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인생은 아름다워
(마가복음 11:1~11)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아!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아! 인생은 아름다워’
본문에서는 인생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가 나옵니다. 10절에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호산나는 ‘구원하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즉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구원하옵소서’라고 요청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서도 이 요청이 이루어질 때에 다윗의 나라 안으로 들어간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이 땅의 왕 되심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귀 새끼를 타심으로써 이를 공공연하게 드러내셨습니다. 스가랴 9장 9절을 보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하였습니다.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임하리라는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그대로 이루심으로써 이 땅의 왕으로 오심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신 것입니다.
왕은 다스릴 나라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는 예수님께서 세우실 나라에 대해 다윗의 나라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이스라엘 선민의 역사 속에서 전성기를 이루었던 시대가 다윗 왕국이었기 때문입니다. 상징적인 의미를 담은 다윗이라는 이름을 통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만드실 나라를 기대한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또한 신앙적 의미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진 다윗의 나라 안에 들어가 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삶입니다.
우리는 한국 땅에 살고 있는 한국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관점에서까지 한국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영적으로는 다윗의 나라 안에 들어가 사는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다른 어느 나라에 사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미국에서 방송을 들으시는 형제자매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요새 미국이 혼란스럽다고 해서 그것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산다면 온전히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몸은 미국에 있을지라도 마음은 다윗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 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래로 다윗의 나라는 만들어졌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다윗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신 하나님의 나라로써의 다윗의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그 대답이 쉽고 명료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위하여 제자 둘을 보내셔서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이제 생면부지 사람을 찾아가서 나귀 새끼를 끌고 와야 했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이 나귀 새끼를 끌고 가려 하니 주인이 그 이유를 묻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 때에 대답해야 될 내용을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십니다. 3절을 보면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구절이 무척 중요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고자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나라의 별명이 다윗의 나라였습니다. 다윗의 나라의 특징은 주가 쓰시는 나라입니다. 세상은 사회적 법률적으로 개인의 소유를 허락합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허락하는 대상들을 내 소유로 삼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세상나라에 속하게 됩니다. 반대로 세상이 내게 허락한 대상들이지만 주께서 쓰셔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또한 실제로 그것들을 주께서 쓰시는 일이 일어나는 동안에는 다윗의 나라에 속하게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내 몸도 나의 것이 아닌 주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세상나라에 속해있을 때에는 나의 몸은 내가 쓰고 내가 돌봐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어 다윗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다면 나의 몸은 주가 쓰시고 주가 돌보시게 됩니다.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도 주가 쓰십니다. 내 미래와 인생도 주가 쓰십니다. 배우자로부터 시작되는 모든 인간관계 또한 주가 쓰십니다. 내 직장과 신분도 주가 쓰십니다. 다윗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은 사회와 법이 인정한 사물의 소유는 물론이고 몸과 관계와 시간과 생각까지 주가 쓰시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특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가 쓰시는 나라의 건국을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심을 통해 시작하십니다. 일반적으로 독립된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합니다. 전쟁을 위해서는 군사력과 각종 무기와 용맹한 장군과 전략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나귀 새끼는 이러한 나라를 세울 때 필요한 세상적인 어떤 수단과 힘도 동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멋진 준마가 아니고 새끼 나귀를 타셨다는 것은 어떤 것도 세상적인 가치관에 속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왕들이 높아지기를 바라는 것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자리로 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자리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이 세상에 다윗의 나라는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다윗의 나라에 속한 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삶이 주가 쓰시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내 몸과 삶의 소유권을 내가 주장하는 동안에는 다윗의 나라에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자유입니다. 누구나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수는 있지만 주님이 만들어 놓으신 다윗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몸과 나의 삶의 소유권을 하나님께서 주장하시는 것이 다윗의 나라의 특징입니다. 에덴동산을 불칼이 지키고 있는 것처럼 내가 내 몸을 쓰고 삶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동안에는 다윗의 나라는 굳게 닫혀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쓰임을 받게 된다면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뜻을 쳐내는 칼날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다윗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몸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 십자가에서 몸에 대해 죽은 자임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럴 때 마음은 다윗의 나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제 내 몸은 주님이 쓰시게 됩니다. 이것은 비단 몸뿐만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모든 소유물들에 대해 적용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삶의 모든 내용에 대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임을 인정할 때에 인생은 아름다운 다윗의 나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항상 채움을 추구합니다. 그렇기에 세상의 가치들을 통해서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시도를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임을 인정하고 유지해 나갈 때에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는 외통수의 길 위에 서게 됩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의 동선이 길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유지할 때에 우리의 마음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느끼고 좋아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만을 나의 보물과 보석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인생은 아름다워지기 시작합니다.
엊그제 집사람이 홈플러스에서 미국산 쇠고기갈비 세일하는 것을 사왔습니다. 그걸로 찜을 해서 먹었는데 어찌나 맛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명절에 먹는 갈비찜은 이렇게 맛있지를 않습니다. 떡국도 있고 전도 있고 잡채 같은 다른 맛있는 음식들이 많이 있으니 갈비찜의 맛을 온전히 즐길 수도 없고 많이 먹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밥상에 갈비찜 하나 딱 올라와 있으니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릅니다. 갈비찜의 맛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갈비찜을 대하는 상황이 달라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가지는 느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하나님이 맛있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 외에도 맛있게 여기는 대상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주가 쓰시는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고 유지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늘을 향하신 예수님의 외통수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외통수의 길이 바로 밥상 위에 갈비찜 하나만 있는 상태와 같습니다. 하나님 한분만으로 마음 채움을 운명적으로 느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진짜 맛도 느낄 수 있습니다.
계시록을 보면 그 하나님의 좋음이 시각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성령의 감동을 통해 표현한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사도 요한의 눈이 되어주시자 하나님의 좋으심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4장을 보면 그 느낌이 온갖 보석의 빛깔과 무지갯빛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알고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어휘들이 모조리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 또한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을 이러한 보석으로써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변화산에서 베드로는 하늘에서의 모습으로 변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황홀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산 아래에서 꿈꾸던 모든 일을 잊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과 함께 살고자 초막을 짓고자 합니다. 베드로를 황홀하게 만들었던 것은 예수님을 투과하여 나타나신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계시록을 기록할 때의 요한이나 변화산에서의 베드로와 같이 하나님의 좋으심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에서 하나님 외에 수많은 좋음의 대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명절에 맛있는 음식들이 한꺼번에 밥상에 올라와 있는 것과 같습니다. 돈이 잡채처럼 맛있고, 명예가 전처럼 맛있고, 권력이 떡국처럼 맛있으니, 갈비찜이신 하나님의 맛을 온전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자면 하나님 외에는 모두가 가짜입니다. 하나님을 제외하고 온전한 좋음의 대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탄이 만들어 놓은 계략에 속아 세상의 가치들을 맛있다고 느낄 뿐입니다. 실제로 그것들은 아무리 마음에 담아도 결코 온전한 기쁨과 만족을 주지 않습니다.
어떤 분이 벤츠를 샀는데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딱 한 달 좋았다고 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벤츠뿐 만이 아닙니다. 이상적인 이성과 결혼하더라도 그 행복이 3년도 가지 못합니다. 제가 그런 말을 하니 이 말을 듣던 여성분께서 3년은 고사하고 3개월도 못 간다는 말을 하셨습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마음은 오직 예수님의 외통수 길에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석으로 여길 수 있을 때에 우리의 마음은 주가 쓰시는 나라 즉 다윗의 나라로 들어가게 됩니다.
나의 몸에 대한 주인의식이 죽고,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대한 주인의식이 죽고, 나의 시간과 관계에 대한 주인의식이 죽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은 자의 의식을 유지할 때에 하나님의 좋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보물과 보석이고 나의 소유가 되셔야만 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를 유일한 소유로 여길 때에 나의 삶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쓰시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을 쓰고 하나님은 나의 삶을 쓰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 채움을 위해 하나님을 쓸 수 있습니다. 신명기 6장 5절에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씀과 일치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할 대상은 돈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고 성공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보물과 보석으로 소유한 사람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유지하면서 다윗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이득과 손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얻어도 이득으로 여기지 않고, 무엇을 잃어도 손해로 여기지 않을 만큼 마음이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러나 목숨을 잃는 것을 손해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에게 몸이 보물이었다면 자신을 치는 자들이 용서받기를 기도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풍랑 만난 배위에서 제자들은 몸이 보물이었습니다. 몸을 잃으면 다 잃는다고 여겼기에 죽을 것을 두려워하며 살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을 보물로 여기시며 소유하고 계셨습니다. 풍랑이 아무리 일어도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아버지를 빼앗아 갈 수는 없었기에 풍랑을 위기로 느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보물로 강하게 느낄수록 삶에 손해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하나님을 유일한 보물로 여겼기에 몸이 죽는데도 피해의식이나 손해의식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돌에 맞아 죽는다 하여도 마음에서 하나님을 빼앗아갈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장사하는 사람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세상나라의 사람들은 마음에서 돈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장사가 안 되면 위기로 느낍니다. 그러나 다윗의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은 장사가 안 돼도 위기로 느끼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장사에 대해서 죽었음을 인정하고 확인합니다. 그러면 마음에서 장사로 얻게 될 흑자는 더 이상 보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하늘로 향하신 예수님의 외통수 길에서 마음의 만족을 해결하고자 하나님 아버지를 보물로 여기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다른 반찬 없이 올라온 갈비찜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맛을 느끼기 시작하면 장사가 되든 안 되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장사가 나의 마음에서 보석 빛을 발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아무런 손해를 끼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보물로 느끼는 강도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장사는 마음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내 마음에서 장사에 대해 죽자 하나님께서 장사를 주관하시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인생이 아름답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예로 병에 걸린 사람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몸이 병에 걸린 것 같으면 의사를 찾아가면 됩니다. 그러나 병원에 들어가기 전에 마음은 다윗의 나라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병이 난 몸에 대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몸에 대해서 죽은 자라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죽은 자라는 의식을 유지시켜 나가야만 합니다. 마음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의 방향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늘을 향하신 예수님의 외통수 길에서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해결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몸을 고쳐서 마음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것은 갈비찜 말고도 다른 반찬에 이것저것 눈독을 들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갈비찜 맛을 온전히 느낄 수가 없습니다.
건강한 것이 복이고 기쁨이라는 말은 마귀의 거짓말입니다. 그 거짓말을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주여 건강하게 해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한다면 하나님 대신 건강으로 기쁨을 누려보겠다는 선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인생은 아름답기는커녕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몸의 건강과 마음의 기쁨은 상관이 없습니다. 죽은 자의 의식을 유지하는 동안 마음의 기쁨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은 부활하신 주님이 올라가신 하늘뿐입니다. 우리는 이 외통수의 길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어가는 가운데도 얼굴에서 빛이 날 수 있었다면, 몸이 아프더라도 마음에는 하나님의 주시는 만족과 평강이 있게 됩니다. 이 만족과 평강을 위해서 예수님의 외통수 길을 따르고자 할 때에 소망의 단계에서 이미 평강은 찾아온 것입니다. 비록 몸은 아프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에 평강이 되신다는 소망만 가지고도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죽음조차 손해가 아닙니다. 몸이 아파서 죽는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의 보물이신 하나님께는 어떠한 손해도 생기지 않습니다. 다윗의 나라에 들어왔다면 삶에서 어떠한 손해도 볼 수가 없습니다. 이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처럼 돌에 맞아 죽어도 손해가 아니며, 솔로몬처럼 부귀영화가 주어져도 이득도 아닙니다. 너무나 좋으신 하나님을 마음에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산 아래에서 꿈꾸었던 모든 일들을 잊어버리게 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외통수 길에서 기쁨과 만족을 점점 더 강하게 느껴가는 것이 다윗의 나라에 들어간 삶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보물 되심을 강하게 느껴서 손해도 이득도 없는 삶에서는 나를 무너뜨릴 세상의 유혹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방법은 오직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은 자임을 인정하는 외통수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럴 때에 삶의 모든 일은 주께서 쓰실 것입니다. 주께서 쓰실 때에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지 일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뿐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처럼 죽게 하셔도 감사하고 솔로몬처럼 부귀영화를 주셔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은 오직 보물이신 하나님 아버지로 채워졌기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모든 대상 앞에서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의식을 유지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은 다윗의 나라로 들어간 삶을 살게 됩니다. 아! 인생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다윗의 나라 안으로 우리 모두 들어가게 하여 주셔서 보석 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맛에 취하게 하시고, 머리털까지도 주께서 쓰시는 삶이 되게 하심으로 인생의 아름다움을 언제나 어디서나 증거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