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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성령님>의 줄거리:
내 삶의 현장 그 어느 구석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시선과 생각이 미치지 않는 부분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시선에 등 돌리고 그 생각과는 별도로 우리들의 경험과 지식과 원칙과 매뉴얼과 임기응변을 따라 삶의 현장을 살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성령님의 현장성에 대해서 너무 무지한 채로 영적 촌스러움을 못 벗고 있는 거지요.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성령님
(마가복음 13:9~13)
9.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
10.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11.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12.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13.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성령님>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성령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복음이 만국에 전파되어야 함에 이어서 현장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으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여 삶의 현장에서 생활화할 때에는 반드시 성령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며 우리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성령님께서 나의 인격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지배하신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여 삶의 현장에서 생활화하는 사람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에 내주하시면서 입을 통해 말씀하시고 몸을 통해 행동하시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이 세상에서의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염두에 두고 본문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이어지는 말씀에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공회에 넘겨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조심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잡혀서 공회에 넘겨지고 매질을 당할 것에 대해서는 기정사실로 여기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생겨나는 마음가짐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그 마음가짐과 그로부터 나타날 수 있는 증언의 내용이 이어지는 본문 말씀을 통해 드러납니다.
11절 이하에는 성령님의 현장성에 대한 말씀이 나타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복음은 기쁨의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무너짐으로부터 종말이 시작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종말에 해당하는 기한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 시절부터 재림 때까지의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기존에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직전에 일어날 일들을 정리하여 종말론으로 다루었습니다만 실지로는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뒤로부터 재림 때까지가 종말의식 속에 담겨진 기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종말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 성전의 멸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의 멸망을 결정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재난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임하시게 됩니다. 성전은 세상 것을 좋아해서 세상을 마음에 담고 있는 나 자신을 상번제의 어린양과 함께 죽는 용도로 존재하는 장소였습니다. 번제의 과정을 통해 마음은 세상을 떠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민들에게서 이러한 성전의 의미는 퇴색되었고 이방인들과 같이 세상을 마음에 담은 상태가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성전이 필요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성전의 멸망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재난을 허락하셨습니다. 세상의 가치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적 특성은 안정의 추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재난을 통해 이러한 사람들의 안정의 토대를 흔드십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19 사태도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이는 세상을 좋아하며 안정된 삶의 토대를 구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하나님의 말씀과도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재난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복음을 주셨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도무지 복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으나 가장 처참한 모습으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의 십자가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나에게 정해주신 자리라고 믿을 때에 십자가 사건은 복음이 됩니다. 세상을 좋아하던 나의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연합하는 사랑을 완성하게 됩니다. 이는 곧 나를 위한 최고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가질 수 있는 최고로 좋으신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럴 때에 이 땅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내려오셔서 나를 통해 이웃 사랑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이웃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나의 입과 몸을 통해서 이웃을 만나십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성령님의 현장성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성령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해나가시는지에 대한 질문을 해봅니다. 먼저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의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내 마음의 첫 번째 현실이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마음에서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삼지 못하는 동안에는 언제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첫 번째 현실로 여겨지게 됩니다. 마음이 육체로 접하는 사람이나 사건들에 매이고 붙들려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고 나 자신을 사랑할 수도 없으며 이웃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세상이 마음의 첫 번째 현실이 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이전 말씀에서 현실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많은 사실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실이 나의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 인도와 중국의 국경에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나의 현실로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수많은 사실들 중에서 마음에 와닿는 사실만이 나의 현실이 됩니다. 그러한 현실 중에서도 마음이 가장 먼저 보내지고 가장 밝게 보게 되는 현실이 있습니다. 그것이 앞에서 계속 강조 드린 마음의 첫 번째 현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오직 첫 번째 현실로써만 만날 수 있는 분입니다. 다만 말씀드린 대로 나의 힘으로는 아무리 애를 써도 하나님께서 첫 번째 현실이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복음이 제시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십자가는 하나님이 아닌 대상을 마음의 첫 번째 현실로 삼았던 나의 죽음이 일어나야 할 장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함을 통하여 세상에 대해 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하게 되면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오셔서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느끼게 해주십니다.
삶에서 하나님을 현실로 느끼는 모습은 예수님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났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깊은 잠을 주무셨지만 제자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난리를 쳤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첫 번째 현실이 하나님이셨고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 계셨습니다. 시편 59편 16절의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라는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피난처이시고 요새이시며 요람이 되어계셨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의 첫 번째 현실을 통해 나머지 사실들을 느끼며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께 첫 번째 현실은 하나님이셨기에 풍랑이라는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에서는 몸으로 만나고 있는 풍랑이 첫 번째 현실이 되었기에 두려워하고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만 원죄라는 인간의 근본적인 성향을 염두에 두자면 제자들의 반응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세상을 마음의 첫 번째 현실로 느끼는 것은 쉬운 일이나,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을 마음에 첫 번째 현실로 느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일은 오직 성령님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복음과 묶여있는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0절에서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함을 말씀하시고 곧 이어 11절에서 삶의 현장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자리가 나의 자리임을 고집스럽게 인정할 때에 성령님이 역사하시기 시작합니다. 몸이 무엇을 보고 누구를 만나고 어떤 사건을 대하든 마음에서는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느끼게 해주십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가 기적 혹은 은사 같은 능력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은 오히려 부차적인 일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전공과목은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느끼게 하시는 것입니다. 몸을 입고 사는 우리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십자가가 나의 자리라는 고백을 이어나갈 때에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느끼게 하십니다. 몸은 풍랑과 같은 상황을 마주하고 있을지라도 마음에서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느끼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있고난 후에 비로소 다양한 성령의 은사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다만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지금까지 겉으로 드러나는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서만 주목했지 실제로 성령님이 무엇을 하시는지에 대해서는 무지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배우자를 마주할 때에도 우리는 십자가가 나의 자리임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때에 성령님은 오시게 됩니다. 눈앞에서 대화하고 있는 배우자보다도 하나님을 더 우선적으로 여기게 하시고 첫 번째 현실이 되게 하십니다. 그럴 때에 배우자와의 관계 또한 성령님의 역사 아래에 놓이게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느끼는 삶을 살아갈 수만 있다면 어떠한 걱정이나 염려도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마음의 첫 번째 현실은 다른 모든 사실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현실로 삼은 대상이 불안하다면 내 마음에도 불안이 전달됩니다. 첫 번째 현실로 삼은 대상이 기쁨이라면 내 마음에도 기쁨이 전달됩니다. 그러한 마음상태로 두 번째 세 번째 사실들을 마주하고 관계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11~12절을 통해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만나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두 가지 상황을 예로 드십니다.
11절을 보면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전한다는 이유로 붙잡혀서 매질을 당하고 공회에 서서 재판을 받게 된 상황입니다. 이때는 공포감과 두려움과 위기의식에 사로잡혀버리게 됩니다. 위기감이 강하면 강할수록 압도되어서 보이지도 들리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이 첫 번째 현실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저는 카투사에서 군복무를 했습니다. 미군 부관중대의 트레이닝룸을 책임지다가 제대를 앞두게 되었습니다. 보통 말년이 되면 어느 정도 머리를 기르는 것이 암묵적으로 허용되었습니다. 제대를 앞둔 저도 어느 정도 머리가 긴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갓 헌병으로 배속 받은 미군 한 명이 저의 머리를 문제시했습니다. 이 헌병은 부대에 존재하는 암묵적 허용이나 관습을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오로지 규정을 강조하며 두발상태가 불량함을 지적하고 있는데 다른 미군 헌병이 그 광경을 보고는 또 다른 오해를 하게 됩니다. 오히려 제가 계급이 낮은 헌병에게 부조리를 강요하는 것으로 오해하고는 헌병대로 끌고 갔습니다. 저는 그 때 난생처음으로 헌병대 취조실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더 상급자 카투사 헌병과 대화를 하게 되었고 사정을 다 알고 있었으므로 오해는 쉽게 풀렸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은 그 취조실의 무서운 분위기입니다.
이렇게 대수롭지 않은 상황에서도 공포심이 생길 수 있는데 잡혀서 매 맞고 공회 앞에서 판결을 받는 상황에서는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서는 어느덧 하나님이 첫 번째 현실로부터 밀려나시게 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앞선 9절에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을 내 것으로 삼는 일을 멈추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삶의 현장에서 위기를 느낄 때에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은 자이며, 그 처참한 십자가의 자리가 나의 자리다”라는 생각을 고집스럽게 기억하고 인정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 삶의 현장에 성령님이 임하셔서 해야 될 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 속에서도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삼으셨기에 위기를 느끼지 않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잡혀서 재판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첫 번째 현실이 되시면 성령님이 오셔서 그 상황을 위기로 느끼지 않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는 극도의 공포와 위기의 상황에서 오히려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성령께서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에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그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첫 번째 현실이 되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에게는 두 가지 사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육체가 돌에 맞아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에 계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 중에서 돌에 맞는 상황은 육체의 고통을 통해 강력하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인 마음에 성령님께서는 이 강력한 느낌을 뚫고 하늘의 하나님을 더욱 강력하게 느끼도록 역사하십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이 큰 기적이라지만 스데반이라는 한 개인에게 있어서는 마음이 육체를 초월하여 하나님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 더욱 큰 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 돌에 맞아 죽는다는 사실보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사실을 마음에서 첫 번째 현실로 받아들이는 역사를 성령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오직 복음을 잊지 않았기에 일어날 수 있었던 역사였습니다.
우리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처참한 자리가 내가 붙잡아야 될 나의 자리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삶의 현장이 어떠한 위기에 처해있든지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이 첫 번째 현실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설령 몸이 풍랑 속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가 되시고 요새가 되시고 요람이 되어주시니 절대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참수형을 기다리던 베드로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죽게 생겼는데 옥에서 깊은 잠에 빠집니다. 사도 바울이 실라와 함께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 서서 재판을 받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공회에서 재판을 받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절대 평강을 누렸습니다. 위기와 두려움과 공포의 상황에서 복음을 붙들고 십자가의 자리가 나의 자리임을 끊임없이 인정할 때에 성령님이 오셔서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느끼도록 역사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님을 비유적으로 표현해보자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생각과 뜻이 외출을 나오신 인격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내 마음에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마음과 생각이 내 안으로 외출을 나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느끼게 된다는 것을 좀 더 쉽게 체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외출을 나오셔서 내 안에 계시니 나와 하나님이 하나가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내 입과 몸을 통해 표현하시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님을 언급함에 있어서 비교적 성령님을 덜 언급한다고 느끼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내 마음에 오심은 십자가 복음과 묶여있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기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자리가 내 자리라고 인정하는 모든 자에게 성령님은 오십니다. 성령님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지 않더라도 결코 성령님을 소홀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느끼고 있다면 성령님은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한편 본문 12절에서는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만나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두 번째 상황이 나타납니다.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가정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역사적인 아픔으로부터 가족들이 서로를 죽는데 내어준다는 말을 통감할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 정권에서 아이들이 부모를 고발하는 일에 대해서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러한 일들은 우리 삶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다만 영적인 차원에서 이 말씀을 이해하자면 이러한 일은 빈번하게 일어나게 됩니다.
공회에 잡히는 것이 육체의 위기로 인해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되는 상황이라면, 가정이라는 환경은 마음이 나태해짐으로 인해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에서 놓치게 되는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유일하게 마음을 놓을 수 있는 대상이 있다면 가정입니다. 가정에만 들어오면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가족들을 마음의 첫 번째 현실의 자리에 들여놓게 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면 자녀를 마음의 첫 번째 현실로 삼습니다. 이것은 얼핏 부모로써 당연한 일로 여겨지지만 마음을 빼앗긴다는 점에서는 앞서 살펴보았던 공회에 잡혀가는 상황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이 첫 번째 현실에서 밀려났으니 하나님 사랑을 할 수 없고 나에 대한 사랑도 할 수 없으며 이웃에 대한 사랑도 할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구원이 빗나간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족이 서로를 죽는데 내어준다는 말씀에 담긴 영적인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구원으로부터 벗어나서 영원한 멸망에 이르는 일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장소는 다름 아닌 가정입니다. 그렇게 소중히 여긴 가정이 가족들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첫 번째 현실이 되어 줌으로써 서로를 멸망으로 떨어뜨리는 일들을 하게 됩니다. 가정은 붙잡혀서 재판받는 위기상황과는 다르게 긴장이 풀어지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첫 번째 현실로부터 밀려나시고 하나님 사랑도 안 되고 나에 대한 사랑도 안 되고 이웃사랑도 안 되는 구원 바깥의 영역으로 던져지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십자가 복음을 기억하지 못하고 밖에서만 십자가 복음을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배우자 앞에서 자녀 앞에서 부모 앞에서 십자가가 나의 자리임을 기억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새듯이 삶의 어떤 현장에서도 복음은 생활화 될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의 현장성은 경험되지 못할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무엇을 보든 어떤 상황을 만나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느끼게 해주십니다. 이 성령님의 현장성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붙잡고 십자가가 나의 자리임을 기억하고 유지해나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오늘도 하루종일 십자가 복음을 생활화하는 중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느끼게 하시는 성령님의 현장성을 경험하실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나의 피난처이시고 요새이시며 요람이 되시는 절대 평강을 누리실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언제 어디서든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가 하나님이 정해주신 나의 자리로 고백하는 것을 지속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성령님께서 나의 삶의 현장에 오셔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첫 번째 현실로 느끼게 하시는 기적과 같은 체험이 이어져 나갈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