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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나라, 아빠엄마 나라>의 줄거리:
선민이 하나님을 관계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살기도 하고 들어가기도 하는 것과 어린아이들이 아빠와 엄마를 관계하며 아빠 엄마에 의해서 조성된 환경에서 사는 것 사이에 비유가 성립한다고 하십니다. 믿으면 구원 얻습니다. 이 말씀을 다시 쓰면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하듯이 다 큰 성인이 하나님에게 하면 구원 얻는다,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 나라, 아빠엄마 나라
(마가복음 10:13~16)
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 아빠엄마 나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 나라, 아빠엄마 나라’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 중에는 어린아이를 동반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당시에는 랍비가 어린아이들에게 안수하고 축복하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어린아이들을 꾸짖었고 이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노하시며 꾸짖으십니다.
물론 제자들은 풍습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부모들이 안수를 받기 위해 아이들을 데려오는 일을 꾸짖었던 이유는 예수님을 평범한 랍비라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다윗 왕국의 재현이라는 어마어마한 과업을 이루실 분으로 믿었습니다. 이러한 과업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철부지 어린아이들과 만나시는 것은 시간낭비일 뿐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노하시고 꾸짖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과업과 연관 지어 생각한다면 어린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속성은 꼭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될 수 없다면 예수님의 과업은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본문의 말씀을 통해 드러내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과업은 바로 이 땅으로부터 하늘로 들어가는 길을 내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몸이 어떠한 상태에 있든지 마음은 예수님이 만드신 길을 통해 지금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의 속성이 필요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오늘 말씀에 맞추어 해석해보자면 어린아이의 마음을 갖지 못한다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의 속성이란 무엇일까요? 15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받든다는 표현이 나타납니다. 받듦이 의미하는 어린아이의 속성이란 무엇인가 특정한 대상을 마주대할 때에 나타납니다.
양들에게 목자가 필수적인 존재이듯이 어린아이에게는 부모가 필수적인 존재입니다. 같은 사건에 대해 누가복음에서는 갓난아기를 가리키는 단어가 사용되었고, 본문에서는 12살 미만의 아동을 가리키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곧 특정한 연령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 의존하는 특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엄마아빠가 필수적인 대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이 엄마아빠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날 수 있어야만 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입으로 아무리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지라도 엄마아빠를 대할 때와 같은 마음가짐이 나타날 수 없다면 하나님 나라에는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엄마아빠에게 갖는 속성은 절대적 신뢰입니다. 이러한 표현이 다소 추상적이기에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그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적용시켜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삶의 환경이나 조건은 마음을 좌우하지 못합니다. 어린아이가 살아가는 환경은 아이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엄마아빠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 환경은 왕궁일수도 있으며 초가삼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환경자체는 아이의 마음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어린아이는 엄마아빠만 있으면 마음이 채워집니다. 환경이 좋고 나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어른들이 볼 때에는 전혀 다르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난 아이가 더 행복하리라 여깁니다. 그러나 정작 아이들은 엄마아빠가 있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마음이 이미 엄마아빠로 가득하게 채워져 있기 때문에 주어진 환경이 금수저든 흙수저든 마음에 들어오질 못합니다. 이것이 절대적 신뢰의 핵심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연말에 파티를 하게 되어서 사장님 가족도 참여하고 과장님 가족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두 가정에는 모두 세 살 된 아이가 있었습니다. 아빠가 사장님이라고 해서 아이의 마음이 더 채워지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아빠가 과장님이라고 해서 아이의 마음이 덜 채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아빠의 사회적 직책은 이 아이들의 마음의 채움에 대해서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이사 등을 통해서 삶의 환경이 바뀌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낯선 새 집이 어색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나면 곧 두려워하지 않고 놀이를 찾으며 돌아다니게 됩니다. 부모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있기에 환경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모만을 바라보는 시절의 아이들에게는 주어진 환경이 부촌이든 전쟁터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대포소리가 울리는 환경에서도 엄마아빠의 품에 안긴 아이들은 웃을 수 있습니다. 엄마아빠가 있으면 초상집에서도 웃지만 엄마아빠를 잃어버리면 잔칫집에서도 울음을 터뜨립니다.
엄마아빠는 사회적으로는 대수롭지 않은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무능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고 여전히 철이 없습니다. 생각도 판단도 감정도 실수투성이입니다. 아무리 봐도 부족한 엄마아빠이지만 아이들에게는 절대적 신뢰를 보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존재입니다. 최고의 이유식은 고사하고 라면을 끓여서 먹이는 일이 있을지라도 엄마아빠가 있는 곳이 어린아이에게는 나라이고 낙원입니다.
아이가 병에 걸릴 때가 있습니다. 저희 아이가 어려서 감기가 잦았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에 프린스턴에서 LA로 횡단할 때에 도중에 아이가 열이 40도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아이를 보면 열이 나는 상황이 불편해서 울기는 하지만 그 시선이 엄마아빠에게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더욱 품안으로 파고들려고 보챌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져야 될 절대적 신뢰의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엄마아빠만을 필요로 하는 어린아이들에게 삶의 환경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더 나아짐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쟁취, 성취, 개선, 향상, 발전, 진보, 개발 등을 꿈꾸지 않습니다. 이러한 의식은 현재 상황에 대한 불만이나 결핍의 자각을 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힘주어 미래를 향해 질주하는 이유는 지금이 불만스럽기 때문입니다. 신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단어들이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동안에는 항상 기뻐하기나 범사에 감사하기는 물 건너 간 상태입니다.
우리는 “아이는 가정의 미래이자 나라의 미래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정작 어린아이들은 미래에 대한 의식이 없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엄마아빠와 함께 있는 곳이 낙원입니다.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는 것은 엄마아빠이지 아이 자신이 아닙니다. 따라서 자신의 현재를 불만스럽고 결핍된 상황으로 규정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질주하는 속성을 갖는 것은 전혀 어린아이다운 모습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는 하나님 나라에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노하셨던 이유는 제자들의 마음가짐이 세상의 어른들과 판박이였기 때문입니다. 엄마아빠의 손에 이끌려 예수님께 찾아온 어린아이들과 같은 마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판박이로 그대로 옮겨지지 않으면 구원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대단한 일을 하셔도 어른의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모든 일은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어린아이들과 같은 마음상태를 우리에게로 가져오면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어린아이의 삶이 부모에 의해 결정되듯이, 선민의 삶은 항상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스스로 삶의 환경에 대한 개선이나 변화나 발전이나 향상 등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주권자 하나님에 의해서 지금 주어진 환경에 대해 개선이나 변화나 발전이나 향상 등을 꾀하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의식은 엄마아빠에게 절대적 신뢰를 보내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는 성인의 마음가짐이기 때문입니다. 성인의 마음가짐으로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기는 지금의 상황을 부정하는 동안에는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개선하고 발전하고 변화시키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지금 기뻐하고 감사할 수는 없습니다. 기쁨과 감사는 더 나아진 미래로 유보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엄마아빠와 함께 있는 기쁨을 미래로 유보시키지 않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우리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연년생의 세 자녀를 둔 젊은 부부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맏이가 네 살이고 둘째는 두 살이고 셋째는 한 살입니다. 이분들이 20평 아파트에 살았는데 다섯 가족이 되다보니 집이 너무 좁게 느껴져서 30평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아이들은 20평에 살 때에도 좁다고 느낀 적이 없었고 30평으로 이사하고도 특별히 넓다고 느끼질 못합니다. 20평에 살 때에도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엄마아빠뿐이었고, 30평에 살면서도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엄마아빠뿐입니다.
우리의 마음 또한 이와 같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지금 20평에 살더라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나의 곁에 계시냐는 것입니다. 30평에서 쾌적한 삶의 환경이 주어지더라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내 옆에 계시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절대적 신뢰가 표현되는 삶의 모습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있어서 환경은 기쁨과 만족에 대해서는 아무 영향이 없습니다. 금수저 가정에 태어나도 금수저인 것으로 기뻐하거나 만족하지 않습니다. 흙수저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도 흙수저라서 슬퍼하거나 불만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관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돈 없어서 인상 쓰는 것은 어린아이의 마음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는 초가삼간에 살지라도 엄마아빠만 있으면 웃을 수 있습니다. 엄마아빠가 입에 넣어주는 것을 먹습니다. 국수를 먹든 밥을 먹든 배가 부르고 엄마아빠만 있으면 됩니다. 우리 또한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갖고 구원을 이룰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어린아이들이 부모에게 갖는 절대적 신뢰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가질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무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의 곁에 와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 절대적 신뢰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유전적으로 우리 속에서 육체와 함께 체질이 되어버린 죄 때문입니다. 이 죄의 힘이 지배하는 동안에 우리는 자꾸 성인이 되고자 합니다. 주어져 있는 환경에 대해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부족한 점을 찾고 변화와 개선과 향상을 꾀하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세 아이가 있는 가정에서 아이들이 20평에서 30평으로 이사하는 것을 희망한 적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잘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신경 쓰는 것은 엄마아빠의 역할입니다. 변화의 의식은 아이가 아닌 부모가 가져야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 대해 변화와 개선과 향상과 개발 등을 꾀해야 하는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미 모든 계획을 다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유전 죄를 가진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 아버지를 절대로 믿지 못합니다. 지금 기뻐하고 감사하는 대신에 지금 비판하고 결핍을 느끼면서 기쁨과 감사는 개선된 미래로 미루어버립니다. 재정 문제, 건강 문제, 진로 문제 등이 이러한 비판과 결핍에 해당됩니다. 삶에서 어떤 문제가 생길 때에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란 “지금 이런 문제가 발생하니 다음에는 더 열심히 해야 되겠다.”가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유전 죄로 인해 하나님을 신뢰 할 수 없기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 될 자격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의미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나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자리에 나의 마음이 포개질 때에만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는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자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관계할 수 있는 유일한 지점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인정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은 어린아이들과 같은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환경이 어떻든 엄마아빠로 인해 기쁨과 만족을 느끼고 평강을 누리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환경과 삶의 조건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나게 됩니다. 엄마아빠가 어린아이들의 삶의 환경을 책임지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주체적으로 결정해나가시게 됩니다. 삶은 우리가 상관할 영역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벌어지는 범사에 감사할 뿐입니다.
아이가 간장에 국수를 말아줘도 맛있게 먹고 때로는 밥에 고기를 줘도 맛있게 먹습니다. 그리고 배가 부르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또 다른 기쁨이나 만족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음을 인정할 때에 이와 같은 일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살아계시며 주권적으로 주도해나가실 것입니다. 마음에서 세상은 버려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이 엄마아빠의 나라에서 살아가듯이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어린아이들이 엄마아빠에게 보이는 절대적 신뢰를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보일 수 있게 하여주옵소서. 엄마아빠의 나라에 사는 아이들처럼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 나라의 삶을 여생동안 지속해 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