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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슬기로운 용서생활>의 줄거리:
손해 본 것이 아까워서 그리고 그런 손해를 내게 발생시킨 사람에 대한 피해의식 때문에 용서가 힘든 일이고 부담스러운 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손해와 피해를 아주 정확하게 계산할 줄 아는 슬기로움이 있다면 반드시 용서하게 됩니다. 용서가 진정한 이득의 길이고 유익의 길입니다. 인생살이 중에 가장 남는 장사가 다름 아닌 용서입니다.
슬기로운 용서생활
(마가복음 11:25~26)
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26. (없음)
오늘 말씀 중심으로 <슬기로운 용서생활>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슬기로운 용서생활’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26절에 대해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26절은 내용이 없음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구절이 존재하는 이유는 필사본의 편집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필사로 기록된 여러 사본들이 있습니다. 후대로 넘어오면서 필사자들이 내용을 보충하기 위해서 다른 복음서들을 참고로 하여 집어넣은 구절들이 있는데 26절이 바로 그렇습니다. 다만 초기의 권위 있는 사본들에서는 내용이 빠져있는 경우가 있기에 제외시킨 것입니다. 우리는 25절 한 절만 집중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제목은 “슬기로운 용서생활”입니다. 최근에 방영했던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라는 드라마를 패러디해 보았습니다. 용서가 슬기로운 이유는 계산할 줄 아는 사람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는 계산에 밝은 사람들이 용서를 못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내가 얼마를 손해 보았는지 정확히 따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꼼꼼하고 계산적인 사람이라면 오히려 용서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리석고 아둔하고 무지하다면 용서할 수 없기에 용서는 슬기로움의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의 흐름을 유지하는 상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음의 흐름이 끊긴다면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흐를 때에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지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 생각을 입으로 선언할 때에 설령 그 일이 산이 들려 바다에 빠지는 것과 같은 일일지라도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늘을 향해 유지되는 동안 생기는 소원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기도하고 간구하는 대로 응답을 받게 되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용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용서는 그저 권장하는 하나의 덕목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과 연결이 되어서 용서를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믿음이 성립되거나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2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한 사람에 대해 490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상황이면 한 사람이 490번이나 잘못을 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 끝까지 용서하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성립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자면 참으로 심각한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원문을 직역해보자면 ‘만약 어떤 사람에 대해서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면 용서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는 이상 사람들과 부딪힐 수밖에 없기에 크고 작은 일들이 마음에 걸리게 됩니다. 눈에 띄게 손해 보는 일이 아니더라도 말 한 마디에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고 기분이 나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소한 일까지도 다 포함한 유형무형의 모든 손해에 대해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는 말씀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용서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용서 받을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접근이 중단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지 못하는 나를 싫어하셔서 뿌리치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좀 더 근원적인 문제가 숨겨져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주기도문에서도 살펴보았습니다. 마태복음 6장 12절을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4~15절에서 이에 대해 설명하시기를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마태복음 18장 35절에서는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시지 않으시면 영생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용서함을 통해 구원을 이루어야만 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구원 또한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본문 말씀의 중심은 용서 자체에 대한 요청이라기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은 용서를 통해 성립됩니다. 용서할 수 없다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 또한 성립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용서라는 것이 중요한 문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어 친구에게 30만 원을 빌려주었는데 돈을 갚지 않았습니다. 30만 원은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돈입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내색도 하지 않는 친구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이렇게 마음에 배반감과 미움이 걸리면 하나님에 대한 연결은 중단되게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의 흐름이 유지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흐름이 배신한 친구와 잃어버린 금전을 향하게 되자 하나님에 대한 흐름은 중단됩니다. 결국 30만 원이나 친구관계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잃게 되었으니 어마어마한 손해를 본 것입니다. 30만 원이라는 돈이 너무 적게 느껴진다면 1억 원을 떼였다고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30만 원이든 1억이든 하나님을 잃는 것에 비하자면 사소한 차이일 뿐입니다. 배신감과 미움에 마음이 향하는 동안 하나님을 향해서는 마음의 흐름이 중단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제가 미국에 계신 선교사님의 산장에서 며칠을 묵었던 적이 있습니다. 미국 LA에서 두어 시간 떨어진 곳으로써 해발 2200m의 전나무 숲으로 덮인 고지대였습니다. 그 곳에서 머무는 동안 샌디에고에서 방송을 듣던 집사님 가족과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분께서 이민초기의 일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이민생활 도중 재산을 잃고 10만 달러가 남았는데 이 돈을 교회 장로님에게 사기를 당하셨습니다. 그 때에 주변의 목사님들은 대신 화를 내시며 소송을 걸라고 조언해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께서는 다른 선택을 하셨습니다. 재판이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지는 동안 마음은 재판을 향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잃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잃을 것인가 10만 달러를 찾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향하는 마음의 흐름을 유지하기로 결정하고 10만 달러를 포기하고 사기 친 장로님에 대해서도 잊어버리기로 하셨답니다. 지금의 삶을 물었더니 미국에서 대출 없이 농사를 지으며 사는 사람은 자신들 밖에 없을 거라며 말씀하시던 것을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손해 보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만으로는 행복할 수 없다는 고백과 다름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이시며 사랑이 많으신 나의 아버지이심을 알지만 잃어버린 10만 달러를 되찾을 수 없다면 행복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손해 본 것이 내게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준다고 여겨서 마음이 묶이게 되면 하나님은 내게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줄 수 없다는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손해 본 것이 훨씬 더 강한 존재임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셈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존심을 상하게 해서 그 사람에 대해 꽁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나의 기쁨과 만족에 대해서는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 하나님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는 증거가 드러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없어도 내 자존심은 회복되어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믿기에 자존심을 건드린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용서를 강조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손해 보면서까지 원수를 향해 마음을 보낸다면 하나님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용서를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정도가 실제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는 권사님이 계신다고 생각해 봅니다. 성경공부를 많이 해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무소부재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압니다.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다는 것을 압니다. 신학박사 못지않은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론적인 지식이 믿음 그 자체인 것은 아닙니다. 어느 날 동서가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하자 마음에 미움이 생겼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지식은 소용이 없어집니다. 나의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무력한 존재임을 실제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할 수 없다면 하나님을 무가치한 존재로 믿었음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용서가 이루어질 수 있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내 마음의 재산과 성공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마음의 흐름을 유지시키는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세상의 가치들에 대한 죽음,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죽음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의 죽음이 내 안에서 지속적으로 활성화 될 수 있을 때에 하나님께 마음보내기는 흐름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흐름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손해의식이나 피해의식을 갖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손해의식은 내가 가진 소중한 가치가 사라졌을 때에 느끼는 아쉬움이나 안타까움의 감정입니다. 피해의식은 그러한 손해의 원인이 내가 아닌 외부에 존재할 때에 느끼는 감정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의 흐름을 유지하는 동안에는 손해의식과 피해의식이 생기지 않습니다. 따라서 원수도 생기지 않습니다. 원수는 내게 손해를 입히고 나를 피해자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가 손해를 입었다는 의식이 없으니 원수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마음의 흐름을 보낼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의 마음의 기쁨과 만족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하늘의 모습으로 변하신 흰색의 광채 덩어리를 보고 베드로는 황홀경에 빠지게 됩니다. 산 아래에서 꿈꾸던 모든 일을 잊어버리고 그 자리에서 초막이라도 짓고 살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마가는 9장 3절에서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고 예수님의 변하신 모습을 표현하였습니다. 빛에는 파랑 녹색 빨강의 삼원색이 있습니다. 이 구조가 마치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하늘에 계시는 파란색 빛이시라면, 성령님께서는 만물을 붙잡고 소생하게 하시는 녹색 빛이시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피 흘리시는 빨강 빛이십니다. 파란 빛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녹색 빛 되시는 성령님과 빨강 빛 되시는 예수님께서 일체가 되시면 하얀 빛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서 1장 18절을 보면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빛의 연합체이신 하나님의 일체되심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보석에 비유하자면 소유라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파란 빛을 내시는 보석이신 하나님, 녹색 빛을 내시는 보석이신 성령님, 빨강 빛을 내시는 보석이신 예수님을 우리는 보물로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전 재산이고 이 재산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하늘을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모습은 빛으로 묘사되었고 요한계시록에서도 보좌의 모습이 보석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기쁨과 만족과 행복이 필요하기 때문에 파란 색 빛의 아버지가 계시고 녹색 빛의 성령님이 계시고 빨강 빛의 예수님이 계시는 하늘을 향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골로새서 3장 2절에서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나의 전 재산이며 태어나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성공으로 믿어서 마음의 흐름을 하늘로 보내기를 유지한다면 이 세상에서 나의 재산과 성공을 빼앗아 갈 자는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용서하기가 이루어질 수 있는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의 흐름을 유지하는 동안 삶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시게 됩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무력화시키고 내게 손해를 보게 하고 피해를 주는 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 내가 손해를 보는 상황이 벌어질 수는 있습니다. 때로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나를 사랑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조차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일임을 생각할 때에 삶의 어떤 순간도 하나님의 주권 밖에서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복음 19장 10~11절을 보면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 형벌로 피해를 줄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빌라도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이용되는 존재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렸지만 앙심을 품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형들을 통해 애굽으로 보내셨다고 여겼습니다. 형들이 팔지 않았다면 노예상들에게 납치가 되어서라도 자신이 애굽으로 보내지게 되었으리라 여겼을 것입니다. 형들은 요셉을 팖으로써 그 악함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그 악함을 이용하시는 주권자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삶을 주관하신다는 주권을 믿었기에 형들을 원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요셉에게 피해를 주고자 한 형들은 악함을 드러냄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그 값을 치를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형들을 미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악함조차 주권적으로 사용하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형들을 미워한다면 그만큼 하나님을 손해 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앞서 하나님은 재산이 되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전 재산으로 생각한다면 형들은 요셉에게 어떠한 피해도 입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형들의 악함이 파괴하거나 무효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악함조차 이용하셔서 요셉을 통해 하시고자 했던 일이 이루어져갔을 뿐입니다. 이러한 과정 어디에도 미워할 이유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미워하거나 하나님의 주권을 원수처럼 여긴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입니다.
설령 예수님의 경우와 같이 빌라도에 의해서 넘겨져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한들 잃는 것은 없습니다. 나의 전 재산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파란 색 빛이신 하나님 아버지, 녹색 빛이신 성령님, 빨강 색 빛이신 예수님이 보물과 보석처럼 하늘에 보존되고 있는데 육체를 잃는다할지라도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용서를 할 수 없다면 삼원색 빛처럼 삼위일체 되심으로 온누리에 비치고 계시는 하나님을 내 보물과 보석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삶을 하나님의 주권이 이끌고 계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마음이 용서하지 못함을 통해 발각되고 노출될 뿐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가장 큰 손해는 목숨을 잃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더 오래 살았을까요?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음주 운전자에 의해서 아들을 잃으신 장로님이 계십니다. 이 분이 전도도 많이 하시고 하나님을 오래 믿으셨습니다. 하지만 만약 음주 운전자만 아니었어도 아들이 살아있을 것이라 생각하신다면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이 아들을 그 시점에 데려가시고자 하셨기 때문에 음주 운전자를 이용하신 것입니다. 음주 운전자에 의해서 하나님의 주권과 상관없이 계획에 없었던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의 이유를 갖가지로 설명합니다. 심장마비로 죽고, 암으로 죽는 등 죽음의 이유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난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데려가기 위해서 심장마비나 암을 이용하셨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과 같은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스데반 집사님은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의 죄가 용서받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으로써는 그들을 용서 못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 55~56절을 보면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라고 하였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치 금고가 열리는 것을 보았던 것과 같습니다. 전 재산이자 성공이자 보람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보자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도 분명해졌습니다. 이 땅에서의 죽음이 마치 고등학교 졸업식처럼 느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내신 성적이 좋아서 서울대 입학이 결정된 고3학생과도 같습니다. 서울대 입학이 결정되었으니 고등학교 졸업은 기쁜 일입니다. 하늘 금고가 열려서 진짜 보화이신 하나님을 보게 되자 죽음을 손해로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다면 실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하늘로 마음의 흐름을 보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보물이 하늘에 있기에 죽음조차 손해가 아닙니다. 또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성취하는 일이기 때문에 죽음조차 피해가 아닙니다. 심장마비로 죽고 암으로 죽고 사고로 죽어도 하나님이 데려가실 때를 정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으며 손해의식이나 피해의식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슬기로운 용서생활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반드시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하늘에 시선을 향하기는 간단합니다. 돈을 지속적으로 바라보며 마음의 흐름을 유지하듯이, 부모가 자녀를 지속적으로 바라보며 마음의 흐름을 유지하듯이, 정치가가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지속적으로 바라보며 흐름을 유지하듯이, 십자가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주님이 놓으신 마음의 수로를 따라 마음을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이 마음의 흐름을 유지하는 가운데 용서하지 못할 이유는 절대로 없습니다. 슬기로운 용서생활이 여러분들의 몫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유지시킴으로써 내 마음이 주님께서 놓으신 하나님 우편까지의 수로를 따라 흐름을 유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흐름이 유지되는 가운데 용서하지 말아야 될 이유로써 손해의식과 피해의식과 원수성립이 불가능한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