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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2

녹취문: 하나님, 나, 이웃 사랑법_태승철 (마가복음 12:28~34)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6.20|조회수79 목록 댓글 0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나, 이웃 사랑법>의 줄거리:

하나님과 나 그리고 이웃. 이 세 가지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들 각자의 은퇴 없는 평생 직업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직업은 이 은퇴 없는 평생 직업인 사랑 수행을 위한 일시적인 현장의 의미를 가질 뿐입니다. 앞날 걱정, 진로 걱정, 건강 걱정, 돈 걱정. 다 하지 말고 그냥 지금 여기서 하나님과 나 자신과 이웃을 사랑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 , 이웃 사랑법

(마가복음 12:28~34)

 

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 , 이웃 사랑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 , 이웃 사랑법

십자가 복음방송을 들으시는 분들과 전화통화를 하거나 만나서 대화할 때에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됩니다. 그중에 많은 경우가 자녀와 배우자에 관한 문제, 일과 재정에 대한 문제, 건강 문제 등에 대한 것들입니다. 저라면 그 입장에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고는 하시는데 그럴 때에 제가 드릴 수 있는 대답은 한 가지뿐입니다. 물론 거두절미하고 단답식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녀 문제로 고민하는 부모들에게 성경이 주는 답은 자녀의 문제로 인해 고민하지 말고 자녀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저에게도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제 아들은 재수를 하다가 지금 군복무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놓고 보자면 자녀의 학업 문제로 고민하시는 부모님들께 드릴 수 있는 조언이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입각한다면 그 대답은 한 가지 뿐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면 됩니다.

비단 학업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자녀가 사춘기라 반발을 하여 고민이 많습니다. 이때의 대답 또한 자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 배우자가 술만 들어가면 난폭해집니다. 대답은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미워하는 원수가 있습니다. 대답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픈 가족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랑하면 됩니다. 회사의 사장님과 과장님이 갑질을 합니다. 그럴 때에도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이 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사랑 외에는 다른 일을 할 권리가 주어져있지 않습니다. 또한 사랑이 가장 좋은 일이기 때문에 사랑해야만 합니다. 회사에서 다른 사람들은 부장님에게 잘 보여서 승진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나의 유익을 위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답이 아니라 나에게 해로운 일입니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부장님을 사랑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31절에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가족이든 친구든 내가 아닌 이상 모두 이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대로 사랑하면 됩니다.

 

본문을 보면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묻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러한 질문이 나온 배경에는 율법의 분류가 있습니다. 율법에는 규정명령과 금지명령이 있습니다. 613개의 율법 중에 248개는 하라는 규정명령이고 365개는 하지 말라는 금지명령입니다. 이렇게 율법이 많았기에 서기관들에게는 이 중에 첫째 되는 계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이 늘 있어왔습니다.

대부분의 서기관들은 첫째 되는 계명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과 희생제사에 대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사야서 11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당시로부터 이미 제일 우선시 된 계명이 무엇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 되는 계명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장 큰 계명을 물었는데 두 가지 계명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첫째 계명이 가장 중요하지만 둘째 계명 또한 같은 비중으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본문에서는 한 가지 사랑이 더 언급됨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31절을 보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웃 사랑에 더불어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계명은 두 가지이지만 사랑의 대상은 셋입니다. 하나님과 이웃과 나 자신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는 전제조건이 담겨있기도 합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거나 나에 대한 사랑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면 이웃을 사랑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시작하며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반복했습니다. 그러나 술만 먹으면 난폭해지는 배우자를 사랑하라니 도무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이러한 배우자에 대한 유일한 대처방법은 사랑입니다. 다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는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 문제를 비롯한 다른 모든 관계에 대해서도 사랑하면 됩니다.

우리가 사랑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나 자신을 사랑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사랑이 답이 될 때에 우리의 마음은 자유로워집니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궁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운명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를 미워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배우자가 너무 난폭하기 때문에 미워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자녀가 부모의 마음을 몰라주고 어긋날 때마다 밉상이 됩니다. 그러나 배우자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못된 행동 때문이 아닙니다. 자녀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도 자꾸만 어긋나는 행동 때문이 아닙니다. 직장에서 상사를 사랑할 수 없는 이유 또한 못되게 굴기 때문은 아닙니다.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해 본 적이 없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제대로 사랑하는 중이라면 원수조차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난폭한 배우자나 자녀는 물론이거니와 모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0절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고 또 31절에서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이웃과 나를 사랑의 대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두 계명은 말씀드린 대로 같은 비중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누어져 있지만 연관된 계명인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나에 대한 사랑이며 또 이웃에 대한 사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행위로 나타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내가 어떤 행위를 함으로써 하나님께 유익이나 기쁨을 드리는 것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 하나님께 어떠한 유익이나 기쁨을 드릴 수 없는 존재이기에 이러한 생각은 착각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라, 하나님을 위해 충성하라,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는 행위가 하나님에 대한 진짜 사랑이 될 수 없기에 나를 사랑할 수도 없으며 이웃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인간관을 염두에 둘 수 있어야만 합니다. 염두에 둘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TV를 볼 때나 일을 할 때에나 언제나 이러한 관점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인간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크기의 마음 공백을 갖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렇기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마음 공백은 채워지고자 하는 무한한 흡입력을 발생합니다. 핵잠수함이 연료의 보충을 하지 않고도 반영구적으로 운행할 수 있듯이, 우리의 마음 공백은 육체가 죽기 전까지는 마음의 흡입력이라는 에너지를 발동시킵니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의 삶의 목적은 숙명적으로 마음을 채우는 것이 됩니다. 마음의 흡입력이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 공백이 하나님 크기로 비어져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기에 하나님 외에는 온전히 채울 수 있는 대상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즉 마음의 공백을 하나님을 통해서 온전히 채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 공백을 하나님으로 채운다는 것의 의미하는 바를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를 통하여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서 사랑의 모습은 하나 되심을 통해 강조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721절에서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17장의 말씀뿐만 아니라 5814장에서도 반복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심을 언급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 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 되기 위하여 상대방을 위한 공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존재하는 마음의 공백은 곧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의 공백에 하나님을 받아들여서 하나가 되고 내가 또 하나님께 받아들여져서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님 안으로 받아들여지시고, 예수님은 또한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 안으로 받아들여지고 계십니다.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곧 채워짐입니다. 이 채워짐으로부터 기쁨과 만족은 생겨나게 됩니다. 마태복음 317절에서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이를 채움이라는 측면에서 풀어보자면 이는 나와 하나가 된 아들이요, 나를 채우는 기쁨의 이유가 된다.”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요한복음 1721절의 말씀 또한 이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의 안에 들어와 계시고, 아버지가 나의 기쁨이 되십니다. 이 기쁨이 나를 믿는 사람에게도 충만하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씀이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셔서 마음을 채우심으로써 기쁨을 누리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29~30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30절을 풀어보자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과 하나가 됨으로써 충만한 기쁨을 누리라는 의미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첫째 되는 계명이란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다만 그 기쁨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셔야만 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란 곧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마음에는 온전한 기쁨과 만족이 주어지게 됩니다. 세상의 그 어떤 대상도 줄 수 없는 최고이자 최상의 기쁨을 누리는 이 상태가 바로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기도 합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모셔 들이자 어떤 소원도 생기지 않을 정도로 온전한 기쁨과 만족의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말씀대로 모든 힘을 다 쓴다면 삶에서 다른 일을 할 여력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느라 직장에 신경을 쓸 수도 없고, 배우자에 뜻을 둘 수도 없고, 자녀에 대해서도 관심을 둘 수 없을 것입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이러한 일은 삶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이 느껴지기에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 일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고 있는 일이며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결혼한 사람은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다닙니다. 이 반지가 의미하는 바는 나는 결혼한 사람으로서 다른 이성에 대해서는 거부합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성에 대해 죽었습니다.”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혼이란 모든 이성에 대한 죽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으로 마음을 채우겠다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해서는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결혼에 대해서는 반지가 사랑의 증명이듯이, 하나님의 관계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봄이 하나님 사랑에 대한 증명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마음의 채움 거리가 될 수 있는 세상의 대상들에 대해 마음을 죽이고 뜻을 죽이고 힘을 죽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는 의식을 가질 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보좌 우편까지의 길을 따라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하나님께 쏟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십자가 생활화를 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가지는 것이 나를 위한 최고의 일이기에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이웃 사랑을 위한 준비도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이웃은 가족입니다. 그러나 철두철미하게 나 자신을 사랑하기 전에는 가족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잘못된 방식으로 사랑할 바에야 아예 대면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나 자신을 사랑하는 상태가 될 수 없다면 아예 이웃을 만나지 않는 것이 이웃 사랑의 소극적 측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족을 비롯하여 어쩔 수 없어서라도 만나야만 하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반드시 그들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온전히 이웃을 사랑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면 나를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웃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배우자를 사랑할 수도 없고 자녀를 사랑할 수도 없으며 부모를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회사 동료나 상사나 친구들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삶은 만나는 사람들을 나를 위해 소모시키고자 하게 됩니다. 마음은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니 마음은 항상 비어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생겨난 흡입력은 타인을 향하게 되고 마치 빨대를 꽂듯이 기쁨과 만족을 요구하며 소모시키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발생하는 무한대의 흡입력이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정복한 상태에서는 어떠한 관계에서도 온전한 사랑의 모습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빨대를 꽂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빨대를 꽂고, 아내가 남편에게 빨대를 꽂습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사장님 앞에서 노예처럼 굽신 거리고 있을지라도 마음은 사장에게 잘 보인만큼 돈을 벌어서 마음을 채워보겠다는 타산적 빨대 꽂기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장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하 직원에게 빨대를 꽂는 과정에서 무시를 하고 갑질을 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마음 공백의 흡입력이 중단되기 위해서는 채워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온전히 채우는 방법은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뿐입니다. 이 흡입력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진정한 이웃 사랑은 불가능합니다. 이웃은 오직 나의 빨대를 꽂을 대상으로써만 존재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삶은 힘들고 지치게 됩니다.

 

저에게 상담을 하시는 분들이 문제를 털어놓으십니다. 배우자가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아서 마음이 괴롭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문제의 원인은 배우자에게 있지 않습니다. 배우자에게 빨대를 꽂아서 기쁨과 만족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우선적으로 문제시 되어야만 합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에게 빨대를 꽂을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내 바람대로 행동하지 않으니 답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회사 사장님이 원수로 여겨져서 괴롭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 외의 대상에 대해서는 마음이 죽고 목숨이 죽고 뜻이 죽고 힘이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세상에 대한 죽음의 장소입니다.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함으로써 하나님과 하나 됨을 이루게 되면 나를 대신하여 하나님과 힘과 뜻과 의지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웃 사랑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가지고 하나님으로 채워짐으로써 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쏟아붓고 세상에 대해서는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를 사랑할 때에 이웃을 사랑할 수도 있게 됩니다. 그 사람의 겉모습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의 공백을 보게 됩니다. 마음이 채워졌는지 채워지지 않았는지는 언어행실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게 됩니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을 받아들이게 해준다면 제일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를 만나는 동안에라도 나를 통해 하나님과 대면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내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살아계심과 힘과 뜻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났듯이 이웃에게 내 속에 들어오신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웃 사랑입니다.

 

말씀드렸듯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미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일을 돈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합니다. 돈에 대해서만 살아있고 돈 외의 모든 것에 대해 죽은 것입니다. 연인들에게서도 이러한 모습은 발견됩니다. 한 사람에게 콩깍지가 씌우면 다른 이성에 대해서는 더는 눈길이 가지 않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동안 다른 모든 이성에 대해 죽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일어나야만 합니다.

다만 우리는 원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힘으로는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보이고 들리는 이 세상을 향하기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늘 보좌로 향하는 길을 만드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함을 통해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올라가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를 보면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설령 원수라도 사랑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 사랑하는 방식이 예수님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기 같은 죄인이라 불리는 자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한편 대제사장과 같은 사회지도층에 대해서는 채찍을 휘두르며 성전을 정화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사랑의 형태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고자 십자가를 붙잡아야만 한다는 규정 외에는 다른 규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웃을 향해 어떤 형태로 나타나게 될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규칙으로 규정할 수가 없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사랑해도 우리 집에 대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이웃집에 대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같을 수 없습니다.

내게 약간의 재산이 있을 수도 있고 신분이 있을 수 있고 지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자격증이 있을 수도 있고 어떤 능력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요소들을 재료로 삼아 나를 통해 이웃 사랑을 해나가실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나에게 막연한 소모가 되지 않는 이유는 이미 나는 하나님으로 채워져서 기쁨과 만족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빨대를 꽂을 필요가 없으니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랑의 재료가 됩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마가복음 113절에서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의미하는 바와 같습니다.

 

정리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그럼으로써 마음의 공백을 하나님으로 채우게 되는 하나님 사랑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완벽한 사랑이기도 합니다. 이 사랑이 유지되는 가운데 이웃을 볼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힘과 뜻이 그에게 나타날 기회를 제공해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될 이웃 사랑입니다.

우리가 해야 될 사랑은 간단합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여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됩니다. 이외의 어떤 요소도 사랑에 필요치 않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 나 자신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을 완성시켜나가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 사랑, 나 자신 사랑, 이웃 사랑이 하나로 해결되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잊지 않고 바라봄으로써 세 가지 사랑이 나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기적과도 같은 순간들로 가득 채워져 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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