이체도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이심일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은 따로 몸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부가 한 몸을 이루기를 포기한다면 동거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의도를 반영한 부부관계란 복음적 부부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완악함으로 인해 복음적 부부를 찾는 것은 어렵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완악함이란 마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고, 몸이 향하는 곳에 마음도 향하는 완악함은 중단되어야만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복음적 부부의 관계도 이룰 수 있어야만 합니다. 복음적 남편이 되고 복음적 아내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우편까지의 동선입니다. 예수님의 동선이 복음인 이유는 땅에 살고 있는 우리의 마음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보낼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동선을 따를 때에 마음으로 하나님과 밀착하고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항상 감탄을 일으키는 놀라운 사건일 수밖에 없습니다. “! 땅에서 하나님께 도달하는 길이 생겼네. 이제 내 인생은 폈다.”라는 느낌이 늘 존재해야 합니다. 다만 복음이 오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 땅의 문제를 해결하고 고지를 향하는 길이 생겼네. 땅에 사는 동안 내 인생은 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반드시 마음은 몸과 분리되어야만 합니다. 복음은 몸이 있는 땅이 아닌 하늘로 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적 부부라는 표현은 이러한 이해를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복음적이라는 말은 마음이 예수님이 만들어 놓으신 하늘 길 위에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의 방향이 다를 수 없다면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몸과 떨어지는 것은 복음의 필수불가결의 조건입니다. 이러한 개념을 제대로 가르치고 배울 때에 복음은 온전히 수용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자 한다면 몸 따로 마음 따로의 삶이 되어야 한다. 마음은 결코 몸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마음가짐은 지켜져야만 합니다.

골로새서 211절을 보면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할례가 의미하는 바는 마음에서 육체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육체가 가는 곳에 마음이 가고 머무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육체와 마음이 따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통해 보자면 부부관계 또한 결코 일심동체를 지향할 수 없습니다. 잉꼬부부로 사는 것은 부부의 미덕처럼 여겨지지만 신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죽을 때까지 잉꼬부부로 살았다는 것은 기이한 변태적 관계가 유지되었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죽을 때까지 잉꼬부부로 살아가는 부부는 실질적으로 거의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완악함을 기준으로 이루어진 관계이기에 행여 바람직해 보일지라도 실제로 올바른 관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몸 따로 마음 따로는 복음적 부부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부관계 뿐만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이는 핵심적 조건입니다. 풍랑만난 배 위에서 깊은 잠을 주무신 예수님께서는 몸 따로 마음 따로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몸은 풍랑만난 배 위에 있었지만 마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품안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몸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곧 완악함입니다. 몸이 풍랑 속에 있었고 마음도 몸이 있는 곳에 딸려 들어가 걱정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일어나는 풍랑들을 마주할 때에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이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문제 때문에 죽겠다는 기분이 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완악해서 몸이 처한 상황에 따라 들어가고 있기에 죽겠다는 기분이 드는 것입니다.

이와 대비되는 사건이 바로 변화산 체험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의 몸은 여전히 살아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하신 예수님을 마주하자 인간세상에서 좋다고 여겼던 모든 일들을 망각하게 됩니다. 마음이 몸과 떨어져 하늘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몸 따로 마음 따로의 상황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현장에서도 몸 따로 마음 따로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몸은 땅에서 뭇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하늘에 올라가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자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되었고 오히려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의 죄가 용서받기를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몸 따로 마음 따로의 전형적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는 비단 예수님이나 스데반 집사님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현상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파하던 사도들이나 복음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에게서 수도 없이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이러한 복음을 제대로 접하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몸을 따라 가는 완악함을 묵인한 채 복음을 전하였고 받아들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전한 복음도 무효이며 받아들인 복음도 무효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몸 따로 마음 따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복음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박국 317~18절을 보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이 또한 몸 따로 마음 따로의 대표적 고백입니다. 없다는 말이 여섯 번이나 반복되었던 것처럼 하박국 선지자의 몸이 처한 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게 하자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부부관계에 적용해보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남편이 돈을 못 벌어서 살림이 넉넉지 않을지라도, 구박만 하는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지라도 부부관계는 하나님으로 즐겁고 기쁠 수 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서의 말씀을 반대로 해보면 말씀을 적용하기가 더욱 쉽습니다. “비록 무화가나무가 무성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많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있고 밭에 먹을 것이 많고 우리에 양이 있고 외양간에 소가 있을지라도 /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고 하는 것이 몸 따로 마음 따로의 삶이 철저하게 적용되었을 때에 나타날 수 있는 모습입니다. 모든 것이 없어도 하나님으로 즐거워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이 있을 때에도 하나님으로만 즐거워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몸이 처한 환경에 마음이 영향을 받는다면 완악함의 증거일 뿐입니다.

부부관계가 어려운 이유도 이 완악함 때문입니다. 흔히들 돈이 없으면 부부관계도 험악해지기 마련이고 돈이 많으면 부부관계가 원활해지리라 생각합니다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의 완악함이 존재하는 한 부부관계는 돈의 유무와 관계없이 원활해질 수가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 누가 더 돈을 차지할 것이냐를 문제시하고 신경전을 벌이기 십상입니다.

 

이 복음적 삶은 부부관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대통령이라면 복음적 대통령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몸이 대통령 자리에 있다고 마음까지 대통령자리를 향한다면 완악한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은 몸이 아닌 하늘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공무원 판사 검사 변호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벌도 돈이 있다고 해서 마음까지 돈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마태복음 1923절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마음을 하늘로 보낼 수만 있다면 부자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이 쉽지 않습니다. 몸이 돈에 파묻혀 있는데 마음이 돈과 떨어지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부부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적 관점에서 부부관계는 결혼서약부터 다를 수 있어야 합니다. 검은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당신만을 사랑하겠다는 서약은 신앙인에게는 필요 없습니다. 완악함을 극대화시키는 삶을 살자는 서약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서약은 듣기는 좋아도 실질적으로 이렇게 살아갈 부부는 한 쌍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완악함을 가지고도 일심동체 잉꼬부부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변태적인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의 마음에서 이루어져야 할 서약은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당신에게서는 절대로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절대 나를 행복하게 할 의무나 책임을 질 필요도 없습니다. 몸은 하나가 되지만 마음은 늘 하나님을 찾아가겠습니다. 당신도 반드시 마음은 하나님께로 가야만 합니다. 대신에 하나님으로 생긴 기쁨과 만족을 날마다 당신에게 표현하는 삶을 살아가겠습니다.”라는 서약이 이루어질 때에 복음적 부부관계는 이루어져 갈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럼으로써 사랑하든 미워하든 몸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는 잘못된 부부관계는 사라질 수 있습니다. 결혼뿐만이 아닙니다. 복음은 삶의 모든 관계에 적용되어야만 합니다. 몸과 마음은 따로 가기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사건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복음적 부부되기가 어려운 이유는 몸이 하나 된다는 밀접한 관계의 특성 때문입니다. 마음이 배우자에 의해서 좌우되기가 쉽습니다. 아내와 남편으로써의 역할이 마음이 하늘을 향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이러한 부부관계만큼 복음적이기 어려운 것이 복음적 환자 되기입니다. 몸에 고통이 있으니 마음이 몸의 고통을 무시하고 몸을 떠나 하늘을 향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스데반 집사님은 대체 어떻게 죽음에 이르는 고통 속에서도 하늘을 향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우리가 병으로 겪을 수 있는 고통이 심하다고 하지만 머리를 돌로 찍는 고통보다도 심한 경우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은 그러한 최악의 상황에서도 마음에서 평강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마음을 몸에 붙였다면 고통을 당하는 억울함과 분노를 견딜 수 없어 피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님은 억울하거나 분노하기는커녕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의 죄가 용서받기를 구합니다.

대체 어떻게 육체와 마음의 연관성을 끊을 수 있었던 것일까요? 마음이 몸을 완전히 떨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몸과 따로 떨어지는 것은 몸을 공해상에 팽개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몸은 하나님의 주권에 맡겨지게 됩니다. 그렇기에 베드로 또한 참수형을 앞두고 두려워하지 않았고 천사가 와서 옥문을 열고 발로 차며 깨울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있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도 죽도록 맞고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걱정하기는커녕 찬송하였을 뿐입니다. 오히려 지진이 일어나 감옥문이 열렸을 때에도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고 자신들을 지키던 간수를 위로하고 복음을 전합니다. 베드로나 바울이나 실라는 결과적으로 모두 스데반 집사님과 마찬가지로 순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순교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은 몸을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항상 십자가에서 시작되어 하늘로 향하신 주님의 동선을 따랐고 하나님과 일심됨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복음적 인간됨을 유지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적 삶은 순교 때에만 발휘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관계에서도 복음적 삶은 적용되어야만 합니다. 배우자가 전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복음적 부부가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나부터 복음적 아내가 되고 복음적 남편이 된다면 완악함의 관계는 끊어지게 됩니다. 단순한 부부관계가 아닌 선교사와 선교 대상자의 관계로 변하게 됩니다. 믿지 않는 배우자를 선교의 대상으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선교사로써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몸 따로 마음 따로의 복음의 삶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기쁨과 만족과 평강을 배우자 앞에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몸은 하나님의 주권이 책임지심을 믿고 마음은 몸을 떠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죽든 살든 돌에 맞아 죽든 암에 걸려 죽든 몸의 상황은 마음으로부터 팽개쳐버려야 합니다. 마음이 몸을 팽개칠 수 없기에 하나님과의 밀착 또한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우리가 함께 기도해야 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몸 따로 마음 따로의 삶을 위해 마음에서 몸을 팽개칠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몸이 어떤 상황에 처하든 마음의 평강과 행복이 깨지지 않고 스데반 집사님처럼 될 수 있도록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에 전념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께서 십자가로부터 보좌 우편까지 놓으신 길을 따라 마음이 몸과 떨어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몸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 들어가게 하시고 마음은 날마다 순간마다 하늘을 향하는 복음적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배우자와 관계할 때에는 복음적 부부관계를 이루게 하시고, 사회에서는 복음적 사회관계를 갖게 하시고, 친구와는 복음적 교우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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