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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복음 외에 기독교 버리기>의 줄거리:
아직 수확철이 아니라서 열매가 없던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다. 당시 선민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배하던 유대 종교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시장하셔서 찾으셨던 열매는 구원이지요. 즉 참 구원을 전하지 못하는 왜곡 된 유대 종교를 저주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와 조건만 같다면 현재 기독교도 이 저주를 피할 수 없습니다.
복음 외에 기독교 버리기
(마가복음 11:12~14)
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복음 외에 기독교 버리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복음 외에 기독교 버리기’
설문지나 서류를 작성할 때에 종교를 물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 가지 종교들 중에서 기독교란에 체크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름뿐인 기독교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 복음을 생활화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지 한낱 종교인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관성에서 등장한 오늘 말씀의 제목은 상당히 과격합니다. 본문을 연구하고 기도하여 받은바 말씀을 믿음으로 전하는 가운데 신앙적 양심에 의해 이러한 제목을 정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런 주제로 말씀을 전하기에는 저 스스로도 부담이 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입장에서 감히 이러한 제목을 쓰지만 오해를 살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제목은 무교회주의에 대한 지향이 아니라 오히려 참교회주의를 지향합니다. 다만 예배당을 중심으로 한 잘못된 교회주의의 척결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다. 그런데 13절을 보면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고 하였습니다. 무화과를 수확할 시기가 이르지 않았는데도 예수님께서 시장하셔서 가셨다가 열매가 없는 것을 보고 저주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이 사뭇 불합리하게 느껴집니다.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이르지 않아서 열매가 없었을 뿐인데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고 저주를 하셨고 실제로 나무는 말라죽게 됩니다.
이때는 유월절을 며칠 앞두었던 4월이었습니다. 무화과는 6~7월이 되어야 열매를 맺기 때문에 아직 철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열매 없는 상태 자체를 비유로 활용하십니다. 열매가 하나도 없는 상태의 무화과나무는 왜곡된 성전이해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유대종교를 상징합니다. 유대종교는 선민들의 영적인 문제를 완전히 전담하고 있었습니다. 영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생활전반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이들의 신앙을 왜곡시키고 있었고 예수님은 이를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시장하셨다는 것도 비유입니다. 시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 땅을 향하여 배고프심을 드러내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14편 2~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에서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들을 찾기를 기대하고 계시지만 그러한 자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이사야서 5장 4절을 보면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라고 하였습니다. 선민에 대한 하나님의 배고프심이 잘 드러난 구절입니다. 이처럼 본문은 행동을 통해 드러내신 예수님의 비유적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고픔은 믿음 있는 자를 찾고자 하시는 마음에 대한 비유이며, 열매 없는 무화과는 그러한 요청에 응답하지 못하는 왜곡된 유대종교에 대한 비유입니다.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유대종교를 통해서는 구원의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인 사람이 열매입니다. 구원은 행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행함은 구원이 이루어진 결과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나타내시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며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심에도 불구하고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모든 것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행하시도록 하셨습니다. 구원을 받아들일 때에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일 또한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을 받아들임은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열매는 바로 구원을 받아들인 인격입니다. 그러나 유대종교를 통해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되리라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유대종교의 가르침에 따라서 영적생활을 하는 한 구원받을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출애굽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 때에 이르기까지 유대종교는 1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유구한 역사의 종교를 예수님께서는 저주하시고 폐지하십니다. 한편 이러한 저주는 우리가 믿는 기독교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저주를 내리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현재 기독교에서도 발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태어나서 62년을 살아오는 동안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독일에서 또 신학을 공부하고 미국에서도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목회를 하였고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볼 때에 현재 기독교는 저주받은 유대종교의 상태를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왜곡된 기독교를 버리고 복음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기독교인이라는 것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고자 하시는 구원받은 인격의 기준에 부합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에서 열매를 바라시는 하나님께서는 배고픔을 느끼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유대종교에 대한 저주를 내리신 후에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동선은 하나님으로 이어지는 길이 만들어진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성전이해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유대종교라는 조직을 폐지시키시고 대신에 십자가 사건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고 그렇게 할 때에 지금의 사건이 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는 사건은 부활의 사건으로 이어지고 승천의 사건으로 이어지며 보좌 우편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의 마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대종교와 같이 전락한 기독교를 버리고 복음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유대종교라는 조직과 가르침은 폐지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의도를 따라서 종교로써의 기독교를 버리고 복음으로써의 십자가 사건을 붙잡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구원조차 받을 수 없습니다.
유대종교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구원을 선민 각자가 나의 구원으로 받아들일 수 없도록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유대종교를 저주하시고 폐지하셨습니다. 마가는 11장의 말씀을 통해 구원의 내용을 두 구절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3절의 “주가 쓰시겠다 하라”이고 두 번째는 10절의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입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가 의미하는 바는 마음이 삶의 현장을 떠나서 하늘로 가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가장 높은 곳인 하늘에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삼위일체로 계십니다. 예수님과 연합한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루게 되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럴 때에 땅에서의 삶은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쓰임 받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마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구원의 내용입니다.
예를 들어 삶에서 건강 문제나 재정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복음은 이러한 문제로부터 마음을 떼어 하늘로 보낼 것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현장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는 상황에서도 마음을 하늘로 보낼 수 있었고 깨지지 않는 평안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건강 문제나 재정 문제에 대해서도 충분히 마음을 떼어내고 하늘로 갈 수 있습니다.
유대종교나 기독교가 가르쳐야만 하는 복음의 내용이 이와 같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건강 문제나 재정 문제가 해결되는 상태가 아니라 가장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룸으로써 평강을 찾아야만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당신의 마음이 등진 건강 문제나 재정 문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가르칠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 속에서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인격들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종교에서는 이러한 가르침이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의 역사를 통해 수없이 많은 기적으로 개입하셨습니다. 출애굽 때에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키셨고 홍해를 가르시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이러한 기적을 베푸신 이유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신호였고, 하나님께서 선민들에게 스스로를 뽐내신 순간들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애굽을 강대한 나라라고 생각하고 두려워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지팡이 하나 든 여든 살 노인 모세를 통해 초토화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기적을 일으키신 이유는 선민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좋아하고 갈망하게 하시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선민들은 기적을 일으키신 하나님을 좋아하는 대신에 기적 자체를 좋아하게 되었고 이 기적과 같은 일들이 삶에서 일어나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건강 문제나 재정 문제가 생겨 앞뒤가 꽉 막힌 기분이 들 때마다 홍해가 갈라지듯이 문제가 해결되는 기적이 일어나기만을 바랐습니다. 이러한 선민들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이 땅에서 숨통이 트이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교리적으로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함을 압니다. 이는 본래 마음이 채워지고자 하는 욕구를 하나님을 향해서만 발동시켜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나의 마음이 일체가 되는 것이 바로 구원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선민들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대신에 이 땅의 문제해결과 형통을 구원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세상으로 마음을 채우려는 시도에 대한 도움을 구원으로 여기고 갈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교리와 의식들을 통하여 이것을 더욱 강조하여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선민 중에서 땅을 떠나서 가장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과 하나 되고 싶어 하는 갈망을 가진 사람이 없었습니다.
구약성경도 땅을 떠나 하늘을 향하라는 이 한 가지의 가르침으로 귀속됩니다. 마음이 땅을 떠나 가장 높은 하늘로 갈 때에 삶은 주께서 쓰시리라는 것입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선민들을 돌이키려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선민들의 마음은 땅을 떠날 줄을 몰랐고 유대종교는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이러한 복음의 왜곡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구원은 내가 처한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재정 문제가 벌어졌어도 마음은 문제를 등지고 떠나서 하나님이 계시는 가장 높은 곳에 이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가 할 일은 하나님을 가지는 것뿐입니다. 유일한 소유는 하나님이셔야만 합니다. 재정은 주께서 쓰실 재료일 뿐 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래서 실질적 구원과 교리적 구원으로 구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기독교의 교리적 구원은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어서 천국에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편 실질적 구원은 지금 내 마음에서 절박하게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죄 사함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주홍 같이 붉은 죄가 흰 눈처럼 깨끗해지지 않으면 마음에 하나님을 가질 수도 없으며 하나님과 하나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땅에 살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절박하게 갈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저는 신학 공부를 한국에서 7년을 했고, 독일에서 6년간 했고, 미국에서 1년간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공부를 했어도 구원의 내용 즉 “주가 쓰시겠다 하라”와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에 대해 접하지 못했습니다. 훌륭한 선배 목사님들과 대화를 하면서도 이 구원의 내용을 말씀하시는 분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떤 문제가 주어지든지 문제를 붙잡아서는 안 된다. 마음은 문제에서 등을 돌리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과 승천사건이 우리의 마음을 하늘로 끌고 가시기 위해 이루어진 사건이다. 우리의 마음이 가장 높은 하늘로 올라 갈 때에 땅은 주께서 쓰신다. 그러므로 땅은 우리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 기독교에서 가르쳐야만 하는 구원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목회방침 자체가 땅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유대종교가 저주를 받은 그 상태가 기독교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유지되게 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현재의 기독교는 공중에 권세 잡은 사탄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경쟁력이 제로입니다. 영적 승리를 얻기 위한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오히려 공중에 권세 잡은 자에게 먹혀 버린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솔직한 심정으로 토로합니다만 예배당 조직에서 최우선의 가치는 돈이 되었습니다. 예산이 풍부해야 많은 사업과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예배당조직에서 돈이 최고가 되어버렸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돈이 최고가 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저주는 유대종교만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천주교나 기독교가 예외일 수 없습니다. 이렇게 명확하고도 간단한 구원에 관한 내용을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조건 땅에 대해서는 죽어야만 하고 무조건 하늘을 얻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기준대로 땅의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은 결코 구원이 아닙니다. 그러한 기준에서 본다면 스데반 집사님은 구원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기독교 역사상 첫 번째 순교자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는 기독교인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 지를 대표적으로 드러낸 사건입니다. 몸이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마음은 몸을 떠나 하늘로 올라갈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는 의미가 바로 이 말씀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가르침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종교를 저주하시고 폐지를 선언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향하지 못하게 하는 조직과 단체를 폐지하시고 하나님을 향할 길로써 복음의 사건을 십자가를 통해 제시하셨습니다. 설문조사할 때에 기독교란에 체크한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종교가 아닙니다. 복음은 삶에서 나타나야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사건을 생활화하는 사람이지 기독교란에 체크하는 종교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을 삶에 적용하지 못하는 사람도 기독교라는 문화와 습관 속에서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영적인 경쟁력, 영적인 전파력, 영적인 변화력이 제로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내리신 저주는 천주교든 개신교든 피해갈 수가 없습니다. 남미에 있는 많은 나라가 천주교를 믿습니다. 콜롬비아 브라질 멕시코와 같은 나라는 신도의 비율이 80~90%에 이릅니다. 그런데 마약에 아동납치의 범죄가 끊이지를 않습니다. 천주교 축제 때에는 온갖 우상이 범람합니다. 개신교가 우세한 국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을 버리고 하늘로 마음을 보낸 사람들의 모습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주께서 쓰시는 삶의 모습이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목사님들은 어떻게 하든지 인기를 얻어서 스타 목사가 되겠다고 난리를 칩니다.
저 한 사람의 구원, 여러분 한 사람의 구원에 필요한 것은 개신교나 천주교라는 단체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복음만 있으면 됩니다. 이 복음 사건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에 참여시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하여 사위일체를 이루기를 바라시며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십자가 복음이 구원의 전부입니다. 종교나 단체에 소속되어야 얻을 수 있는 구원이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 사건을 통해 마음이 예수님과 하나가 될 때에 구원은 이루어집니다.
그간 종교로써 기독교 안의 가르침들이 성경의 가르침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와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로 정리되는 간단한 구원을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일부러 숨기고자 하는 것인지 몰라서 가르치지 못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혼자 있는 자리에서도 구원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십자가 사건에 뛰어들어서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교회를 이루게 됩니다. 기독교라는 조직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사건에 뛰어든 사람들 전체가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모임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임은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이 되어야만 합니다.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고 구원을 이루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루어지는 모임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마태복음 18장 20절의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말씀은 성취될 수 있습니다.
예배당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야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큰 예배당을 지어야 하고, 많은 성도가 모이도록 전도하라는 말들은 사기꾼이고 장사꾼의 거짓말입니다. 그러한 예배당에는 예수님의 저주가 내릴 이유 밖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갈급해 하시는 구원의 열매 맺는 자들이 절대로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각자가 십자가 사건에 뛰어드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사건 이외에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조직과 가르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조직에 속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속임수이고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할 때에 마음은 부활의 사건으로 옮겨지고 승천의 사건으로 옮겨지며 보좌 우편으로 옮겨져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관계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이 땅의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15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살펴보면서 어린아이의 특성을 절대 신뢰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결혼한 지 17년 만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아이가 5개월 때에 미국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는 미국에 아는 사람도 없고 속한 단체도 없고 친구도 없습니다. 어느 곳에서든지 엄마 아빠만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엄마 아빠라는 사람이 무력하기 이를 데 없고 실수투성이며 잘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아기는 엄마 아빠로 인해 전혀 낯선 땅 미국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캐나다로 갈 때도 마찬가지였으며,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어린아이로부터 배워야 하는 절대 신뢰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마음을 보낼 수 있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그 아버지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길을 만드신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우리를 아버지께로 가도록 도우실 것도 믿습니다. 그럼에도 천주교나 개신교라는 단체와 조직과 가르침이 없으면 안 된다고 하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는 평생을 조직과 단체에 충성을 다해도 하나님께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종교가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 아버지께로 이끌어 줄 수 없고 주께서 쓰시는 삶으로 만들어 주지 못합니다. 저도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대해 깨달은 이상 스스로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 각자가 십자가 사건으로 뛰어들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에 참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삶 전체는 주께서 쓰시는 삶이 되어갈 것입니다. 그렇게 각자가 구원을 이루어 갈 때에 하나님의 인도를 통해 온전한 모임도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복음만 갖고 기독교를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기독교라는 종교인이 아니라 복음의 사람이며 예수의 사람이며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스스로를 천주교인이나 기독교인으로 속박하는 동안에는 결코 구원은 주어질 수 없습니다. 참 교회는 종교로써의 기독교를 버리고 복음을 가진 자들의 모임입니다. 이 온전한 교회의 모습이 두드러져 나타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역사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예수님께서는 온갖 모욕과 고난을 당하시며 십자가 사건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시며 성령님이 계심에도 내가 인정하지 않고 수용하지 않아서 구원은 남의 이야기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각자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도록 담대함을 주시고, 이 세상의 조직과 단체에 기대려는 잘못된 우상의 마음을 성령의 불로 태워 주시옵소서. 날마다 십자가 사건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가장 높은 곳에서 주어지는 구원을 이루게 하시고, 낮은 이 땅에서는 주께서 쓰심이 이루어지는 주인공들로 삼아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