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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다이아몬드 형태의 구원>의 줄거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이 의미가 무엇일까요? 포커 카드의 다이아몬드 무늬를 생각해 보세요. 절반 잘라 윗 삼각형은 삼위일체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예수님 따라 가장 높은 곳 하늘로 가서 그 삼각형 밑에 놓임으로써 다이아몬드 형태의 사위일체가 이루어집니다. 빛이신 하나님이 나를 투과하는 구원 상태이지요.
다이아몬드 형태의 구원
(마가복음 11:9~10)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다이아몬드 형태의 구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다이아몬드 형태의 구원’
다이아몬드 형태란 실제 보석이 아니라 포커카드에 그려져 있는 다이아몬드(◆) 무늬를 의미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말씀을 통하여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9~10절까지의 본문은 어제 이미 다루었습니다만 오늘은 이 두 절에만 집중하여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서는 호산나의 외침이 두 번 반복되며 강조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호산나는 구원하소서 혹은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9절을 보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시편 108편의 내용을 인용한 것입니다. 여기서 ‘호산나’ 즉 구원하소서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가 이어지며 구원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물론 당시의 군중들은 구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이렇게 외쳤던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들의 외침에는 자신들도 모르는 진실이 담겨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건강상태가 안 좋은 사람이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즉 ‘지금 구원하소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는 기도를 드렸다고 하면 일반적으로 병이 낫는 것을 구원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 주어질 수 있는 진짜 구원은 단순히 몸이 건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고백은 ‘나의 병약한 상태를 주께서 쓰시옵소서’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병이 들든지 병이 낫든지 혹은 그 과정에서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바란다는 의미에서 호산나를 외치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께서 나의 삶과 관계된 모든 것들을 쓰시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내가 원하는 기준대로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 10절을 보면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다윗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구원이 이루어진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나의 삶과 관계된 모든 것들을 주가 쓰시는 것이 구원이 임하고 있는 상태이며 다윗의 나라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한편 여기서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는 부분이 특이합니다. 똑같이 호산나를 외치고 있지만 9절과는 의미하는 바가 사뭇 다릅니다. 그 의미에 대해 집중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드렸듯이 군중들과 예수님은 구원에 대해서 동상이몽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가장 높은 곳이란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계신 보좌를 의미합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하는 군중들의 외침은 ‘가장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여 구원하소서’라는 뜻이 됩니다. 다만 말씀드렸듯이 군중들이 구한 구원과 예수님이 주시려고 하셨던 구원의 내용이 다른 것이 문제가 됩니다.
군중들이 바랐던 구원은 가장 높은 곳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께서 이 땅을 굽어 살펴보시고 로마의 식민지 압제로부터 해방되고 다윗 왕국이 회복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했던 구원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이 계신 가장 높은 곳까지 이끄시는 것이었습니다.
일찍이 출애굽 했을 때에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쳐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지팡이를 통해 홍해를 가르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셨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런 기적이 다시 한 번 일어나게 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자신들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게 되기를 바라며 호산나를 외쳤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지신 호산나에 대한 뜻은 달랐습니다. 우리는 앞서 마가복음을 시작하며 물고기를 낚는 것과 구원의 연관성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물에서 고기를 낚아 배로 건져 올리듯이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사는 우리의 마음을 가장 높은 곳인 하늘로 끌어올리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허락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자녀답게 구원을 이루어나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구원을 이루는 것은 마음이 가장 높은 곳에 이르기를 소망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에 주어진 상황이 개선되어지는 것을 구원으로 생각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순교하실 때를 생각해봅니다. 스데반 집사님에게 구원은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어진 상황이 나아지는 것이 구원이라면 스데반 집사님은 구원을 받지 못한 셈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7장 55절을 보면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을 받았고 구원을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원은 마음이 땅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그동안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주께서 쓰시는 것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구원을 받았다면 세상에서 내게 득이 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직 주께서 그 뜻을 위해 쓰실 뿐입니다. 나에게 득이 되는 일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마음이 하나님이 계신 가장 높은 하늘로 올라가는 것뿐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상태가 이와 같았습니다. 몸은 돌에 맞아 죽어가고 있었으나 마음은 가장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에베소서 2장 5~6절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의 언급이 나타납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게 될 때에 마음에서는 어떠한 일이 이루어지게 될까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께서 독립적인 인격이 삼위일체를 이루고 계십니다. 이 모습을 삼각형(▲) 모양으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구원받은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게 되면 이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7장에 11절에서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하여 사위일체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제목에서 언급하였던 다이아몬드 형태의 구원이란 바로 이러한 의미입니다.
한편 구원은 다이아몬드와 형태뿐만이 아니라 성질도 닮았습니다. 다이아몬드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영롱한 보석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 삼위일체 하나님과 일체를 이룰 때에 나타나는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돌로 쳐서 몸이 죽는 상황에서조차도 마음의 평안을 깨뜨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일체됨의 단단함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이것이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가 의미하는 진짜 구원의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다이아몬드 형태의 구원을 이룰 때에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마음의 평강이 깨지지 않는 단단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 빛이시고 영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투과하시는 영롱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 머물러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룬 나의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빛이 투과되어 이 땅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쓰시는 일들이 구체적으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선택입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의 내가 존재합니다. 인간세상에서의 내가 있고 하나님 세상에서의 내가 있습니다. 둘 다를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세상에서의 나를 쓰실 때에 어떤 모습이 나타날 것인지에 관심하거나, 하나님 세상에서의 나의 모습이 어떨지에 대해 관심할 수 있을 뿐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에게 하나님의 쓰심이 어떻게 나타났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는 상황에서도 돌로 치는 자들의 죄가 용서받기를 기도하며 생을 마칩니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쓰심은 끝이 났습니다. 인간세상에서 나를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면 이러한 모습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하늘이 열렸다는 말대로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즉 ‘가장 높은 곳에서 구원하소서’라는 말이 성취된 것입니다. 인간세상에서의 나를 버리고 하나님 세상에서의 나를 선택하였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세상에서의 나를 버리고 하나님 세상에서의 나를 선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마음은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십자가 생활화의 의미가 축소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만을 생각한다면 십자가 생활화는 주술적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인격적 사건입니다. 십자가에 담겨있는 예수님의 인격성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철저한 모욕을 당하시면서 자신을 아까워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세상을 소망하면서 인간세상에서 자신을 버리셨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67~68절을 보면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모욕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시지 않았습니다. 이 모욕과 경멸의 과정이 십자가 사건에 인격적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이미 인간세상에서의 자신을 완전히 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인간세상에서의 나를 버리겠다는 고백이 됩니다.
예를 들어 돈이 없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 쓰고 싶은 곳에 못 쓰고 사고 싶은 것을 못 삽니다. 돈이 없다고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안타깝게 여깁니다. 혹은 그러한 처지에 놓여있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이보다 더 나은 상태가 되어야만 한다고 바랍니다.
이것이 인간세상에서 나를 선택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에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구원을 이루어갈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가장 높은 곳으로 보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 세상에서의 나를 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돈이 없다고 해서 돈이 생기기를 바라는 것은 구원을 이루려는 사람의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높은 곳에서 삼위일체를 이루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 세상에 참여할 수 있기를 소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때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인간세상에서의 나를 아까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시는 과정에서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시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심을 당하셨지만 모욕과 조롱에 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삶을 대하는 자세 또한 예수님과 같아야만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한다는 것은 인간세상에서의 나를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그 이유는 가장 높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에 참여하여 하나님 세상에서의 나를 얻기 위함입니다.
숨통이 트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숨통이 트이는 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숨통이 막히는 이유는 인간세상에서 사람들이 가진 가치관의 영향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되 세상의 가치관이라는 기준을 통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건강이 안 좋은 것과 마음의 평안은 관계가 없습니다. 건강이 안 좋아도 얼마든지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서 죽어가는 가운데도 하늘이 열린 것을 보았던 것과 같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다이아몬드 형태의 사위일체 구원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건강이 나쁘다는 이유에서 마음의 숨통이 막힘을 느낀다면 그만치 인간세상에서의 나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세상의 가치관이 나의 마음을 조르는 밧줄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다 건강이 좀 나아지면 숨통이 트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악순환의 반복일 뿐입니다.
구원은 몸이 처해있는 상황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9절에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땅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의 삶은 주께서 쓰시는 일이 됩니다. 스데반 집사님처럼 돌에 맞아 죽게 하실 수도 있으며, 욥처럼 온갖 재난을 겪게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재산을 잃고 자녀도 잃고 건강도 잃고 아내까지 떠나갔을 때의 비참함을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욥은 그 비참함에 처한 자신을 아까워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설령 우리가 이러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나를 아까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원해야 할 것은 하나님 세상에 있는 나이지 인간세상에서의 내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대단하게 여겨지고 부러움과 존경받는 것을 원하는 동안에는 구원받을 수도 없습니다. 인간세상에서 나를 선택하는 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하나님 세상에 속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까지 가시는 과정은 인간세상에서 인간이 처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자리였습니다. 우리 또한 그 가장 낮은 자리인 십자가에 나를 묶어놓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나는 인간세상에서 가장 천한 취급을 받기에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믿고 확신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마음은 가장 높은 곳 하늘로 향할 수 있습니다.
가장 낮은 곳인 인간세상에서 나를 팽개칠 수 있을 때에 가장 높은 하나님 세상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여 사위일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 다이아몬드 형태의 구원의 주인공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가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부부가 대화를 하다가 마찰이 생기면 서운할 수 있고 앙심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무시를 당하고 마음에 상처 입은 나를 아까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몸이 병에 걸렸더라도 병에 걸린 나를 아까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예수님이 당하신 모욕을 떠올려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시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심을 당하셨습니다. 인간세상에서 가장 천한 취급을 받으신 과정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본다면 아내에게 무시를 당할지라도 형제에게 미움을 당할지라도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할지라도 나를 아까워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하는 일이 잘 풀려서 성공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로 그것을 기쁘게 여기고 나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가장 비천한 자리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나의 모습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럴 때에 다이아몬드 형태의 구원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다이아몬드처럼 깨지지 않는 평강은 유지될 것이며, 다이아몬드처럼 영롱한 빛이시고 영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투과하여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다이아몬드 형태의 구원은 매일 십자가를 바라보고 인간세상에서의 나를 완전히 버림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마음에 약간의 상처를 받아도 아파하는 이유는 인간세상에서의 나를 아까워하고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를 배신하든 발로 차든 상관치마시고 나를 팽개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모든 수치와 모욕과 배반에 나를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인간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인 십자가로 나를 팽개칠 수 있을 때에 반드시 다아이몬드 형태의 구원은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이 주는 평강을 그 무엇으로도 깨뜨릴 수 없음을 느끼실 수 있게 되실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면서도 이 평강을 누릴 수 없는 이유는 아직도 인간세상에서 나를 아까워하기 때문입니다. 무시당하면 걱정하고, 가족을 타이르려 애쓰고, 돈 문제를 해결하려 애쓰는 삶은 중단 되어야만 합니다.
무시당하면 십자가를 향할 기회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이 믿음이라면 무시당하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자존심이 상할 일이 생겨도 인간세상에서 나를 버릴 수 있는 기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간세상을 등지시고 하늘을 향하셨던 것처럼 세상을 팽개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배신을 당하고 비난을 당했을지라도 인간세상에서 나를 버리고 십자가를 붙잡는다면 하나님 세상에서의 나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세상에서 태어나고 나면 스데반 집사님과 같이 돌에 맞아 죽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평강은 깨어지지 않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여 다이아몬드의 형태의 구원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인간세상에서의 나를 사랑하고 아까워하고 불쌍히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나는 버려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시고 주먹과 손바닥으로 맞으실 때에 대응하지 않으셨던 것은 인간세상에서의 자신을 버리셨기 때문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가장 높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다이아몬드 형태의 구원의 비결은 인간세상에서의 나를 십자가에서 버리는 것임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지금까지 인간세상에서의 나를 사랑하고 아까워하며 목숨을 걸고 애지중지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는 동안 한 시도 평강과 기쁨과 감사가 없이 살았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속에 담겨있는 인격적 의미를 받아들여서 주님이 얼굴에 침 뱉으심을 당하시고 주먹과 손바닥으로 맞으셨고 배반당하셨음을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장 낮은 자리인 십자가가 나의 자리임을 깨닫게 하셔서 인간세상의 나를 버리게 하여 주심으로써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의 외침이 실현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