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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현장을 하늘로부터 살기>의 줄거리:
영국 성공회의 대주교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들어가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이 실제 나타나 응답하시려 하는 바람에 너무나 놀란 나머지 심장마비가 와서 죽었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이상하고 놀랍게도 기독교 종교 지도자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땅에 사는 사람이 지금 연결되는 일에 대해 무지합니다.
현장을 하늘로부터 살기
(마가복음 11:27~33)
27.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거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28. 이르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30.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31.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32. 그러면 사람으로부터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는지라
33.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현장을 하늘로부터 살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현장을 하늘로부터 살기’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대통령이나 혹은 좋아하는 연예인을 보는 것도 힘들지만 살아계셔서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조차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예전에 목사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듣게 된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영국의 성공회의 대주교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들어가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랴”라고 하셨습니다. 대주교가 깜짝 놀라서 눈을 떠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기도를 하는데 또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랴”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이번에도 대주교가 깜짝 놀라서 눈을 떴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 기도를 하는데 세 번째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번에는 대주교가 물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까?”라고 물었더니 하나님께서 “그렇다. 네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라. 내가 들어주겠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대주교는 너무 놀라서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합니다.
이 우스갯소리에는 신랄한 비판이 담겨져 있습니다. 기독교 종교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실제로 하나님과 연결되는 일에 대해서는 얼마나 무지한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저 또한 직접 그러한 모습들을 확인해왔습니다. 신학교의 총장님이나 교수님들과 대화하면서 이 분들이 살아계신 하나님과 직접 연결되는 일에 대해서는 참으로 무관심하고 무지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본문을 염두에 두자면 무지하다기 보다는 의도적으로 가로막고 방해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현장을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을 매우 꺼려했습니다. 예수님이 전하시는 일들이 각 개인에게 일어나면 종교지도자들에게 불리한 무언가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하늘과 땅의 직접 연결을 무서워하며 방해하거나 무관심을 가장하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삶의 현장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일은 예배당이나 기도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시장에서 이루어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에 하늘을 팔고 하나님 이름을 파는 종교 장사는 끝이 납니다. 종교로 장사가 가능한 이유는 종교지도자들이 종교라는 집단 위에 군림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독점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관계하기 위해서는 종교집단에 속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이름 팔아먹는 종교 장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이름을 팔아먹는 종교 장사꾼들은 대동강 물을 팔아먹었던 봉이 김선달을 연상케 합니다. 일반적으로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일들이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참석하는 예배당조직의 회원이 됩니다. 예배당조직에서 베푸는 세례를 받고 일정한 형식을 따라 드려지는 주일예배에 참석합니다. 그리고 직분을 받고 헌금을 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사실상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구원은 이러한 거짓말들로 포장되어왔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목회를 하던 앞잡이였습니다. 이러한 소리는 장사꾼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소리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은 대단하고 탁월한 영성을 지닌 종교지도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많은 신학대학 총장이나 교수님들만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성경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성경공부를 많이 하는 대한민국 교인들에 비하면 성경에 대해 훨씬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들 각자는 하나님과 연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뿐만이 아닙니다. 일곱 귀신들린 창녀였던 막달라 마리아, 남편을 여섯 번이나 바꾸었던 이방인이었던 수가성 여인, 흉악한 귀신들린 딸을 두었던 이방인 수로보니게 여인, 병 걸린 종을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던 이방인 백부장도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천지를 지으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실은 하나님과의 연결은 인간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중에 가장 쉬운 일입니다. 살아계시며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연결되는 것은 열심히 공부하고 직장을 구하고 또 그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그런데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이 일을 숨기고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사회의 최고의결기관인 산헤드린공회에 소속된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 신앙을 특징으로 하고 메시아의 출현에 대한 열렬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정작 메시아이신 예수님에 대해 어떠한 공적 지위를 부여하거나 자격을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산헤드린공회의 권위를 아래로 두어야만 나타날 수 있는 말씀과 행동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귀 새끼를 타고 호산나를 외치는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산헤드린공회에서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한 적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판을 뒤집어엎으시고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이 성전정화 사건을 통해 유대사회의 사상적 정점에 있던 대제사장들은 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당시의 유대교는 성전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기둥으로 삼아 율법의 이해와 구전된 교리들을 엮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대제사장이 허락한 일에 대해 반기를 든다는 것은 유대교 전체에 반기를 드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당연히 산헤드린공회에서도 유대교를 비판할 권위를 예수님께 허락한 적은 없습니다.
본문에서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출처를 묻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당연히 하늘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하늘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과 연결되어 계심으로써 주어지는 권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끊이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도록 유지하셨습니다. 그 마음의 흐름을 타고 하나님의 주권이 내려와서 예수님의 말과 행동을 통해 표현되었기에 권위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당시의 유대교의 지도자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이해할 수도 없었고 수용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개별적 연결을 이룰 수 있음을 말씀하셨고 예수님 스스로도 하나님과 연결되어 계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연결을 독점하던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이름 팔아먹기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래 성전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연결을 위해 존재하였습니다. 선민 각자가 성전의 구조를 바라보면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연결되지 못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즉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이 들어왔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도 기도를 가르쳐주시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시작하셨습니다.
지성소는 가장 거룩한 장소입니다. 마음의 지성소는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대상에 대한 믿음이 표현되는 곳입니다. 사람들은 돈이 마음을 채우리라 믿고 돈이라는 이름을 붙잡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가족의 형통을 붙잡기도 하고 권력이나 건강 등을 붙잡기도 합니다. 그럴 때에 성전의 구조를 생각하면서 마음의 지성소에 다른 이름이 들어온 상태가 잘못 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성전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어린양이 상번제로 드려졌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이 들어온 상태가 어린양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고 인정하여 하나님과의 연결은 회복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전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성전건물을 하나님의 임재와 대체시켰습니다. 성전건물을 곧 하나님처럼 여기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성전은 그 자체로 숭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은 성전을 장악함으로써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선민의 종교생활을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를 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놀라서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주교의 우스갯소리에 담긴 비판이 의미하는 바도 이와 같습니다. 주교에게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대체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는 것은 성전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 관습과 문화입니다. 이러한 종교 활동이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연결을 대체하게 되었기에 실제로 하나님이 나타나시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여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게 된 것입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 성전건물이 하나님께서 임하신 것과 똑같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만들어낸 종교적 관습을 따라 행동하는 것을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 착각하게 합니다.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성도이자 교인이라 여기며 살아가게끔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의 유대교뿐만 아니라 현재 기독교계에서도 발견됩니다. 주일날 예배당에 출석해서 절기를 지키고 헌금내고 직분을 받아서 충성합니다. 예배당조직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에 참석하고 삶에 문제가 생기면 세상적인 기준을 따라서 해결을 간구합니다. 이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관계는 해결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예배당조직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을 하나님에 대해 열심을 갖는 것으로 착각하게 하였습니다. 목사에게 충성하는 것을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하였습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입니다.
저 또한 한때 어떻게 하다가 이런 사기를 받아들이고 성도들에게 요청하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우리가 직접 연결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늘로부터 오는 뜻을 받아 살아가야만 합니다. 마치 생방송이 진행되듯이 하나님의 뜻이 말과 행동을 통해 나타날 수 있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교계는 그러한 삶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치 않고 그저 예배당에 나올 것을 요구합니다. 주일성수와 헌금을 비롯한 종교적 의무를 다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말합니다. 하나님을 팔아 장사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조직과 교단을 유지하기 위해 신학교를 만들고 교수들을 고용하여 목사를 키워냅니다. 교단울타리를 빠져나가면 하나님 품을 떠나는 것으로 여기고, 교단울타리에 들어오면 하나님 품에 들어온 것으로 여깁니다. 이렇게 사람들을 혹세무민하는 것이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교였고 유대교에서 빠져나와 예수님을 믿으면서 살겠다고 한 천주교였고 천주교에서 빠져나와 예수님을 잘 믿겠다고 한 개신교가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종교를 장사로 여기는 한 하늘로부터 오는 현장 삶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현장 삶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 모습이 예수님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요한복음 3장 13절을 보면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시던 분이 왜 이 땅에 오셨고 또 하늘에서 오신 분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오신 분으로써 하늘만을 자랑하시고 선전하셨습니다. 하늘에서 온 사람의 관심은 누구를 만나든지 그가 하늘과 연결이 되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하늘에서 온 사람은 곧 하늘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늘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 땅에서는 절대로 기쁨과 만족의 대상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늘을 아는 사람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기쁨과 만족이 있다면 땅에 매여 있던 사람이 드디어 하늘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하늘의 좋음을 느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을 받아들였던 사건을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은 지쳐서 우물가에 앉아계셨습니다. 그러다 여인이 예수님을 받아들여서 하늘의 좋음을 나눠 갖기 시작하자 예수님께서는 기운이 회복되십니다. 이것이 하늘을 아는 사람이 땅에서 기쁨을 누리는 방식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돈이 하늘에서도 똑같은 의미의 돈이겠습니까? 하늘에서 온 사람이 돈을 본다면 어떻게 느낄까요? 변화산에서 베드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빛을 마주할 때에 산 아래 인간세상의 일들을 모두 잊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좋으심 앞에서 이 세상의 어떤 가치도 좋게 느껴질 수 없음이 드러났던 것입니다.
하늘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돈을 보실 때에 좋게 여기실 수가 없었습니다. 건강이나 장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의 좋음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서울대나 하버드대 합격이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설령 대통령 자리라도 하늘을 아는 사람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쓰시기 위해서 그 자리에 앉히신 것이 아니라, 내가 대통령이 하고 싶고 장관이 되고 싶고 국회의원이 되고 싶다면 하늘로부터 온 사람일 수 없습니다. 이는 목회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 큰 예배당을 짓고 싶다면 하늘로부터 온 사람일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우편까지 이어진 동선을 수로로 삼아서 마음의 흐름을 하늘로 유지할 때에 하나님의 뜻은 그 흐름을 타고 삶의 현장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진 목회자가 이 땅에서 예배당 건축을 향해 매진할 수는 없습니다. 예배당이 좁은 탓에 예배를 나누어 드리고 아동부를 위한 자리를 마련할 수 없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좁은 예배당에서라도 하나님께 마음을 향할 수 있을 때에 온전한 예배는 드려질 것이고 그 가운데 아이들도 훌륭히 성장해갈 것입니다. 예배당을 크게 만든다고 해서 성도들이 찾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서울이나 경기지방의 대형교회들을 보면 겨우 3부 예배까지만 예배당이 찰 뿐 나머지 예배 때에는 텅텅 비어있습니다. 코로나19 사태가 벌어지기 전부터 이미 예배당은 비어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하늘로부터 온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음의 대상을 바꿀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늘로부터 온 사람은 절대로 이 땅에서 좋음을 찾지 않습니다. 하늘의 좋음으로 마음을 채운 상태에서 이 땅을 살아갈 뿐입니다.
이를 두고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변화산의 베드로의 모습을 생각해봅니다. 상상력을 발휘해서 베드로의 눈이 변화산에서 보이셨던 하나님께 묶여있다고 생각해보겠습니다. 베드로는 항상 하나님을 뵙고 있습니다. 눈은 변화산에 있는데 몸은 산 아래 삶의 현장으로 내려옵니다. 이때에 베드로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 무엇일까요? 몸이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지 눈은 여전히 변화산에서 영화로운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기에 기쁨의 찬송과 감사가 나올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온 사람은 바로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마음의 시선을 하늘로 향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삶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권위가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늘에 머물러 계셨고 하나님과 천국의 기운에 휩싸여 계셨습니다. 풍랑을 만났을 때에도 제자들은 마음이 세상에 머물러 있었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여 살고자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하늘에 두고 계셨기에 몸은 풍랑 속에서도 깊은 잠을 주무실 수 있었습니다.
다시 상상력을 발휘해서 우리의 눈을 시리아의 내전 한복판에 두었다고 상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몸은 공기 좋고 물 좋은 평화로운 강릉에 있을지라도 눈은 시리아의 내전을 보고 있기 때문에 입에서는 원망과 불평과 두려움의 소리 밖에는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눈을 하나님이 계신 하늘에 둔다면 입에서는 기쁨의 소리 외에는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에서 온 자들의 모습입니다.
우리 마음의 흐름이 하늘을 향해 유지되는 되는 중에, 하나님의 뜻은 그 흐름을 따라 땅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받아 살아가게 될 때에 이 땅에서 좋을 것은 없습니다. 땅에서 좋음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하늘을 살아간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금욕주의는 좋음을 막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좋으심을 얼마든지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좋게 여기십니다. 창조 후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반복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좋아하여 마음이 하나님을 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 수가성 여인, 수로보니게 여인, 백부장은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연결이 이루어지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대신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문제 대신 십자가를 보는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내가 문제를 보면 하나님은 나를 문제로 보십니다. 반대로 삶의 현장에서 세상을 등지고 십자가를 바라보면 하나님은 삶의 문제를 보십니다. 삶의 문제가 어려운 이유는 내가 보는 바람에 하나님이 나를 문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문제는 내 몸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주관아래에 있기에 마음은 마땅히 하나님을 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세상을 향하게 되었음을 문제시하십니다.
삶의 현장에서 눈에 보이는 문제들을 마음으로 등지고 십자가를 볼 때에 문제들은 하나님이 보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반대로 내가 십자가를 등지고 삶의 문제를 본다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문제로 여기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십자가로 돌리시기 위하여 하는 일마다 막으실 것이고 하는 일마다 방해하실 것이고 좌절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한 삶은 어려워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바라보지도 않았는데 삶의 문제들이 원하는 대로 잘 해결되어 간다면 정말 큰일입니다. 그 사람은 선민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버린 사람일수록 삶의 문제는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십자가를 바라보며 삶을 등지고 마음은 하늘을 향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때에 현장에는 하나님의 뜻이 내려오게 될 것입니다. 현장을 하늘로부터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삶의 현장에서 보이는 모든 것들을 마음으로 등지고 십자가만을 지속적으로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을 향한 마음의 흐름이 유지되게 하시며 그 흐름을 따라 하늘로부터 오는 뜻을 따라 현장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