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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소유권 착각을 허용하시는 이유>의 줄거리:
기뻐해도 슬퍼해도 죽을 듯이 두려워해도 지극히 안심해도 억울해도 원통해도 모두 다 착시현상에 근거된 마음상태라면 이처럼 허무한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나 싶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는 이 피조의 세상 안에서 하나님께서 소유권 착각을 묵인하시고 허용하십니다. 선민들이 착시현상을 극복하기를 바라시면서.
소유권 착각을 허용하시는 이유
(마가복음 12:13~17)
13.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14.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15.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16.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17.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소유권 착각을 허용하시는 이유>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소유권 착각을 허용하시는 이유’
하나님께서 소유권 착각을 묵인하시고 허용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문을 보면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한마음이 되어서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질문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14절을 보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라고 한 것이 질문의 내용입니다.
앞서 보았듯이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외식하는 자들로 규정하셨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으로는 전혀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들이 마음으로 좋아했던 대상은 돈과 사람들의 관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택한 것이 율법주의였습니다. 또한 이들은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자들로써 로마의 식민지 지배를 싫어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한편 헤롯당은 바리새인과는 다르게 명분 대신 실세를 추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성격에는 차이가 있었을지언정 이들 또한 마음에서 좋아했던 것은 돈과 권력이었습니다. 다만 이것을 얻는 방법으로 당대의 실세였던 로마당국과 타협하고자 했습니다. 이들이 헤롯당이라 불린 이유도 식민지인 유대나라 안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던 헤롯 왕가를 추종했기 때문입니다.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자인 바리새인과 실익을 위해서는 지배국인 로마와도 타협하고자 했던 헤롯당은 반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들이 한 마음이 되어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시도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예수님 버리기가 이들의 공동의 관심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 곳곳에서 하늘에 속하셨음을 드러내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23절에서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고, 17장 14절에서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또한 18장 36절에서도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의 공백을 가지고 있기에 채우고자 합니다. 이 마음을 채우기에 세상의 가치가 좋다고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으로써 이 땅에 오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도 마음을 채우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는 다르게 하나님 아버지로 마음을 채워서 기뻐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또한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고자 합니다.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이러한 예수님을 마땅치 않게 여겼습니다. 앞서 10절에서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라고 말씀하신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건축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정치적 성향은 달랐으나 세상 가치를 좋아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이 예수님을 버리는 일에 대해서는 일체 합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궁리하여 짜낸 계책이 바로 소유권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 질문은 교묘합니다. 예수님이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고 하셨다면 국수주의적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매국노로 선동하여 죽일 명분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셨다면 헤롯당이 로마에 대한 반역을 운운하며 죽일 명분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 질문은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준비할 수 있는 완벽한 올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도 예상치 못한 답변을 하심으로써 이들의 계획을 수포로 만드십니다. 17절을 보면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고 하였습니다.
한편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소유권에 대한 질문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여기서 가이사란 로마의 초대 황제인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입니다. 이 이름으로부터 카이사르는 황제를 가리키는 일반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황제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입니다. 황제는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가 언제 죽을지를 아십니다. 살고 죽는 것뿐만 아니라 일생의 시간표를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이러한 이해를 염두에 둔다면 황제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소유권도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가지시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버려진 돌이었습니다. 세상을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은 버려졌습니다. 공회에 잡히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돌아가시는 과정이 버려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버려지는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버려진 자리가 하나님이 정해 주신 나의 자리이고 예수님의 모습이 나의 모습임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사람들 앞에서 잘난 사람이 되기를 원했고, 세상의 가치를 좋아하는 사람들 속에서 똑같이 세상의 가치를 탐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한다는 것은 이 모든 모습을 다 버리고 어떠한 세상의 가치도 가질 수 없는 자리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과 동일시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는 세상을 버리라 말씀하시면서도 세상에 속한 자들의 소유는 인정하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신 내용이 이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세상에 속한 자들의 소유권을 인정하시는 것일까요? 사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누구도 소유를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소유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소유권을 허용하신 것이 아니라 소유권에 대한 착각을 허용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에게는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수님을 나의 자리, 나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도록 정해놓으셨습니다. 한편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들에게는 세상의 가치에 대한 소유권의 착각을 갖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 가이사의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황제의 목숨도 하나님이 주관하시기에 황제조차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두 착각 속에서 소유권을 주장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황제는 “내 몸은 내 것이다, 로마제국은 내 것이고 모든 재물도 내 것이다.”라는 착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착각을 묵인해주고 계실 뿐입니다. 그로부터 하나님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말씀이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소유권에 대한 착각은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에서도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19장 10~11절을 보면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에게 예수님에 대한 생사결정권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빌라도 위에 계신 하나님의 주권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의 소유권 착각을 묵인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 번째,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의 소유권 착각을 묵인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나타날 수 있는 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착각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뚜렷하게 돋보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이란 소유에 대한 선택의 시험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의 공백을 가지고 있고 채우고자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 세상의 가치를 많이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재벌들이 세상의 관심을 받는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재벌처럼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돈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은 재벌들의 이야기가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연예인들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대중의 인기를 얻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도 인기를 얻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세상의 가치를 좋아하고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모 재벌그룹 회장의 개인재산이 10조 원이라는 뉴스가 나왔다고 해보겠습니다. 그 뉴스를 보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면 “그 재산의 백분의 일, 아니 만분의 일이라도 가졌으면 좋겠다.”라고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러한 말을 한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칼을 꽂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하나님의 무한하심에 비하자면 10조 원은 티끌에 불과하다. 그만한 부분의 하나님 아버지를 더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누가 사업을 해서 10억을 벌었다, 암에 걸린 사람이 뭘 먹고 나았더라, 누구 아들이 일류대학에 입학했다더라, 결혼을 했는데 가문이 어마어마하더라, 자녀가 검사고 판사라더라. 세상에서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하며 부러워하고 따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버려진 자로써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만을 갖고 싶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보이기 위한 선택의 장소가 이 세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세상 것에 대한 소유권 착각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너도 저 사람들처럼 세상의 가치를 갖고 싶으냐?”라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언젠가 뉴스를 보니 9억짜리 바이바흐라는 차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도 저런 외제차를 타고 싶으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럴 때에 바이바흐에 대해 갖는 기대만큼을 하나님 아버지께 돌려보내드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소유하고자 하는 열망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이 열망이 돋보일 수 있도록 세상에 대한 소유권 착각을 인정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가치를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들 틈에서 사는 동안에 그 세상 사람들로부터 버려진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는 중에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을 소유하기를 더욱 열망할 수 있습니다. 아는 사람의 자녀가 서울대 들어갔다고 자랑하는 것을 들으면 나는 그만큼 하나님 아버지로 기뻐하고자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누가 사업을 해서 10억을 벌었다고 수근 거릴 때에 나는 그만큼 하나님 아버지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여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누가 여든 살이 되도록 아픈 적이 없었다고 건강을 자랑할 때에 나는 건강을 좋아하는 만큼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더 가졌으면 좋겠다고 여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에 비록 돈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몸이 아플 수도 있습니다. 자녀는 별 볼일 없을 수도 있습니다. 자랑할 만한 명품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좋아하는 것들의 크기만큼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더 가졌으면 좋겠다고 열망하는 자녀들의 믿음을 보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자 이 세상의 주인이심에도 불구하고 소유권 착각을 허용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아셨기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의 마음입니다. 비어있는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고자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온전한 기쁨과 만족으로 가득 채워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많은 경우에 세상 사람들과 같은 마음가짐이 되고는 합니다. 오히려 예배당에 충성 봉사하여 복을 받아서 세상 사람들처럼 되고야 말겠다는 잘못된 마음을 갖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두 번째,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의 소유권 착각을 묵인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녀들의 믿음을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앞서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를 살펴보았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사결정권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소유권의 착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착각은 빌라도 같은 권력자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회사에 다니는 직원은 사장이 자신의 밥줄을 쥐고 있다고 믿기 마련입니다. 또 북한에 대해서는 김정은이 북한 사람들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김정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또 중국과 한국의 관계는 신진핑 주석과 문재인 대통령의 양국 권력자들의 외교력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미국과 중국의 관계에 대해서는 트럼프의 독단 속에 냉전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국가 간의 마찰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들에 대한 판단은 세상에 대한 소유권 착각으로부터 일어나는 착시현상입니다. 김정은 위원장이 결코 북한의 운명을 좌우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여겨진다면 착시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 앞에서 생사결정권을 주장하였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 결정권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빌라도의 결정권 위에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보셨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사장님이 특별한 이유도 없이 나를 해고하였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사장을 욕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회사를 위해서 피와 땀을 바쳐가며 일했는데 하루아침에 해고하다니 저런 못된 사람이 어디 있느냐!”라고 화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사장 위에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염두에 둘 수 있어야만 합니다. 결코 사장이 마음대로 나를 해고시킬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해고를 당했기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지라도 그렇다면 하나님의 주권은 사라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은 거짓말일 수 없기에 내가 착시를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사장이 회사에서 나에 대한 해고를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착시입니다. 실은 그 사장 위에 모든 결정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선 11장 3절에서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말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싶으시다면 소유권 착각 속에 빠져있는 사람들의 결정을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길입니다. 사장이 나를 해고한 것이 부당하다고 따진다면 실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따지는 것입니다. 해고라는 문제에 대해서만은 하나님의 주권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고백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변명하기를 기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가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였다면 스스로의 무죄를 주장하셨을 것입니다. 그러셨다면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의 모든 판단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팔렸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형들이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 원망했다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노예로 팔리는 일조차 형들의 권한이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일이라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싶으시다면 세상에서 소유권 착각을 일으키는 자들을 묵인하고 허용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장이 해고시키면 따르면 됩니다. 원망하면 사장을 주권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장 위에 하나님을 주권자로 인정하신다면 따르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윗이 반란을 피해 피난할 때에 시므이가 저주하고 돌을 던지며 비난하였습니다. 그 때에 옆에 있던 장군들이 시므이를 죽이고자 했지만 다윗이 막았습니다. 시므이는 자신이 다윗을 비난할 권리가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다윗은 그 시므이 위에 존재하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보았습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이 자신을 비난하게 하신다고 여기며 받아들일 수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다윗을 다시 왕위에 돌려놓으십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길 때에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였습니다. 원수의 나라 블레셋까지 쫓기게 되었을 때에 그야말로 버려진 돌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찾아왔을 때에도 죽이지 않습니다. 사울 왕 위에 계신 하나님의 주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은 원수였습니다. 그 원수에게 임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으로써 원수의 소유권 착각을 허용할 수 있었습니다. 사울의 주권을 인정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사울 왕을 붙잡고 있었음을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러한 모습은 적용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드는 상사가 있어도 그의 말에 따르는 이유는 나보다 높은 사람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 상사 위에 하나님의 주권이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인정하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소유권 착각을 허용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소유권 착각에 휩싸여 살아가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사람임을 고집하고 주장하고 선언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열망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바른 선택을 항상 해나갈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질 때에만 만사와 만물 위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볼 수 있습니다.
뉴스를 볼 때에도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뉴스에 대한 시각이 전혀 달라집니다. 지구 위에 있는 나라의 수장들의 결정과 모든 움직임 위에 하나님의 주권이 있음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어제 또 북한이 난동을 부렸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마음이 어지러워질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에 죽은 자로써 한반도를 바라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난동을 명한 북한의 지도자들 위에도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고 있음을 보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백 수, 천 수, 만 수 앞을 내다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주권이 어떤 미래를 향해 움직이고 있는지 다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 나에 대한 사랑과 전지전능하심이 활동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소유권 착각을 허용하시는 이유를 분명히 아시고, 오늘도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버려진 돌의 자리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지켜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의 믿음을 보고 싶으셔서 세상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소유권 착각을 허락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 보기를 기다리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되고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돌의 의식을 가짐으로써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흡족하실 만큼 믿음을 보여드리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