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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님 새벽기도의 영적의미>의 줄거리:
물론 그대로 따라 하면 좋지만 반드시 새벽이라는 특정한 시간에 기도해야 함을 의미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규칙적으로 새벽기도를 하신 것은 아닌 듯합니다. 밤이 맞도록 하시는 철야 기도도 하셨으니까요. 기도의 때조차 하나님 아버지의 부르심과 지시를 따른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예수님 새벽기도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예수님 새벽기도의 영적의미
(마가복음 1:35~45)
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님 새벽기도의 영적의미>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님 새벽기도의 영적의미’
새벽기도의 영적의미에 대해 강조하고자 합니다. 본문은 기도에 관한 율법적이고 습관적인 의미를 제시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새벽에 기도하신 예수님을 모범삼아 새벽에 기도하는 것은 얼마든지 좋습니다. 그러나 마가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예수님의 새벽기도 장면을 기록한 이유는 이를 율법적이고 습관적으로 따라하라는 목적이 아닙니다. 마가의 기록에는 분명한 영적의미가 존재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새벽에만 기도하셨던 것도 아닙니다. 열두 제자를 사도로 택하실 때에는 산에 들어가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도 제자들을 먼저 보내시고 홀로 산에 들어가 기도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기도는 규칙과 습관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깨어계셨고 하나님 아버지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환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규칙에 매인 기도가 아닌 사랑에 매인 기도였고, 습관에 매인 기도가 아니라 그리움에 매인 기도였습니다. 우리의 기도 또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사랑과 그리움이 전제되어야만 합니다. 율법적이고 습관적이 되어버린 기도생활은 결코 온전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한적한 곳으로 가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영적의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생각해보면 가로등 하나 없던 시절 해 뜨기 전은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어두운 시간에 한적한 곳을 찾아 새벽기도를 드렸습니다. 마가는 이러한 예수님의 새벽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포착하고 있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11절을 보면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올라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외치신 기쁨의 음성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사랑과 기쁨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기도로 응답하셨던 것입니다.
마가는 성령의 감동을 통해 예수님의 새벽기도 장면에서 특별한 의미를 발견합니다. 말씀드렸듯이 해뜨기 전의 새벽은 하루 중 가장 깜깜한 시간입니다. 칠흑 같은 어둠으로 인해 눈으로는 이 세상을 포착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환경에서 마음으로 하나님과 만나십니다. 마가는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에서 하나님만이 태양처럼 빛나고 계셨음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전파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함축되어 있는 내용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가까이 온 천국을 느끼기 위해서는 곧 하나님과의 밀착을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마음에서 하나님만이 태양처럼 보이고 온 세상은 어둠속에 묻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 대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쁨이란 환희의 감정입니다. 어두운 상태에서는 기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기쁨을 느끼셨고, 예수님은 새벽기도를 통해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서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이 태양처럼 빛나고 계심을 세상이 가장 어두운 새벽시간을 이용하여 고백하셨던 것입니다.
복음서들의 기록이 일반적인 역사적 기록과 다른 점은 실제 있었던 사건을 성령의 감동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꾸었다는 점입니다. 역사의 기록이란 과거의 정보입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된 기록은 우리에게 참여를 요청합니다. 오늘 마가가 예수님의 새벽기도 장면을 기록한 이유 또한 단순히 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서 세상은 깜깜한 어둠속에 묻히고 하나님만이 태양처럼 빛나는 상태였음을 드러내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된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예를 들어 연애를 하는 동안에는 모든 것이 사랑하는 사람과 연관이 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애인 생각이 나고 여행을 가도 애인 생각이 나고 일을 해도 애인 생각이 납니다. “오 솔레미오(O sole mio)”라는 노래가사는 “오 나의 태양이여”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마음에서 밀착된 대상은 마음을 채우고 기쁨을 주는 태양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신 상태에서 전도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전도의 내용을 보면 그동안 우리가 해왔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전도는 새벽기도 때의 마음에서 일어난 상황을 사람들에게 이식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을 예배당에 데려오는 것은 전도가 아닙니다. 제가 목회를 할 당시에 교인들에게 영혼구원을 위한 전도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서는 예배당의 빈 공간이 메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지 않았습니다. 다른 예배당의 상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로 영혼구원을 위해 전도를 하는지 교회의 수적인 부흥을 위해 전도를 하는지 돌아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 전도는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에서는 세상이 태양입니다. 돈과 건강 자녀의 형통과 같은 대상들이 마음의 태양으로 존재합니다. 이렇게 세상과 밀착되어 있는 마음상태를 묵인한 채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삼게 한다면 그것은 결코 전도가 될 수 없습니다.
또 이런 상태에서 죽은 뒤에 천국에 가리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 또한 전도가 아닙니다. 천국을 확신하기에 앞서 먼저 확인되어야만 하는 것은 마음을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과 밀착된 상태에서 죽으면 천국 간다는 확신을 주는 것은 올바른 전도가 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전도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전도를 받는 사람들의 마음이 세상과 밀착되어 있다는 것을 간과한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새벽기도를 마치신 예수님께서 전도에 나서십니다.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의 전도란 예수님의 마음에서 일어난 하나님과의 밀착을 다른 이들에게도 이식시켜주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15절을 보면 예수님이 회개를 촉구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전도에 담긴 의미 또한 이와 일치하였습니다. 마음이 세상과 밀착되었음을 회개하고, 복음을 통해 천국에 계신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전도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라는 요청이 되어야만 합니다.
정리해봅니다. 예수님은 새벽기도를 통해 기도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세상은 칠흑 같은 어둠에 덮여야 하고 하나님만이 태양처럼 빛나실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마음은 하나님으로 충만해져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를 사람들에게 이식하는 과정이 바로 전도입니다.
한편 본문을 보면 참 특이한 언급이 나타납니다. 39절을 보면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라고 하였습니다. 회당에서 전도를 하셨다는 것이 참 모순적으로 느껴집니다.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예배당에서 전도를 하시고 귀신들을 내쫓으셨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귀신을 내쫓으셨다는 것은 곧 귀신들의 가리기 작전을 폭로하셨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난 설교에서 귀신들의 작전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회당이나 예배당에 온 사람들은 자신을 귀신과 무관하게 여깁니다. 귀신이 들리면 해괴하고 더러운 짓을 하게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렇게 믿게 한 것이야 말로 귀신의 작전입니다. 마음이 세상과 밀착을 이루고 이 세상풍조를 따르는 것이야 말로 공중권세를 잡은 사탄에게 이끌림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이러한 가르침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도 나타나야할 전도의 본 모습입니다.
당시의 회당은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선민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는 전도는 이들과는 무관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이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써 하나님과 마음의 밀착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세를 통한 율법의 정신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의 정신이란 간단히 말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것이 지켜질 때에 이웃사랑을 비롯한 계명들도 저절로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말씀은 하나님과 밀착하고 하나님으로 기뻐하라는 말과 상통합니다.
이들은 쉐마라 불리는 이 말씀들을 잊지 않기 위해 양피지에 적어서 상자에 넣고 이마와 손목에 달고 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과 가깝다고 여기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전도를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말씀은 알았으나 실제로는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의 말씀사역의 목적은 선민들의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민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의무는 하나님을 마음에 밀착할 대상으로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선민들의 마음이 세상과 밀착될 때에 하나님과 관계의 틈새가 벌어졌고 그 때마다 선지자와 예언자들이 나타나 말씀을 통해 돌이키기를 요청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틈새를 만드는 원인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가족의 번영, 건강과 장수, 출세와 성공 같은 이 세상의 가치들이 마음에 밀착을 이룰 수 있습니다.
애초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았던 이방인들에게는 마음의 거리를 측정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선민들에게 전도를 하십니다. 선민들을 마치 입으로만 하나님을 부르는 이방인들처럼 취급하시며 회당에서 전도하셨던 것입니다. 회당의 선민들과 같은 상황은 오늘날 예배당에서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전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이루어지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당 안에서부터 전도는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누군가에게 예수님을 믿느냐고 물어보면 으레 “저는 어느 교회에 다닙니다.”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그러나 반복해서 말씀드렸듯이 교회에 다니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교회란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로써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8장 20절에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과 밀착된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를 대표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교회는 언제나 하나라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예배당 조직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모임을 교회로 부르기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담은 채로 입으로만 하나님을 부르는 모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회당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모순적이게도 하나님과의 밀착을 요청하는 전도를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모인 회당에서 하셔야만 했습니다.
우리의 우선적 전도의 대상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아닙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마음으로는 세상과의 밀착을 이루는 예배당에 다니는 사람들이 바로 전도의 대상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새벽기도의 영적의미와 회당에서의 전도를 통해 우리에게 이러한 교훈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얼마 전 마태복음 23장 1~12절을 살펴보며 “유대교 끊으시듯 예배당 끊기”라는 제목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의해서 사상적으로 떠받쳐지고 있던 유대교를 끊어내고자 하셨듯이, 우리들 또한 형식적인 모임이 되어버린 예배당 모임을 끊어낼 수 있어야만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말씀을 전했던 주간에 대구에서 신천지와 관련된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코로나19 사태가 확산되면서 예배당 모임이 중단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저로써는 ‘예배당 끊기’라는 말을 참 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이 사태를 바라보며 이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습니다.
만약 이 말을 5년 전 10년 전에 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혹시 공감하는 목사님들이나 성도님들이 늘어나서 형식화 된 예배당 모임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었다면 이런 상황은 닥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로써 직무를 유기한 것은 아닌가, 겁쟁이에 게으름뱅이는 아니었는가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회당에서 전도하셨듯이 전도의 첫 번째 대상은 몸은 예배당에 다니지만 마음을 하나님께 밀착시키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편 본문에 우리가 읽지 않은 40~45절을 보면 나병환자를 고치신 사건이 나타납니다. 이 사건과 예수님의 새벽기도와 회당에서의 전도를 연결시킨다면 본래 전도가 무엇인지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예수님과 나병환자의 대화를 보면 특이한 내용이 나타납니다. 병을 고쳐주신 것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회복의 절차를 언급하고 계십니다. 44절에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당시의 나병환자는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야만 하는 존재였습니다. 가족이 있더라도 만날 수 없었으며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목숨은 연명하고 있으나 삶이 죽어버린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다만 나병이 나아서 깨끗해진 경우에는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다시 사회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마가는 이러한 나병환자의 모습이 우리 마음의 모습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되지 못하고 이 세상과 밀착되어 세상의 가치들을 태양처럼 바라보는 상태가 바로 나병에 걸린 상태와 같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가 발생하면 온 마음이 돈 문제에 집중하게 됩니다. 마음에서 돈이 태양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또 자녀 문제가 발생하면 마음에서 자녀 문제만 보입니다. 부모의 마음에서 자녀가 태양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본래 자녀는 더러운 대상이 아니나 마음이 밀착함으로써 더러워지게 된 것입니다. 나병에 걸렸으면 가족과도 만날 수 없듯이 이러한 상태에서는 자녀와 관계해서도 안 됩니다. 배우자에 대한 문제가 생겼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배우자가 들어와 태양처럼 되었다면 나병에 걸린 것입니다. 배우자로부터 격리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전도는 이러한 상태를 가르쳐주고 깨우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이 세상의 가치와 문제들에 밀착된 사람에게 해결책으로써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가르쳐주는 것은 전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돈 문제도 풀리고 건강도 좋아질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기입니다. 복음을 종교로 바꾸는 사탄의 계략의 하수인이 된 것입니다. 심지어 그렇게 믿은 후에는 천국에도 갈 수 있다는 확신을 줍니다. 이것은 사탄이 제일 좋아하는 전도입니다.
전도를 하고자 한다면 세상에 사로잡혀 있는 마음상태가 나병환자와 같다는 것을 깨우쳐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이 건강 문제에 사로잡혀 있다면 오히려 건강에 손대서는 안 됩니다. 나병환자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지속한다면 나병은 퍼질 수밖에 없습니다. 코로나19의 전염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회적 거리두기 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과 밀착되지 않고 세상과 밀착된 마음은 나병에 걸린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라면 마음은 격리되어야만 합니다. 먼저 세상과 밀착하게 된 마음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고 또 예수님과 함께 무덤에 묻히게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과 밀착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지정의와 언행은 죄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밀착된 상태에서는 슬프더라도 진짜 슬퍼할 일이 아닙니다. 기쁘더라도 정말로 기뻐할 일이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임을 인정할 때에 하나님과의 밀착은 회복되게 됩니다. 이것을 알려주는 것이 전도가 되어야만 합니다.
마음이 세상과 밀착된 상태에서 계속해서 세상과 관계한다면 나병이 퍼지고 코로나19가 퍼지듯 죄가 퍼져나갈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이 과정을 중단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예수님의 새벽기도를 재현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이 태양처럼 빛나고 하나님으로 채워질 때에 진정한 평강이 임할 것이고, 삶은 이러한 평강 가운데 비로소 시작되어야만 합니다. 또한 이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진정한 전도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전도를 전도답게 합니다. 예수님의 새벽기도를 내 것이 되게 하고 또한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식해 줄 수 있게 합니다. 이를 위하여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에 전념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마음에서 이 세상은 칠흑 같은 어둠에 묻히게 하시고 하나님만이 태양처럼 빛남으로써 밀착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으로 채워져서 기쁨과 평강을 누리는 가운데 비로소 이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 나갈 수 있는 생활이 오늘 하루도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