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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육체의 신분은 게임이다>의 줄거리:
'나'라는 의식 안에 우리의 육체가 너무 넓고 무겁고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아주 큰 오해입니다. 육체는 '나'가 아니고 '나'의 일부분도 아닙니다. 단지 '나'에게 주어진 역할이고 그 역할이 주어져 있는 동안 일정한 목표를 달성해야하는 게임입니다. 순간의 역할과 게임인 육체 자체에 너무 막중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어 인생이 괴롭습니다.
육체의 신분은 게임이다
(마가복음 12:18~27)
18.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19.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0.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21.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22.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23.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6.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육체의 신분은 게임이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육체의 신분은 게임이다’
인간은 육체가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여러 가지 신분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그 신분은 마치 게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역사학자이자 철학자인 요한 호이징가(Johan Huizinga, 1872~1945)의 의해 만들어진 굉장히 유명한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호모 루덴스(Homo Ludens)로써 ‘유희의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학자들은 다양한 방면에서 인간을 정의하고자 하였습니다. 호모 에렉투스는 직립 보행하는 인간, 호모 사피엔스는 사유하는 인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요한 호이징가는 놀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을 정의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인간을 유희 즉 즐거움을 추구하는 동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유희를 추구하고자 하는 성향이 문명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문명이라 함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철학 등의 인간의 모든 활동의 총망라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모든 활동의 근저에는 유희를 추구하는 마음이 원동력으로써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신앙적인 관점에서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물론 호이징가가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비밀을 염두에 두고 이러한 주장을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다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본래 계획에 가깝게 이해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호모 루덴스는 범용적으로 사용되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말보다도 근원적으로 인간을 표현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논리를 제시하였습니다. 호모 사피엔스적인 특성이 두드러진 논리입니다. 그런데 이 생각의 출발점에는 바로 유희 즉 기쁨에 대한 추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인간의 육체를 만드셨음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근본에 두신 것은 바로 마음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을 비어있게 만드셨습니다. 비어있기 때문에 평생 채우려는 욕구를 발동하게 됩니다. 이것이 문명의 내용물인 모든 행동의 에너지가 되었습니다. 채워지고자 하는 이유는 바로 기쁘고 만족하기 위함입니다. 유희의 목적이 기쁨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자면 호이징가의 호모 루덴스라는 말은 이러한 창조의 목적에 근접해 있습니다.
인간이 정치나 경제나 문학이나 예술 활동 등을 하는 것은 결국 비어있는 마음을 채우기 위한 수단입니다. 기쁨과 만족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정치를 해서 기쁨과 만족을 추구한다면 정치가 놀이가 된 것입니다. 예술이나 스포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이나 자녀의 양육 또한 기쁨의 추구라는 관점에서 놀이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요즘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많이 합니다만 그 이유도 기쁨의 추구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육체에 주어지는 신분과 역할도 게임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님께 질문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앞서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와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질문으로 예수님을 곤경에 처하게 하려고 했지만 실패한 이후입니다. 사두개인들의 의도도 이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색채가 달랐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잘못된 이해이긴 했으나 내세도 믿고 부활도 믿었습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을 믿었으나 내세를 믿지 않고 부활도 없다고 믿었습니다. 이들은 오직 현세만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서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과 대립하고 갈등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을 이기기 위한 온갖 논리를 사용하였는데 그중에서 비장의 무기가 바로 본문에 나타난 계대결혼제도였습니다.
예를 들어 형이 결혼을 하였는데 자녀를 낳지 못한 채 죽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형의 대가 끊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여 아이를 낳게 됩니다. 그 첫째 아이를 형의 자녀로 등록하여 대가 끊어지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이 계대결혼제도입니다. 다만 사두개인들은 이 계대결혼제도와 관련하여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을 제시하며 바리새인들이 가진 내세에 대한 교리를 비난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또한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고자 합니다. 20~23절을 보면 그 내용이 나옵니다. 일곱 형제가 차례로 다 죽으면 부활할 때에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내세와 부활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은 이에 대해 궁색한 답변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첫째가 아내로 맞이하게 되고 나머지는 아내를 가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두개인들은 그것을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끝없이 논쟁을 벌였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질문에 능히 대답하지 못하시리라 여겼습니다. 기껏 대답을 해봐야 바리새인들의 궁색한 답변 이상의 것은 나오지 못하리라 예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상상을 초월한 답변을 하심으로써 이들의 계획을 완전히 수포로 만드십니다. 24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라고 하셨습니다. 간단히 말해 “너희가 정말 무식하다”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주를 이루는 계층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면 그야말로 일침을 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퍼져있던 부활의 개념 자체를 부정하십니다. 죽을 때의 육체를 가지고 부활하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25절을 보면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영적 세계에 맞는 영적인 몸으로 태어나는 것이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이 영적 몸에는 육의 몸과 같은 남녀의 구분도 없습니다. 남녀의 구분이 없으니 결혼도 없고 부모와 자녀관계 혹은 형제자매의 관계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부활과 내세에 대한 진실을 알고 계시던 예수님께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발상 자체가 웃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답변에 크게 당황합니다. 기존에 반복하던 바리새인들은 현세의 삶이 내세에서도 기본 형태를 유지하며 지속될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논리로 공격할 여지가 있었으나 예수님의 말씀에는 그 논리가 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서로 반목했지만 그들에게는 현세라는 공통된 관심사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현세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내세까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랐고, 사두개인들은 현세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그 현세에 절박하게 집중하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이러한 현세에 대한 집착을 바탕에 두고 부활과 내세를 이해하고자 했기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이해는 모두 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7절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26절에서는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라고 하십니다. 모세의 시대에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죽은 지가 한참 된 조상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대로부터 치자면 모세는 BC.1400년경의 인물이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약 BC.2000년경의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들이 살아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몸이 죽었으나 영이 죽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에 태어난 셈이지만 한 번도 죽은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죽지 않을 것입니다.
육체의 죽음은 곧 신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육체가 죽으면서 남자라는 몸이 죽은 것이고 또한 사라의 남편이라는 신분에서 죽은 것입니다. 독자 이삭의 아버지라는 신분에 대해서도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아브라함의 영은 하늘에 올라가 있었기에 육체는 잃었을지언정 진정한 의미에서 죽은 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에 대해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세종대왕도 죽은 것은 아닙니다. 육체가 죽음으로써 조선시대의 4대 왕이라는 신분에 대해서 죽은 것이지 영이 죽은 것은 아닙니다. 이순신 장군도 박정희 대통령도 정주영 씨도 죽은 것이 아닙니다. 단지 육체에 주어져있던 신분이 죽은 것입니다. 남자나 여자 됨이 죽은 것이고 부모 됨이 죽은 것이고 직장의 신분에 대해 죽은 것이지 사람은 죽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오해가 생기는 이유는 나라는 의식이 육체와 깊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육체의 죽음을 나의 죽음이라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깊게 연관되어 있다고 해서 내가 곧 육체인 것은 아닙니다. 육체의 죽음과 함께 육체에 얹혀있던 신분과 역할이 함께 죽을 뿐이지 사람의 근본인 마음은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게 지어진 마음이 의식을 가진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담을 수 있는 공백의 마음이 나입니다. 육체가 살아있다는 것은 나의 마음이 육체라는 옷을 입고 있는 상태입니다. 육체는 지구라는 무대에서 입는 무대의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을 보면 영의정의 역할을 맡은 배우는 영의정의 복장을 입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촬영이 끝나면 그 옷을 더이상 입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공백의 마음을 가진 우리를 태어나게 하시고 육체를 입고 살아가도록 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게임을 위해서입니다.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유희 즉 즐거움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이유는 마음이 비어있기 때문이고, 마음이 비어있는 상태로 육체를 입혀 놓으신 것은 마음 채움 때문입니다. 이 마음이 채워지는 것이 기쁨이고 즐거움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어떤 일을 하다가 누구와 결혼해서 어떤 자녀를 낳게 될지에 대해서 알 수 없습니다. 결혼을 안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공통적 성향은 비어있는 마음을 채우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 채움은 근본적으로 유희 즉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게임하듯이 놀이를 하라고 태어나게 하신 셈입니다.
여기서 어떠한 게임을 해야 하는지가 문제가 됩니다. 저는 한 여자의 남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아닙니다. 남편이라는 신분과 역할이 주어져 있을 뿐입니다. 공백의 마음이 나입니다. 남편이라는 역할은 게임입니다. 남편으로써 아내 앞에 있는 동안에 게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정하신 게임에는 방식이 있습니다. 남편으로써의 역할이 진행되는 동안에 눈에 보이는 아내 대신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즐거움의 대상으로 추구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어차피 하나님이 들어오셔야만 온전히 채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들어오셔야만 기쁘고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나에게 몸을 입히시고 남편이 되게 하셨습니다. 아내와 하나님 중에 누구로 기쁨과 만족을 추구할 것인지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보일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자녀를 허락하시고 아빠라는 역할을 주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와 하나님을 놓고 선택의 게임을 하게 됩니다. 자녀를 통해서 기쁨과 만족을 추구할 것인지 하나님을 통해서 기쁨과 만족을 추구할 것인지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육체의 신분에 주어진 게임 방식입니다.
어떤 분들은 몸이 아픈 상황에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아픈 것이 아닙니다. 몸이 아픔으로써 환자의 신분과 역할이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때에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게임 방식은 마음을 채우는 것입니다. 육체의 건강을 추구함으로써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 할 수도 있고 하나님으로 기쁨과 만족을 추구할 수도 있습니다. 선택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몸으로 살아가는 신분과 역할 속에서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이 아닌 현세의 삶을 선택한 자들이었습니다. 건강을 선택하고 아내를 선택하고 남편을 선택하고 돈을 선택하였습니다. 하나님 대신에 육체로 만나는 대상을 선택하여 게임을 해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하나님의 창조 의도와는 맞지 않습니다. 마음 채움은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이러한 삶을 살아갈 때에 인생은 힘들고 마음에는 즐거움과 기쁨과 만족이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아내로써의 삶을 살아갈 때에 남편이 잘생겼든 못생겼든 능력이 있든 없든 성질이 착하든 악하든 남편은 마음을 채울 대상이 아님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오히려 그러한 선택에 있어서 남편이 못생기고 능력이 없고 성질도 못됐다면 하나님을 선택하기에 유리한 입장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남편이 잘생기고 능력 있고 착하다면 하나님을 선택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역할은 항상 상대적입니다. 아내에게 남편이 있듯이 부모에게는 자녀가 있고 선생님에게는 제자가 있습니다. 이러한 상대적인 대상에게서 기쁨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은 항상 하나님으로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는 게임 방식을 따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다만 세상의 조건이 좋으면 좋을수록 하나님을 선택하기는 불리해집니다. 이러한 선택의 조건을 염두에 두고 놀이로써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정에 문제가 생겼다면 게임으로 받아들여 보시기를 바랍니다.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는 게임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게임의 방식은 가정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즐거움을 추구할 것이냐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즐거움을 추구할 것이냐에 달렸습니다. 돈 문제가 생겼습니다. 돈은 상대적으로 나의 역할을 규정합니다. 돈이 없으면 가난한 사람이고 돈이 있으면 부유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경제적 상황이 규정한 신분과 역할에 매일 것인지, 돈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선택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얻을 것인지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이것을 선택하는 과정이 게임으로 비유될 수 있는 삶입니다.
어떤 대상이 내게 주는 역할에 대해서도 수행해야 될 게임 방식은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될까요? 하나님을 선택할 때에 나의 역할은 하나님께서 수행하시게 됩니다. 이것이 게임의 완성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아내 앞에서 남편으로써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임 방식은 아내가 아닌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통하여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방식대로 게임이 이루어졌으니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게임의 완성은 남편이라는 역할을 하나님이 대신하심으로써 이루어지게 됩니다.
육체로 주어진 신분에 대해서는 어떤 상황이든 하나님을 추구합니다. 이것이 게임의 상반부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나의 역할을 대신 수행하시며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이 게임의 하반부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게임은 완성되어 갑니다.
게임 즉 놀이라는 단어를 삶에서 활용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프로게이머가 탁월한 경기력을 보이듯이 우리가 탁월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나라는 의식은 몸과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몸이 처한 상황이 선택받기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나는 육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봄으로써 몸의 신분과 마음을 분리시킬 수 있고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원죄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는 이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제시해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나와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고 여길 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서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즐거움을 추구하는 게임을 수행하는 모습입니다.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지고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반면 육체를 나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육체로 만나는 대상들로부터 기쁨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내를 마주할 때에는 남편으로써 아내에게 기쁨을 찾게 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서 기쁨을 찾으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선택하지 못하는 상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임 방식에서 이탈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녀 앞에서도 아내 앞에서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가 죽은 자이기에 아내나 자녀에게 기쁨을 추구할 수 없습니다. 대신 예수님을 따라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으로부터 기쁨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 아내나 자녀에 대해서도 역사해나가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내의 남편 역할을 하실 것이며, 자녀 앞에서 아빠의 역할을 해나가실 것입니다. 사장님이 직장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갖습니다. 그러면 마음은 하나님으로 기쁨과 만족을 누립니다. 그리고 직장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게임 자리가 됩니다.
기쁨을 추구하는 과정은 게임 즉 놀이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게임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의 관심이 떠난 육체의 역할을 수행하시는 게임을 해나가십니다. 게임의 전반부는 내가 하늘의 하나님을 선택하여 기쁨을 추구하는 나의 게임입니다. 게임의 후반부는 하나님께서 나의 육체에 주어진 신분을 수행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게임입니다. 나의 게임과 하나님의 게임이 합쳐져서 한 사람의 인생이 만들어져 가게 됩니다.
오늘도 어떤 대상 앞에서든지 하나님을 선택하여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는 게임의 왕들이 되시고, 육체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유지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언제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모습을 마음에 떠올리면서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하나님을 즐거움의 대상으로 추구하는 게임을 하게 하시고, 하나님은 나의 육체의 역할을 담당하는 게임을 하시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