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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2

녹취문: 버려진 돌 예수의 폭포수 은혜_태승철 (마가복음 12:10~12)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6.17|조회수69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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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버려진 돌 예수의 폭포수 은혜>의 줄거리: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버려짐의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었나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버려진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엄청난 역습과 반전이 예수님을 향한 내 믿음 안에서 경험 되고 있습니까? 폭포수 은혜를 듣기만 하였던 이유는 등잔 밑이 어두웠던 탓입니다.


버려진 돌 예수의 폭포수 은혜

(마가복음 12:10~12)

 

10.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11.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12.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버려진 돌 예수의 폭포수 은혜>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버려진 돌 예수의 폭포수 은혜

요새 날씨가 무척 더워졌습니다. 그래서인지 폭포수 은혜라는 말이 더 강하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나이아가라폭포를 두 번 관광한 적이 있습니다. 한 번은 목사님들과 함께 갔었는데 나이아가라폭포의 웅장한 모습 앞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시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목사님들이 어떤 기도를 하셨을지는 얼마든지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이 장엄한 폭포를 창조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폭포와 같은 은혜가 목회현장에 임하기를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폭포수와 같은 은혜 혹은 바다와 같은 은혜를 받기 원합니다. 여러분은 이 더운 날 은혜의 바다에 들어가서 수영하는 것처럼 살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이러한 폭포수 은혜가 의외로 간단하게 주어질 수 있음이 드러납니다.

 

1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돌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우리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폭포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진리입니다. 다만 믿는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이해를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한 여성이 시집을 가는 상황을 생각해봅니다. 시집을 간다는 것은 한 남자와 결혼하여 같이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결혼하는 남자는 나의 남편이기도 하지만 시부모님의 아들이고 다른 형제자매도 있을 것이며 누군가의 친구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관계의 복합체입니다. 따라서 시집을 간다는 것은 이러한 모든 관계에 함께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에 담긴 의미 또한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내용은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아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건축자들이 버린 돌에 비유하셨습니다. 믿음의 핵심 원리는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당신의 자리로 부르고 계시기 때문에 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예수님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으면 건축자들이 버린 돌의 자리에 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도 같이 버려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라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과의 동일시를 염두에 두자면 예수를 믿어서 버려진 돌이 되면 천국에 간다.”라고 풀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는 의미에 집중하여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버려진 돌이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 할 때에 폭포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아주 유명한 부흥강사의 부흥회에 참석해야만 폭포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폭포수 은혜를 경험하지 못했기에 부흥회도 점차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부흥회는커녕 예배당모임 자체도 흔들리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도 받지 못하는 은혜를 받는 방법이 오늘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그 방법은 버려진 돌이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란 집을 짓다가 남은 돌입니다. 집 어디에도 끼워놓을 곳을 찾지 못하여 쓸모없다고 버린 것입니다. 그 버려진 돌은 예수님이고 돌을 버린 건축자들은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조직과 관련해서 예수님을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여겼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버려진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아 건축을 해나가시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해나가시는 건축은 우리가 받을 수 있는 폭포수 은혜입니다.

예수님을 버린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버린 모든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세상을 좋아합니다. 세상을 좋아하고 세상의 가치들을 갖고 싶어서 과학을 동원하기도 하고 자기계발 등의 여러 가지 방법을 이용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종교인들은 세상을 초월한 신을 만들어 그 힘을 빌리고자 합니다. 이러한 시도가 조직화 되어서 종교가 만들어집니다.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버렸다는 것에도 이와 같은 배경이 있습니다. 포괄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 세상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세계로부터 예수님은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세상 것을 너무 좋아해서 세상 것만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버린 것입니다. 현재 지구에는 75억 명의 인류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보다 예수님을 좋아하는 사람이 극히 적기에 모든 사람이 세상을 좋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인류로부터 버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세상은 세상의 가치를 많이 가진 사람은 승자로 여기고 세상의 가치를 적게 가진 사람은 패배자나 낙오자로 여깁니다. 다만 패자든 낙오자든 와신상담하며 재기를 노릴지언정 세상에 속함을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올림픽 경기에서 메달을 따든 못 따든 참가한 모든 선수가 올림픽 출전자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축출되셨습니다.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경쟁에서 추구할 자격조차 없는 상태가 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상태는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곧 세상의 가치를 좋아하고 추구하는 경쟁이 끊이지 않는 세상으로부터 버려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세상 밖으로 버려지신 예수님의 위치와 처지와 자리를 나의 처지와 위치와 자리로 여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돈을 벌고 싶어 합니다. 돈은 세상에서 가장 보편적인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또 사람들은 권력을 갖고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권력도 돈 못지않은 보편적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을 가질 때에 예수님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동일시해야하는 예수님은 돈이나 권력 같은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경쟁으로부터 완전히 제외된 자리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이라는 경기장에서 선수자격을 박탈당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을 좋아하면서 예수를 믿을 수는 없습니다. 세상을 좋아하려면 예수를 버려야 하고, 예수를 믿으려면 세상을 좋아하고 추구하는 삶이 중단되어야만 합니다.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버리는 방법으로 십자가를 선택합니다. 산헤드린공회에 잡히시고 십자가에 매달리시기까지의 과정은 참혹한 모욕과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체포되신 예수님께 사람들은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마구 때렸습니다. 한 사람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한 때는 예수님을 환영했던 민중들이 모두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다 벗기고 갈고리가 달린 채찍으로 채찍질하였습니다. 채찍질을 할 때마다 갈고리가 살을 뜯어냈습니다.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유대인의 왕이라 조롱하였으며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버린 방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고 또 육체적인 수치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가치가 티끌만큼도 주어질 수 없는 자리에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예수님은 바로 이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버려진 돌로써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주어질 수 없는 자리에 계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이야말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여전히 이 세상에서 이루고 싶고 가지고 싶고 하고 싶은 바람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중단된 상태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모든 굴욕과 경멸과 수치가 종합세트로 주어져 있었습니다. 또한 인간의 육체가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꼼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는 세상에 대한 운신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이러한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한다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자리가 싫다면 예수님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 것들을 좋아하여 추구하고 있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하나님이 내게 정해주신 자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자리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본래 그러한 취급을 받으셔야 될 이유가 전혀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러한 취급을 받으신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나의 자리이고 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정해주신 나의 자리를 굳건하게 붙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모습을 나의 모습으로 여기는 자아상을 굳게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면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다.”라는 말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직장이든 가정이든 언제 어디서나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예수님의 자리를 나의 자리로 여기고,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라는 자아의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가치를 좋게 여기는 사람들의 세계로부터 버려지셨음을 마음으로 바라보며 고집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마음과 삶에는 반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마주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깨끗해진다는 것은 더러움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더러움은 마음이 잘못된 것으로 채워짐으로부터 발생합니다. 마음은 비어있기에 채워지고자 합니다. 다만 사람의 마음은 본래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온전히 채워질 수 있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류는 세상을 좋아하게 되었고 세상의 가치를 통해 마음을 채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간음이며 더러워진 상태이고 죄악입니다. 무슨 잘못을 저질러야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든 건강이든 가족이든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것이 죄악입니다.

따라서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에 의해서 버려진 예수님의 처지는 역설적이게도 죄로부터의 해방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그 자리는 운명적이고 숙명적인 나의 자리입니다. 이것을 고집하며 받아들일 때에 마음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을 정도의 깨끗함이 유지되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누구 앞에서든 언제 어디서든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임을 고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회사에서 최고의 가치는 많은 월급과 승진일 것입니다. 모든 직원들이 그 가치를 위해 매진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유지해나가야만 합니다. “나는 월급과 승진의 가치들과는 상관이 없는 자리에 계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다. 그러므로 내가 추구할 것은 월급이나 승진이 아닌 하나님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마음은 깨끗해져서 하나님이 들어오시게 됩니다.

이것이 하늘의 은혜를 폭포수처럼 경험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부흥회를 쫓아다니며 유명한 목사님께 안수기도를 받아야 폭포수와 같은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먼저 예수님이 붙잡히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까지의 상황을 꼼꼼히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모습과 자리가 하나님이 정해주신 나의 모습이며 나의 자리임을 인정할 때에 폭포수와 같은 은혜는 임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갖기는 언제 어디서든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대할 때에, 직장인이 회사에서 일할 때에, 학생이 학교에서 공부할 때에도 십자가에서 죽은 자임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세상이 정해준 자리에서 나라는 자아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정해주신 자리에서 나라는 자아상을 갖기를 고집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가치가 되어주실 것이며 폭포수와 같은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 중 최악으로 여겨지는 일들을 몇 가지 생각해보겠습니다. 회사에서 쫓겨나서 당장 먹고 살 길이 없습니다. 혹은 암에 걸려 죽어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과정보다 괴롭고 힘들진 않을 것입니다. 실질적인 관점에서는 좀 힘들어도 먹고는 살고 있고, 전세든 월세든 거할 집이 있으며, 건강이 좋지는 않아도 죽을 정도는 아닌 것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짐으로써 폭포수와 같은 은혜를 누릴 때에 마음과 삶에는 엄청난 격차가 생겨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나의 모습과 현재 나에게 주어진 상황과의 차이로부터 은혜는 느껴지게 됩니다. 우리의 상황이 예수님이 처해 계셨던 상황보다 나쁘지 않다면 은혜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셈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정해주신 우리의 자리는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세상에서 가능한 모든 경멸과 모든 수치가 집중되는 자리이며, 인간의 몸이 겪을 수 있는 최대한의 고통이 최고치를 이루는 자리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버려지는 과정보다 못한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해주신 모습이 나의 모습임을 굳건히 붙잡는 자는 입만 열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갖는 자가 감사하지 못할 상황은 존재할 수 없으며 세상의 그 누구도 감사의 마음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버려지는 과정 중에 나타난 자리와 모습을 나의 자리와 나의 모습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감사를 빼앗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도 못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마음에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감사로 번역되어 나타납니다. 그리고 삶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버려진 돌이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면 지금 상황은 은혜의 바다임을 알게 되고 감사에 감사를 더해 가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은 나를 통해 이루어 가실 하나님의 건축역사를 위한 토대가 됩니다.

정리해봅니다. 버려진 돌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지금 상황의 처지와의 차이를 계산해내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그 감사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 가시기 위한 머릿돌이 되고 주춧돌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삼중의 은혜의 폭포수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삼중의 폭포수 은혜는 세상 것을 좋아할 수 없는 자리로 쫓겨나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함으로써 시작됩니다. 그러면 십자가에서 세상 것을 좋아하던 나의 마음이 깨끗해져서 하나님을 얻게 됩니다. 또 그럴 때에 내게 주어진 상황에 대해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감사를 토대로 삼으셔서 날마다 뜻하신 대로 나의 삶을 건축해나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역설과 반전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가치들을 향하여 질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세계로부터 완전히 버려지셨습니다. 그렇게 버려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를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버려지기를 소원하고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꿈과 이상과 비전은 예수님처럼 세상으로부터 버려지고 차단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함으로써 이 일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자리는 세상의 좋은 것들을 위해서는 꼼짝달싹도 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사지가 못 박혔으며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을 썼으며 배는 창에 찔려 물과 피를 다 흘리셨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모든 경멸과 모욕과 수치가 집중된 자리입니다. 그 예수님의 자리가 하나님이 보여주신 나의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경멸과 수치와 고통을 당하신 모습 앞에서는 누구도 나에게 경멸과 수치와 고통을 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경멸해도 그 경멸은 내가 서있는 자리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에서 악성 댓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예수님과 동일시할 때에 그 악성댓글이 나의 마음에 어떠한 모욕도 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경멸과 모욕에 비교하자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자리는 세상의 어떠한 경멸과 모욕으로부터도 완전히 자유로운 자리입니다. 놀라운 반전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이 세상에서 이기고 승리하고 사람들의 각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봄을 지속함으로써 세상의 가치를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버려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버려진 돌이신 예수님을 따라 버려진 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주어지는 반전의 역설적인 폭포수 은혜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세상의 가치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세계로부터 완전히 버려진 돌이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세상으로부터 버려지는 것만을 목표로 삼고 삼중으로 주어지는 폭포수 은혜를 날마다 경험할 수 있게 우리의 마음에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십자가를 견고히 붙잡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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