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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을 믿는 법>의 줄거리:
하나님의 선민들인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도 특별히 선택되어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으면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정말 새삼스럽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이유는 명백합니다. 선민이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중에도 제자들은 놀랍게도 하나님을 안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법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법
(마가복음 11:20~24)
20.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법’
예수님께서는 본문 22절을 통해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하신 대상이 이스라엘 사람들이며 그 중에서도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따랐기에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은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둔다면 제자들의 마음상태에 대한 이해는 달라집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였기에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선민은 하나님에 의해 택함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천지의 창조주이심과 전지전능하심을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선민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이 예수님의 요청은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고 계십니까? 만약 하나님을 믿는 법에서 벗어나 있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법이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당시는 아직 철이 아니었기 때문에 열매가 없는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열매가 없는 상황 자체를 왜곡된 성전이해로 말미암아 조직화 된 유대교에 대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유대교에 대해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고 저주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유대교를 통해서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유대교는 더 이상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을 받아들일 수 없는 종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실제로 AD.70년에 로마에 의해서 성전은 파괴되고 유대인들은 약 2000년 동안을 온 세계에 흩어져 떠돌이 민족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다음 날 예수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제자들이 보게 되었고 베드로가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라고 하자 이 말씀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시되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말씀 한 마디로 삶의 현장에서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마치 창조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신 것과 같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을 뿐인데 새파랗게 살아있던 나무가 말라죽은 것을 보면서 제자들은 놀랐습니다.
본문에서 ‘믿으라’는 말씀이 세 번 나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셨고,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을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 하셨으며,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첫 번째 말씀에 두 번째와 세 번째 믿으라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형태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으면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것을 의심 없이 믿게 되고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지속되는 중에 생각하고 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 생각과 말이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 생각이 하나 떠오릅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지금 눈앞에 보이는 태백산맥의 대관령이 경포대 앞바다에 빠져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럴 때에 입을 열어 “대관령은 경포대 앞바다에 빠지라!”고 하면 그대로 그 일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던 대관령이 바다에 빠지는 모습을 상상하면 실로 황당무계하고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는 동안에 받은 생각이라면 전혀 황당하지 않으며 반드시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23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을 믿으면 일어날 일이 무궁무진함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보다 현실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산이 바다에 빠지는 것과 같은 엄청난 규모의 일이 아닌 사소한 일일지라도 여러분에게서 하나님이 주신 생각이 나타난 적이 있으십니까? 또 하나님이 주신 생각을 의심 없이 말로 표현함으로써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본적은 있으십니까? 저나 여러분은 물론이고 주변을 둘러보아도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겠는가 싶을 정도로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대체 어떤 이유에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고 한경직 목사님께서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말년에 병문안을 오신 목사님들에게 유언처럼 남기신 말씀이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였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 모인 분들은 모두 교계의 원로들이셨습니다. 평생을 교단을 위해 사셨고 각종 직분을 수행하신 기독교계에 없어서는 안 될 거물들을 향해서 예수를 잘 믿으라니 참 이상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 말씀의 의미를 깊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상컨대 임종을 앞두신 한경직 목사님의 마음에 남았던 한 가지 진리는 “내가 예수를 잘 믿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구나. 예수를 잘 믿어야 함을 전해야겠다.”라는 깨달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도대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창조주이시며 무소부재하심을 교리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성경공부를 통해서 배운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지식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믿음이란 그 지식들을 긍정하고 확인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 실제로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란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샘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기는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이어져야 할 흐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의 흐름이 유지되는 상태가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 마음의 흐름을 유지시켜야만 한다는 것일까요? 돈을 예로 들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생 돈을 벌겠다고 몸부림치며 살아갑니다. 이미 많은 돈을 가진 재벌도 목표로 하는 것은 돈을 버는 것이며, 달동네에 사는 사람들도 목표로 하는 것은 돈을 버는 것입니다. 자나 깨나 마음은 돈에 대해 흐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흐름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돈에 대해 끊임없는 마음의 흐름을 유지할까요? 지난 말씀에서 성전의 구조에 대해 복습하였습니다. 떡상은 마음의 만족함을 의미합니다. 금촛대는 마음의 태양을 의미합니다. 사물은 태양이 비쳐야 보입니다. 태양이 있어야 혼돈이 없고 암흑이 사라집니다. 마음도 공백의 상태를 무서워합니다. 무엇인가 밝히 빛나는 대상이 있을 때에 그 빛 아래에서 다른 모든 것들을 대하게 됩니다. 마음의 만족을 위해 담게 된 대상에서 나오는 빛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 질서를 잡아갈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 돈을 태양으로 삼은 사람들에게는 돈과 관련된 것이 아니면 의미가 없게 느껴집니다. 돈이라는 기준으로 마음의 질서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에는 돈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돈이 마음의 공백을 채워 주리라는 믿음과 돈이 태양이 되어서 삶의 의미를 갖게 합니다. 돈을 가지면 마음이 만족하고 기쁘고 또한 밝음이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돈에 흘러 들어가게 됩니다.
부모님들은 대부분 자녀의 형통을 마음의 만족과 기쁨의 이유로 삼습니다. 자녀가 태양 같은 밝음이 되리라 믿으며 마음의 흐름을 자녀에게 향합니다. 흐름이라는 말의 의미대로 자녀를 위하고자 하는 마음에 끊임이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루어지도록 분향단이 의미하는 대로 구하고 찾고 두드립니다. 마음이 흘러가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일을 계속해서 하게 됩니다. 회사에서는 승진에 대해서 마음의 흐름이 끊이지 않습니다. 떡상과 금촛대가 의미하는 대로 승진을 하면 마음의 배가 부르리라 믿습니다. 승진이라는 태양이 첫 번째로 보이기에 승진과 관련된 일들만이 의미 있게 느껴지게 됩니다. 승진이라는 태양을 통해 밝음과 질서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떡상이 의미하는 대로 하나님만이 만족과 기쁨이 되심을 믿습니다. 또한 금촛대가 의미하는 대로 하나님을 태양으로 제일 먼저 봅니다. 하나님과의 연관성 아래에서 가족도 대하고 직장생활도 해나갈 때에 질서가 잡히고 의미가 생긴다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마음의 흐름을 지속적으로 보내게 됩니다.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한강물이 끊이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계속 흐르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믿음이라는 측면에서 돈에 대해 부러워하실지 모릅니다. 십자가복음방송을 들으시는 분들 중에도 어느 시점에서 떠나시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복음방송의 취지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흐름을 지속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일어나는 일은 한 가지입니다. 마음의 흐름이 세상으로 향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저는 이 일을 위해 매일 십자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돈에 대해서는 백 번을 실패하더라도 마음의 흐름이 끊이지 않고 백 한 번을 시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족과 기쁨이 된다는 믿음에 대해서는 포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돈에 대해서 끝내려는 사람이 없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돈이 기쁨과 만족이 된다고 믿고 돈이라는 태양빛 아래에서 모든 관계를 맺어가려는 사람들은 무덤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돈에 대한 마음의 흐름은 끊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쁨과 만족의 대상이 되시고 밝은 태양이 되셔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마음의 흐름은 너무도 쉽게 끊어지고 맙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하나님께서는 돈을 부러워하실지 모른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돈을 향하여 마음의 흐름을 유지하듯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의 흐름을 유지하는 사람이 없음을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안타깝게 여기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생 돈을 벌겠다고 애쓰다 죽습니다. 우리는 이 돈을 향한 마음의 흐름을 하나님께로 옮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방법은 십자가 생활화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고백하였던 것과 같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15장 31절에서는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고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는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마음의 흐름은 하나님을 향해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기쁨과 만족이 되심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흐름이 끊기고 자꾸만 마음이 다른 쪽으로 흘러가도록 방향이 바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흐름이 유지되면 어떠한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24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앞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전제가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의 흐름이 지속되는 상태에 대한 이해가 없는 채로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막무가내가 됩니다. 기도원에 가서 소리치면서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다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믿습니다!”라고 소리친다고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속적으로 바라볼 때에 마음의 흐름은 저절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향하게 됩니다. 이 흐름이 끊어지지 않으면 믿음도 유지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입으로 “믿습니다!”를 외쳐도 마음이 세상을 향하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경제문제 때문에 기도원에 올라가서 삼일 금식기도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리치며 기도하지만 마음의 흐름은 돈을 향해 있습니다. 돈이 있어야 기쁘고 만족할 텐데 돈이 없으니 기쁘고 만족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삼일 금식이라도 하며 하나님께 간구해서 돈을 얻고 그로부터 기쁨과 만족이 생기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마음의 태양인 돈을 허락받고야 말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의 흐름이 돈을 향하고 있기에 돈을 믿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는 돈을 믿으면서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여 돈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합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일 수 없습니다. 복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기독교인 일수는 있고 예배당조직에 속한 회원일수 있지만,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 아니며 하나님의 자녀도 아닙니다. 구원받은 선민들이 유대교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배우는 중에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고 나서 선민들의 성전은 파괴되고 나라 자체가 없어져 2000년 세월을 방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는 말씀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마음의 흐름을 하나님께로 유지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소원을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빌립보서 2장 13절에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원이 기도와 간구의 대상입니다.
예를 들어 퇴직금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 이 돈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해볼까하는 소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소원이 내 소원인지 하나님의 소원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실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는 곧 나의 마음이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흐름을 유지하며 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로 간 나의 마음 안으로 하나님께서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에 명하셔서 말라죽게 하신 일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서도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마음을 지속적으로 향할 때에 마음에는 하나님이 들어오시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들어오신 마음에는 기쁨과 만족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만족의 특성은 이 세상을 향해 어떤 소원도 갖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빛을 쐰 베드로는 산 아래의 일들을 모두 잊어버리게 되었던 것처럼 세상에서 나를 위한 소원이 하나도 없는 상태가 됩니다.
이렇게 떡상과 금촛대의 의미가 실현된 상태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소원이 생겨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중에 나의 기쁨을 위한 일이 아닌데도 소원이 생긴다면 그 소원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시편 37편 4절을 보면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소원을 이루어서 기뻐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말씀은 먼저 기뻐하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먼저 하나님으로 기쁨의 문제를 끝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생기는 소원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중에 생긴 소원들은 다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을 통해서 기뻐하는 중에 생겨난 소원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몸이 아픈 사람은 건강을 기쁨과 만족의 대상으로 여깁니다. 또 어떤 사람은 돈이나 형통을 기쁨과 만족의 대상으로 여깁니다. 이러한 마음 상태에서 생기는 소원은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기에 하나님께서 그 소원을 들어주실 리도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는 말씀은 정말 그대로 된다는 의미입니다. 다만 이 말씀 앞에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이 전제되어 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께서 거하시지 않는 상태에서 구하는 일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일 수 없습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무리 소원을 구해도 그것은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고 하나님이 들어주실 수 없는 소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믿음의 표현입니다. 내 마음의 흐름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로미오의 마음에 첫 번째로 보이는 대상이 줄리엣이었습니다. 줄리엣이 태양이었기에 그 빛 아래에서 보는 모든 일들은 줄리엣과 연관 될 때에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줄리엣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자기 집안 식구들을 원수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돈을 믿는 사람은 돈이라는 태양 빛 아래에서 좋고 나쁨을 판단하며 살아갑니다. 건강을 믿는 사람은 건강이라는 태양 빛 아래에서 판단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아닌 돈이나 건강을 믿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어떠한 뜻도 주어질 수 없고 이루어질 수도 없습니다.
요셉이 편안한 삶을 마음에 담고 있었다면 형들이 자신을 팔았을 때에 원망과 불평밖에는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음에 하나님을 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꾸었다는 것은 늘 하나님께 마음의 흐름을 유지시켰음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흐름이 하늘로 올라갔을 때에 하나님이 보여주신 뜻이 꿈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가서 형들에 대한 미움을 가졌다면 하나님에 대한 흐름은 끊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였고 요셉을 통해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을 향해 마음의 흐름을 유지시킬 수 있습니다. 세상을 보고 들으면 어느덧 마음은 세상을 향해 흘러가게 됩니다. 마음이 세상의 무엇인가를 믿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뉴스를 보다가 정치문제에 대해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문뜩 어떤 정치인이 맘에 들지 않아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상태는 그 정치인이 나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입니다. 그가 없어져야만 내가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마음에서 하나님을 향한 흐름은 끊어지게 됩니다.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태어난 냇가로 돌아가듯이 우리의 마음은 세상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마음의 기쁨과 만족이시며 태양빛이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평생 돈에 대해 흐르던 마음을 거슬러서 하나님을 향하게 할 때에 하나님의 뜻은 내 마음으로 흘러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뜻 중에 불가능한 일은 없습니다. 처음 말씀드렸던 것처럼 대관령이 경포대 앞바다에 빠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흐름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속적으로 바라봄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흐름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길이 우리의 마음이 흘러야 될 수로가 되어 주십니다. 한강 물이 어떠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듯이 우리의 마음을 끊임없이 하나님께로 흐르게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먼저 이룬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각자가 확인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직까지는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모든 사람들이 죽어서 관에 들어갈 때까지 평생 돈을 믿으며 살아갑니다. 이제 그 마음을 하나님으로 바꿀 수 있게 하시고 그러기 위하여 오늘도 눈앞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무슨 소문이 들리더라도 마음의 시선이 십자가에 고정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