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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지구가 외계, 천국이 본향>의 줄거리: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인자가 왔다 하시고,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을 이루시고 다시 승천하여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언제나 천국이 기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지동설을 따라 사셨는데 우리는 여전히 영적 천동설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지구가 외계, 천국이 본향
(마가복음 10:35~45)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지구가 외계, 천국이 본향>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지구가 외계, 천국이 본향’
마지막 45절에서 주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섬김은 인간에게 가능한 행복의 최고경지입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를 섬기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면 그 자체로 인생은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타인을 섬기기는커녕 나 하나를 주체하지 못합니다. 나 하나의 행복을 담당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행복할 수 없는 이유가 앞서 보았던 45절 말씀 안에 들어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참 귀한 비밀을 담은 구절입니다. 지구에서 태어나 지구에서 살다가 지구에서 죽음으로써 끝나는 사람은 타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섬길 수 없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온전한 기쁨과 만족의 좋음을 느껴볼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섬길 수 없는 이유는 지구에 온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구에서 태어나서 지구에서 살고 지구에서 죽을 것이지만 그 마음이 지구에 온 적은 없습니다. 즉 지구 바깥으로 나가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식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확대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 천국으로부터 오셨고 세상에 계시는 동안 천국을 기준으로 생각하시고 바라보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 천국은 예수님의 본향입니다. 그 본향에서 외계의 별인 지구로 오신 셈입니다.
여기서 외계(外界)란 물리적으로 지구 바깥에 존재하는 천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타워즈 같은 영화를 보면 앞선 문명을 가진 외계인들이 사는 별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비단 영화와 같은 상상력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천문학 물리학을 다루는 학자들도 우주가 무한하기에 생명체가 존재하는 외계의 별이 반드시 존재하리라 예측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우주의 무한함에 경외감을 느끼고 우상시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우주가 무한한 이유는 실은 단순합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상대적으로 체감할 수는 있습니다. 물리적 차원에서 만들어진 우주의 무한함을 보면서 그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의 무한함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인지할 수도 없는 크기의 우주를 만드신 것은 우리 각자가 마음에 모셔야 하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주의 무한함으로 비유되고 상징되는 존재이심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서 티끌만도 못한 나라는 개인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전혀 믿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알았다면 그 하나님께서 나를 이끌어 가심에 대해서는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담도록 만들어졌기에 우주보다 더 크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본론으로 돌아가 우리는 지구에서 태어나 지구에서 살다 지구에서 죽는 입장에서 천국을 외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오신 예수님께는 이 지구가 외계입니다. 지구는 피조물들의 세계로써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거느리고 계신 본향과는 전혀 다른 곳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의 세계인 하늘나라와는 다른 외계이고, 이곳에서 사는 피조물로써의 우리 인간들은 외계인인 셈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늘나라를 본향이라 일컫고, 지구에서의 삶의 여정을 나그네로 일컫습니다. 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소속을 천국 시민권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스스로를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즉 외계의 지구에 속한 자가 아님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또한 외계에 속한 자가 아니게 됩니다. 말씀드렸듯이 외계란 이 지구라는 별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세상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을 구분하십니다. 이방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이방문화와 지구라는 외계의 세상에 살지만 마음의 소속이 천국인 사람들과의 차이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방인이란 지구의 인간세상을 본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주가 무한하기에 다른 생명도 존재하리라는 막연한 상상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반면 선민들은 천국을 본향으로 느끼면서 인간세상인 지구를 외계로 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의 특성을 외계인의 특성처럼 언급하고 계십니다. 지구라는 외계의 별에 살고 있는 외계인들의 두드러진 특성은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특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상상 속의 괴물이 있는데 바로 움직이는 시체인 좀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섬기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내용은 바로 이 외계의 지구로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탈출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은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본문에서 야고보와 요한을 통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에 대해 큰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께서 이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겠다고 하시니 다윗 왕국의 재현이 이루어지리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 중에서 높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하여 선수를 칩니다. 예를 들자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좌의정과 우의정이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38절에서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잔과 세례는 고난의 과정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야고보와 요한은 이 말씀의 의미 또한 오해합니다. 이들은 이 고난의 과정을 예수님께서 로마를 무찌르고 나라를 독립시키고 다윗 왕국을 재현시킬 때에 따라오게 될 정치적 혁명의 어려움쯤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이러한 의미로 말씀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이 잔과 세례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세례를 의미하였던 것입니다. 38절 말씀을 풀어서 해석하자면 “너희가 천국에서 내 좌우편에 앉고 싶거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끝까지 따를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전혀 그러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여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을 합니다. 결국 이들을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다 도망갔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외계인 지구에서 본향인 천국으로 탈출시키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지구를 본향으로 여기는 이방인들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잘 드러내는 상상속의 괴물이 좀비라고 하였습니다. 좀비는 그 자체로 모순적 존재입니다. 살아있는 시체이기 때문입니다.
좀비의 유래는 아메리카 서인도제도의 아이티 섬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민간전승에서 부두교의 마술사들이 죽은 시체를 움직이게 하여 부렸다고 합니다. 이러한 유래를 가진 좀비는 영화 등을 통하여 유명해지자 현대사회의 피폐함을 상징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밀려가는 대로 반복되는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좀비로 상징되고는 합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주시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시고자 한 생명 즉 영생은 영이시고 빛이시고 거룩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이 마음을 투과하여 나타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마음에서 하나님을 갖게 된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에 몸이 만나는 모든 대상들과 이 세상에서의 삶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주권이 표현되게 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원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투과할 수 없는 마음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몸은 살아 움직이나 마음이 죽은 좀비와 같은 상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대신 이 세상의 가치들을 마음에 담게 되었습니다. 지구라는 외계에 존재하는 가치들을 마음에 담음으로써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이 투과되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세상의 가치를 마음에 담자 좀비와 같이 천편일률적인 움직임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움직임의 특성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서두에서 섬김의 마음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높아지려는 마음을 가지고는 타인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높아진다는 것은 섬김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결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천국이라는 본향에서 온 사람만이 타인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섬김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본향으로 여기는 동안에는 결코 섬길 수가 없습니다.
이 외계 지구에서 살아가는 외계인들은 모두 사탄의 마법에 걸린 좀비들입니다.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가치들을 마음에 담고 하나님이 투과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담은 세상의 가치들이 자극하는 대로 몸을 움직여갑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부자 청년은 재물이라는 가치를 마음에 담고 있었습니다. 재물이라는 동기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좀비의 상태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부모가 자녀를 마음에 담고 “내가 이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워서 사회의 역군으로 만들겠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이른바 심사임당의 마음가짐으로 여겨지는 좋은 부모의 표본입니다. 그런데 실은 이것도 좀비에 불과합니다. 마음에 자녀를 담음으로써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을 투과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자녀가 자극시키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좀비가 된 것입니다.
부부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우자가 싫든 좋든 하나님 대신에 배우자를 마음에 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음은 죽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제 마음에 담긴 배우자가 자극하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친구를 만나면 배우자에 대한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수도 있고, 반대로 배우자를 자랑하기 위해 장점을 늘어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과는 단절된 좀비의 상태가 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업가가 마음에 사업을 담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 또한 좀비가 된 것입니다. 마음에 사업을 담고 흑자경영을 위해 노력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투과되지 않음으로써 영생은 사라지게 되고 사업이라는 가치가 자극하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움직이는 좀비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좀비의 상태에서는 결코 누구도 섬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모든 사람의 섬김을 받는 자리에 서려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기에 좀비가 된 상태에서는 기쁨과 만족과 행복이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지금 기쁨과 만족이 없고 행복하지 않다면 섬기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섬기려는 마음이 없게 된 이유는 마음이 본향인 천국에서 지구로 온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구를 외계로 여기기는커녕 본향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중에 세상의 가치를 마음에 담고 움직이는 좀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좀비의 특성은 기쁨과 만족이 없고 불평과 불만을 달고 사는 것입니다.
지금의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과는 다른 더 높은 상태를 계속하여 추구합니다. 본문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보였던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43~44절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좀비와 같은 상태로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음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외계생물이 사람을 숙주로 삼아 조종하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멀쩡해보여도 껍데기만 사람이지 속은 외계생물에게 정복당했습니다. 외계생물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면 실질적으로는 죽은 상태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와 같아서는 안 됩니다.
부자 청년의 마음에는 재물이 들어왔습니다. 외계생물이 파고들어서 지배하는 것처럼 마음은 재물에 지배당하게 되었습니다. 생명이신 하나님의 영과 빛이 투과되지 못함으로써 마음이 죽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재물이 마음을 움직여갑니다. “돈을 더 벌어야 한다, 재산을 보존해야 한다, 재물이 많아야 성공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재물로써 높이 올라가려고 합니다. 이러한 재물에 잠식당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사회는 좀비들의 싸움터입니다.
자녀를 마음에 담은 부모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라고 해서 자녀를 마음에 담아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변화산에서 하늘에서의 모습으로 변화하신 예수님을 보았던 베드로의 마음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자 산 아래 인간세상에서 바랐던 모든 일들을 망각하게 되었습니다. 부모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면 더 이상 자녀를 마음에 담을 수는 없습니다.
마음에 들여놓음을 전제로 놓고 볼 때에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에 비교한다면 가족도 재물도 인기도 명예 등도 마음을 잠식하려는 괴생명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구를 본향으로 여기는 동안에는 가족이나 재물을 비롯한 세상의 가치들이 가장 소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본래 들어오실 하나님을 기준으로 본다면 세상의 모든 가치들의 좋음의 무게는 비교할 수 없이 가볍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영생을 갉아먹는 괴생명체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좀비의 삶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지금보다 나아지는 상황에 대한 추구입니다. 그 결과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주시고자 하신 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제자들은 아직 좀비인 상태에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지구라는 외계 속에서 높아지고자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고자 했던 것은 지구에서 높아지는 것이 아닌 영생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제자들의 마음이 좀비상태에서 해방되어 지구를 빠져나가 본향인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고자 하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바로 예수님의 섬김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지구를 빠져나가는 통로로 바라볼 수 없다면 야고보와 요한처럼 예수님을 지구로 끌어들이고자 하게 됩니다. 그러면 영생은 끊어지게 되고 세상의 가치들이 괴생명체처럼 마음에 침입하여 좀비처럼 움직여가게 될 것입니다. 좀비와 같은 삶은 단지 비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투과되지 못하는 마음이 좀비가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세상 것을 담아서 하나님에 대해 죽고 좀비가 되었습니다. 좀비는 다른 사람을 섬기려 하지 않습니다. 섬김을 받고자 합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따라서 이 좀비의 세계인 지구를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따라 마음을 하늘로 보낸 사람들만이 이 땅에서 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지구에 온 사람들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지구에 다시 태어나서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이 본향인 하늘에 머무는 사람들은 절대로 섬김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설령 누가 섬기려고 한다면 무척이나 거북하게 여깁니다. 반대로 마음이 좀비가 될수록 섬김을 받고 우러러보는 것을 바라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섬김을 받으려 하는 동안에는 행복과 기쁨과 만족은 결코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다른 것으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찾게 됩니다. 정치인들이 부정부패를 하고 부자들이 마약을 하는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섬김은 지구의 가치를 마음에 담고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섬김은 본향인 하늘에서 온 자들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지금 여러분께서는 어떤 상태에 있으십니까? 불평불만이 생기고 걱정근심이 있다면 좀비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치들이 괴생명체처럼 들어와서 하나님이 투과되어야 하는 생명을 갉아먹고 움직여 가고 있습니다. 올라가고 싶지만 올라갈 수 없기에 불행합니다. 변화가 생겼으면 좋겠는데 변화가 없으니 불평이 나옵니다. 무엇하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기에 걱정근심이 생겨납니다. 이러한 불평불만은 높아지고자 하는 좀비의 특성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이러한 좀비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십자가를 붙잡아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외계인 지구를 탈출하여 본향인 천국으로 향하는 통로입니다. 45절에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대속물은 노예를 해방시키는 속전입니다. 이 세상에 기쁨과 만족이 있다고 믿을 때에 노예생활은 시작됩니다. 부모가 마음에 자녀를 담으면 자녀의 노예가 됩니다. 마음에 배우자를 담으면 배우자의 노예가 됩니다. 마음에 재물을 담으면 재물의 노예가 됩니다. 부모좀비, 아내좀비, 남편좀비, 재물좀비로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대통령이라도 그 마음은 좀비일 수 있으며, 할리우드의 영화스타도 그 마음은 좀비일 수 있습니다. 설령 목사님이라도 마음에 예배당을 담고 수적인 부흥을 담게 되었다면 좀비일 수 있습니다. 지구를 빠져나가지 않는 마음은 다 좀비입니다. 좀비는 살아 움직일지라도 죽은 상태입니다. 마음에 세상을 담고 그에 따른 자극을 받고 동기부여를 받아서 살아가는 좀비의 삶을 산다면 죽은 후에 지옥에 가서도 영원히 좀비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야만 했던 이유는 좀비의 삶을 끝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좀비를 죽여서 하늘을 투과하는 영생의 참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사람이 된 자들은 섬김 외에는 삶의 방법을 모릅니다. 세상에서 대접받기를 원하지 않고 타인에게 영생을 주고자 섬기는 것이 예수님의 구원의 역사를 통하여 참사람으로써 영생을 받은 선민들의 특징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좀비의 삶을 끝내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제까지 지구라는 외계에 끔찍한 괴생명체가 들어와 우리의 생명을 갉아먹고 좀비로 살게 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좀비 된 나를 죽게 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 하늘을 소망하게 하시며, 승천하시고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님을 따라 은혜가 임하여 영생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이 세상에서 오직 섬김을 통해 행복의 열쇠를 쥔 자들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