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매일 헐값에 영생 팔아 사는 삶>의 줄거리:
모든 것을 다 팔아서라도 반드시 가져야할 것이 영생입니다. 변화산 위의 베드로가 예수님에게서 발산되는 하나님의 빛을 쐬고는 산 아래 모든 것을 다 망각한 채 그곳에서 영원히 살고 싶어 하던 바로 그 마음으로 영생을 갈망함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일 너무 사소한 헐값에도 아무런 주저함 없이 영생을 팔며 삶을 살고 있습니다.
매일 헐값에 영생 팔아 사는 삶
(마가복음 10:23~27)
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6.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27.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매일 헐값에 영생 팔아 사는 삶>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매일 헐값에 영생 팔아 사는 삶’
예수님께서는 23절에서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허투로 말씀하시는 적이 없으시기에 우리의 겁 없는 태도가 문제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들으시는 분들께서도 부자 즉 재물이 많은 상태를 심각한 문제로 여겨 본 적은 없으실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은 재물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원인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문제는 재물에 대한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요점은 재물과 마음의 관계입니다. 마음이 재물에 붙어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전 설교에서 말씀드린 대로 기독교 신앙은 몸 따로 마음 따로가 되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다른 방향을 향할 수 있어야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몸과 마음이 같은 방향을 향하도록 만드는 대표적 원인이 재물입니다. 재물이 많은 경우에 마음은 예외 없이 재물에 붙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몸 따로 마음 따로가 되지 않으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도 어렵습니다. 그 어려움이 어느 정도인지 예수님께서는 25절에서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은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간 뒤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았습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청년들이 세상에서 추구할 만한 쾌락을 누리고자 하지는 않았습니다. 참으로 기특하게도 영생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을 요즘에 빗대어보면 얼마나 기특한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최고급 슈퍼카를 타고 다니면서 클럽을 누비고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들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영생을 얻고자 스승을 찾아다닌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특한 청년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냉담하시기까지 합니다. 많은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초라한 행색의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일은 누구도 할 수 일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청년은 도저히 그렇게는 할 수 없었기에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바늘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립니다. 어떤 해석에서는 예루살렘 성에 정문이 있고 옆에 사람 한 명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는 작은 문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를 고려해보자면 이 바늘귀는 실제 바늘구멍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실이 겨우 들어가는 바늘귀에 낙타를 넣을 생각을 할 수 없듯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영생을 추구하는 마음을 가진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 영생을 추구하게 된 이유는 재물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청년의 마음이 재물과 밀착되었음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것은 청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기특한 마음가짐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처럼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겠다고 머리를 들이미는 장면을 생각해보면 미쳤다고 밖에는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충격을 줍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강남에 사는 부자들은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하더라도 구원받기 어렵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재벌이라면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은 아예 불가능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진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줘야만 한다면 구원을 받아들일 부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제자들도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부요한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 여겼습니다. 재물이 많을수록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것이기에 하나님 나라에도 가깝다고 여겼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쫓았던 이유 중의 하나도 바리새인처럼 되는 것이었습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서 많은 재물을 모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하시니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자들이나 우리가 놀라는 이유는 영생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지난 말씀에 이어서 본문 말씀을 통해 영생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주고 계십니다.
17절을 보면 부자 청년이 찾아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18절에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과 연결되어 계셨기에 하나님의 선하심이 예수님의 인격을 투과하여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영생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의 인격을 투과하시는 상태가 바로 영생입니다.
일반적으로 영생은 죽지 않고 영원히 천국에 머무는 것으로만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생의 결과일 뿐인지 영생의 근본적인 속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영이시며 선하시고 거룩하십니다. 이러하신 하나님이 나의 인격을 투과하여 그 선함을 나타내실 수 있는 상태가 바로 영생입니다. 독자적으로 내 인격이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에서 영원한 속성을 지니고 천국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하늘에서의 모습으로 변하신 예수님을 보고 황홀경에 빠지게 됩니다. 세상에서 꿈꾸던 일들을 까맣게 잊고 그곳에서 살기를 바랐습니다. 다윗 왕국의 재현이나 높은 자리에 올라 많은 재물을 갖겠다는 생각들은 망각되어 버렸습니다. 이때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실 때를 제외하면 언제나 하나님과 연결되어 계신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에게서 흰 빛이 나오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인격을 통과해서 베드로의 눈에 보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독립적인 인격의 분위기와 색깔이 묻어있고 배어있는 하나님의 빛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투과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영생을 얻은 상태에서 영화로운 몸을 입는다고 했습니다. 영화로운 몸은 우리의 인격을 말합니다. 인격은 나라는 의식이 살아있는 마음입니다. 이런 나의 인격을 하나님이 빛이시고 영이신 분으로써 투과하는 상태를 누가 볼 때에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나라는 독특한 인격의 분위기와 색깔이 묻어있는 하나님의 빛을 보기 때문입니다. 태승철은 태승철대로 아름다울 것이고 여러분은 여러분들대로 아름다우심으로 서로의 아름다움에 놀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독특한 분위기와 색깔이 묻어있는 인격을 통과하고 있는 하나님의 빛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너무 아름다워서 서로 기절할 것입니다.
그런데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에 이러한 영생을 얻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울 수 있습니다. 부자 청년을 예로 들자면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이 투과되어야 될 마음이 재물에 달라붙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재물이나 권력이나 건강 등에 달라붙어 있는 동안에는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께서 투과될 수가 없습니다. 이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갔다는 것은 영생을 포기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려고 했던 영생을 팔아버리고 재물을 갖기로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재물은 값진 가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변화산 체험을 염두에 둔다면 재물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순간 잊혀 질 가치에 불과합니다. 사도 바울 또한 유익하게 여기던 모든 가치를 배설물로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청년이 정말로 영생이 무엇인지를 알았다면 마음에 재물을 밀착시킬 수 없는 배설물과 같이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재물을 붙잡자 오히려 영생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마음에 붙을 수 있는 대상은 재물뿐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독자 이삭이 그러한 대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 22장 12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치고자 결단했을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였던 것과 같습니다. 부모에게는 자녀가, 사장님에게는 사업이 마음을 낙타로 만들고 천국의 문을 바늘귀로 만들어버릴 수 있습니다.
며칠 전에 자매님 두 분이 찾아오셔서 십자가 생활화에 대한 간증도 해주시고 상담을 하셨습니다. 그 때에 한 분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하나님을 가질 수도 있지만 너무나도 사소한 일에 매여서 정복되어 버릴 수도 있음을 경험하셨다고 합니다. 마음에 드는 티셔츠 하나를 찾지 못해 며칠이나 인터넷을 뒤지는 동안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티셔츠에 마음을 팔아먹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놀라서 그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이고 나니 그렇게 찾던 것과 비슷한 티셔츠를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일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 십자가 생활화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면 저 또한 용기를 얻게 됩니다.
또 호주 시드니에 계신 형제의 이메일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분은 신장 기능이 약해져서 염분이 들어간 음식을 전혀 드실 수가 없다고 합니다. 저는 특히 짜게 먹는 습관이 있어서 음식을 먹을 때마다 그분이 생각나서 괜히 죄송스러워지고는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십자가 생활화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을 이 분에게 적용해보자면 “몸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온전히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셈입니다. 아픈 몸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부자 청년이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일처럼 어려운 일입니다. 부자 청년은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돌아갔지만, 이분께서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몸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고 계십니다.
사람의 마음은 크고 작은 일에 얽매일 수 있습니다. 티셔츠 한 장에, 건강에, 자녀에, 재물 등에도 마음은 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대상이든 마음이 붙는다면 영생을 팔아 그것을 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제단에 바쳐서라도 영생을 사고자 했지만, 우리는 티셔츠 한 장에도 영생을 팔아버릴 수 있습니다. 마음이 세상의 가치에 달라붙는다면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인격을 통해 투과되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이 말씀과 행동으로 투과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도 예수님과 똑같은 길을 갈 수 있도록 제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과 관련하여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는 특별히 잘못한 일이 없었으나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거지 나사로는 특별히 잘한 일이 없었으나 천국으로 가게 됩니다. 이들의 차이는 재물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뿐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비유에 대해 오해할 때에는 부자가 거지 나사로를 돕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에 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예수님의 의도와는 맞지 않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낙타와 바늘귀의 비유를 떠올려보면 부자가 지옥에 가게 된 이유는 명확합니다. 부자는 마음이 재물을 붙드는 동안 하나님을 투과시킬 수 없었기에 지옥에 가게 된 것입니다. 부자인 것이 문제가 아니라 부자라는 환경이 마음으로 재물을 붙들기 쉽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반대로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나사로에게는 마음을 붙일 세상의 가치가 없었습니다. 몸의 상처를 개가 와서 핥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기에 영생에 들어간 것입니다.
우리는 크고 작은 일에 마음을 빼앗길 수 있습니다. 사소한 티셔츠 한 장에도 우리의 마음은 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소한 일로 인해 빛이시고 영이신 하나님 아버지가 나의 인격을 투과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공생애와 같은 삶의 모습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때에 이미 영생을 살고 계셨습니다. 영생을 주러 오신 분으로써 영생을 살고 계셨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예수님처럼 영생을 누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제자들은 영생이 무엇인지 몰랐기에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말씀에 깜짝 놀랍니다. 영생이 하나님을 투과하는 모습임을 알았다면 놀라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27절에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신다는 것일까요?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게 여겨지는 부자의 구원조차도 능히 이루어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청년은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부자의 재물은 무조건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의 마음이 재물과 밀착되어 떨어질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시고자 이러한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기를 요청하십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면 예수님은 죽으실 이유가 없으시기에 자신에게 죽을 이유가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인정한다면 재물로부터 마음을 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동안에 마음에서는 바통 터치가 일어나게 됩니다. 재물 앞에서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사실로써 인정할 때에 재물에 대한 주권적 입장의 바통 터치가 일어나게 됩니다. 죽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연금을 바라보고 저축을 바라보고 명품 시계를 바라보면서 이것들에 대해 주권을 행사하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뿐이심을 느끼게 됩니다.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봄이 유지되는 가운데 육체의 눈으로 보는 모든 사물에 대해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사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헌금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염려마시고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만 확인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재물에 찰떡같이 붙어있던 마음이 떨어지고, 그 재물에 대해 주인 됨을 행사하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보게 됩니다. 재물이 떨어져나간 마음에는 빛이시고 영이신 하나님이 투과되시면서 눈앞에 보이는 재물을 하나님께서 움직여 가실 것입니다.
재물은 하나님께서 무슨 뜻을 가지고 사용하실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 마리아가 옥합을 깨서 예수님께 부어드린 사건에서 제자들은 그것을 낭비로 여겼습니다. 옥합의 기름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어야 했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 헌신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재물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라고 하셨던 것은 청년의 마음이 얼마나 재물과 붙어있는지를 보여주시고자 하심이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이든지 십자가를 보고 죽은 자의 의식을 가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호주에 계신 형제님께서 건강으로 인해 괴로운 가운데도 십자가를 보고 죽은 자의 의식을 갖고자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 때에 그 몸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권을 행사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이 투과되고 영생이 회복되면 몸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이끄시고 어루만지시고 뜻대로 계획대로 성취해 가실 것입니다.
반대로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한다면 티셔츠 한 장 같이 사소한 것에도 마음은 붙어서 하나님은 투과되실 수가 없습니다. 영생은 중단되고 헐값에 팔리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기에 십자가 생활화에 매순간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눈으로 보는 모든 것들 앞에서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며 죽은 자라는 사실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마음은 분리되어서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께서 나의 인격을 통과하시고 눈으로 보는 모든 것들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영생의 길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낙타 같은 자들에게 천국의 문은 바늘구멍 같았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셔서 나의 죽음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마음이 이 세상의 가치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셔서 영이신 하나님이 통과되실 수 있는 영생의 길을 열어 주셨으니 오늘도 감사함으로 십자가를 붙잡고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