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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질병과 장애를 활용하라>의 줄거리: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4:사,5) 이 말씀을 따라 질병과 장애도 감사함으로 받으면 삶의 자원이 된다는 생각은 터무니없고 지나친 것일까요? 아닙니다. 반드시 활용해야할 정말 귀중한 자원입니다. 어쨌든지 하나님이 허락하여 주신 것 아닙니까?
질병과 장애를 활용하라
(마가복음 2:1~12)
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질병과 장애를 활용하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질병과 장애를 활용하라’
우리에게 주어진 질병과 장애를 비롯한 신체적 약점들은 하나님이 모르시는 가운데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졌고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주어졌기에 예외 없이 생의 자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없애거나 없어지기를 바랄 대상이 아닙니다. 물론 단순히 즐거운 마음으로 끼고 살자는 의미는 아닙니다. 활용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4절의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신체적 질병과 장애와 약점들은 마음이 비정상인 상황에 놓여있음을 드러내는 신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질병과 장애는 죄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내가 무엇인가를 잘못했기 때문에 질병과 장애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언급한 잘못, 마음의 비정상, 죄는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물론 죄와 질병과 장애는 무관하지는 않습니다. 죄의 상태에서 질병과 장애가 나타나지만 죄 때문에 질병과 장애가 나타나게 된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스스로를 정상인줄 알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비정상적인 상태를 깨닫게 하시고자 신체적 질병과 장애와 약점을 허락하십니다. 신체적 질병이나 장애처럼 마음에도 질병과 장애와 약점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은 마음의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을 향해 주시는 말씀이 비유적으로 육체의 질병과 장애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 셈입니다.
신체적 질병과 장애와 약점은 바람직하지 않은 은총입니다. 질병과 장애가 주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왕 주어진 질병과 장애라면 반드시 활용할 수 있어야만 하는 생의 귀중한 자원이 됩니다. 무조건 나아야만 하고 개선되어야만 하는 강박관념으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은총을 주신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존재합니다. 그 은총에 바르게 응답할 때에 그로부터 또 다른 하나님의 뜻이 임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질병이나 장애에 대해서도 서두르거나 쫓기는 마음을 갖지 않고 감사하며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네 명의 친구가 중풍 걸린 친구를 들것에 실어서 예수님을 만나러 오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의 한 집에서 말씀을 전하고 계셨으나 모인 사람이 많아서 중풍 걸린 친구를 예수님께 보일 수 없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일반적인 가옥의 형태는 사각형의 벽에 지붕을 올린 형태였습니다. 이 지붕은 나무를 다듬어 짚과 진흙을 섞어서 고정시킨 형태였습니다. 네 친구들은 이러한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허물고 중풍 걸린 친구를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내려 보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생각해볼 수 있는 의미는 다양합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예수님의 죄 사함의 선언에 집중하며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상황적으로 볼 때에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이 기대했던 것은 죄 사함이 아닌 병 고침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죄나 영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죄 사함을 선언하십니다.
5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믿음을 보셨다는 내용이 중요합니다. 기존에 나타났던 예수님의 치유현장에서는 이렇게 다짜고짜 죄 사함을 선언하신 적은 달리 없었습니다. 믿음을 보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마음을 보시고 그에 상응하신 반응을 보이셨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중풍병자와 친구들의 마음가짐이 예수님 보시기에 참 특이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병이 생기면 고통과 불편이라는 현상이 문제시됩니다. 그리고 이 현상에서 벗어나는 것을 원하게 됩니다. 그런데 중풍병자는 중풍이라는 현상의 배후에 있는 자신의 죄라는 본질을 보고 있었습니다. 앞에서 죄의 상태에서 질병과 장애가 나타나지만 죄 때문에 질병과 장애가 나타나게 된 것은 아니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중풍병자는 이 차이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몸이 괴롭고 불편하기에 앞서 마음이 괴롭고 불편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 중풍병자가 두려워했던 것은 중풍 그 자체가 아니라 중풍이 드러내고 있는 마음의 비정상적인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을 놀랍게 여기시고 우선 죄 사함의 선언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이 중풍병자의 관점을 우리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병이나 장애는 무조건 나아야 하고 개선되어야만 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병과 장애가 드러내는 마음의 상태가 우선적으로 문제시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을 보기 위해 많은 인파가 몰려있었고 그들은 모두 죄인이었습니다. 비단 중풍병자만 마음이 비정상적인 상태에 놓여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직 중풍병자만이 죄 사함의 선언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병에 걸리지 않은 상태를 정상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반대였습니다. 중풍병자만이 병이라는 계기를 통해서 자신의 상태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중풍으로 비유되는 마음의 비정상적인 상태를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내가 죄인임을 아는 것이 제2의 복음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이 제1의 복음이라면, 스스로 죄인임을 아는 것은 제2의 복음이라 할 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몸의 질병이나 장애를 죄의 결과라고만 생각한다면 죄인임을 깨닫기는 그만큼 어려워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질병과 장애를 주신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죄의 상태에 놓여있음을 깨달으라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중풍병자처럼 이것을 깨달을 때에 정확하게 복음을 붙잡을 수도 있습니다.
중풍병자가 그러한 깨달음을 가지고 찾아온 대상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복음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대로 죄 사함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기 원한다면 이와 같은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가치를 가진 질병과 장애는 귀중한 생의 자원이 됩니다. 인산인해를 이루던 사람들 중에 복음의 첫 번째 혜택인 죄 사함을 받은 이는 오직 중풍병자뿐이었습니다. 죄 사함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죄가 있는 상태에서는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죄가 비정상의 상태라면 정상의 상태는 어떻게 드러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2절 하반부를 보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도’라고 번역된 헬라어 로고스(λόγος)는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다’로 번역된 헬라어 랄레오(λαλέω)는 말한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말씀하시다”라는 중복되는 표현으로 어색하게 느껴지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맥으로부터 정상과 비정상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받아들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야 하고, 예수님의 감정이 하나님의 감정을 받아야 하고, 예수님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를 받아내야 합니다. 말씀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복합적으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정의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드러났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체를 입고 땅에서 살고 계셨지만 마음은 언제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이 마음의 밀착상태를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밀착상태에서의 마음, 두 번째는 밀착상태에서의 지정의와 언행, 세 번째는 밀착상태에서의 의식입니다.
첫 번째로 밀착상태에서의 마음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밀착을 이룬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러한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갖추고 계셨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모든 사람은 비정상적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질 때에는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얻을 수 없는 온전한 기쁨과 만족이 임하게 됩니다.
두 번째로 밀착상태에서의 지정의와 언행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밀착을 이룬 마음에는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담기게 됩니다. 또한 육체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말을 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담은 행동을 하게 됩니다.
세 번째로 밀착상태에서의 의식이 있습니다. 의식은 어떤 대상을 파악하고 인지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는 동안 몸을 통해 만나는 사람과 일과 대상들에게서 어떠한 기쁨과 만족도 추구하지 않게 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온전한 의식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지정의를 받아서 대상들과 관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모습이 나타나는 삶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정상적인 인간의 삶이었습니다. 죄란 정상적인 상태를 벗어난 비정상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언급된 죄란 헬라어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ι)로써 벗어난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벗어난 상태가 수정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비정상 즉 죄의 상태는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되지 않고 다른 대상과 밀착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오늘도 지구의 75억 인구는 하나님과 밀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 지정의에서 비롯된 언행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음이 비정상인 죄의 상태에 놓여있기에 하는 모든 일은 온갖 죄와 거짓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한편 오늘 본문에서 중풍병자는 죄 사함을 선언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곳에 있던 서기관들이 반발합니다. 6-7절을 보면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이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죄는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태가 된 것입니다. 정상은 하나님과 밀착된 상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죄 사함을 선언하셨다는 것은 단순히 죄를 없애버리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중풍병자가 복음이신 예수님을 마주함으로써 그 마음이 정상의 상태로 회복되었고 더는 죄가 성립할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여 말씀드립니다만 예수님께서는 능력을 통해 중풍병자의 죄를 없애신 것이 아닙니다. 중풍병자의 마음이 복음이신 예수님을 바라봄을 통해 하나님과의 밀착을 이루게 되었고 그 결과 죄가 성립할 수 없게 되었음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에게서도 일어나야만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과 밀착함으로써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도 밀착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으며 들을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는 상황에서 하나님과 마음을 밀착시키는 일은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고 말씀하시는 예수님과 밀착함을 통해 하나님과도 밀착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밀착할 때에 죄는 성립할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과정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던 우리가 체감할 수 있도록 죄 사함의 선언을 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밀착되면 하나님과도 밀착되게 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삼위일체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되시는 예수님과 내 마음이 밀착하면 하나님과의 밀착은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과 밀착할 때에 죄의 상태는 억압되고 중단되는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띄게 됩니다. 정상적 인간의 모습에서는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지정의와 언행에서 하나님의 도가 표현되게 됩니다. 배우자에게 자녀에게 기쁨과 만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해 생겨난 기쁨과 만족을 표현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의 되찾기 위해 예수님과 밀착을 이룰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 지붕을 허물고 내려온 중풍병자와 같은 간절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만들고야 말겠다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남의 집 지붕을 뜯어버리겠다는 발상은 지극히 비상식적입니다. 집주인은 어떻게 여기겠으며 또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여겼을지 어렵잖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예상컨대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을 아셨던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진정시키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중풍병자의 시도를 믿음의 사건으로 만드십니다.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과 밀착하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그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가셨고 무덤에 들어가셨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셨고 하나님 우편으로 가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하고자 한다면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야만 합니다. 그 시작이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시작합니다.
중풍병자는 인산인해를 뚫고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어려움을 이겨내야만 했습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도 예수님을 바라보기 어렵게 만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발생합니다. 문제가 터질 때마다 마음을 빼앗기고, 가족들과 일에 대해 마음을 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은 뒤로 밀리고 예수님과 마음을 밀착시킬 수 없습니다. 그렇게 끝나버린다면 은혜의 흐름 또한 지속될 수가 없습니다. 정상의 상태를 벗어나서 비정상의 상태로 빠져들게 됩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질병과 장애와 신체적 약점들입니다. 몸에 병이 나고 장애가 생겨서 괴롭다면 마음에도 문제가 생긴 것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내 마음 사이에 다른 무엇인가가 끼어서 비정상적인 상태를 만들고 있음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탄의 가시로 비유된 지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라고 고백했던 것과 같이 지병이 사도 바울과 예수님을 밀착시키는 은총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잠깐 돈 문제를 생각하는 동안에 마음에는 세상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밀착되지 않는다면 세상은 언제라도 마음으로 들어옵니다. 사도 바울 또한 이러한 고뇌를 겪었던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지병을 통해서 마음의 상태를 관찰할 수 있었고 예수님께 마음을 밀착시키는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큰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 낼 수 있었습니다.
본문의 중풍병자의 열심이 우리의 열심이 되어야 합니다. 돈 벌기 위해, 건강을 지키기 위해, 가족들의 형통을 위해, 회사에서 승진을 위해 열심을 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우리가 열심을 내야 할 일은 예수님과 밀접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뿐입니다. 그럴 때에 내 의식이 포착하는 모든 대상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지정의가 언행에 담겨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목표로 해야 될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를 깨닫게 하는 질병과 장애는 이러한 삶을 시작하고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자원이 될 수 있습니다. 몸이 불편할 때마다 중풍병자를 떠올리시고 예수님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이 밀착되어야만 함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무엇인가가 예수님과 나 사이에 끼어들게 되었는지 찾아내시고 그것들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연합하고 밀착함으로써 하나님과 밀착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밀착을 이룰 때에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지정의를 따라 도를 말하는 놀라운 은혜의 경험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교적 수행이나 수련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밀착하고자하는 간절함만이 필요합니다. 이 일을 위해 손가락하나 움직이지 않아도 됩니다. 오직 믿음을 통하여 예수님과 밀착을 이룸으로써 은혜의 삶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꼭 경험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 몸의 질병과 장애와 약점들이 예수님과 밀착을 이루게끔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감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질병과 장애와 신체적 약점을 사랑의 표현으로 허락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나이가 들며 생기는 모든 신체적 이상 현상들을 휘발유삼고 에너지삼아 그 추진력으로 내 마음과 예수님 사이에 그 어떤 것도 낄 수 없는 예수님과 밀착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몰아붙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