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마가복음-2

녹취문: 환난 센서가 고장난 인생_태승철 (마가복음 13장 14절~23절)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6.26|조회수85 목록 댓글 0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환난 센서가 고장난 인생>의 줄거리:

대략 초속 462km로 자전하는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를 낸다고 해도 인간 청력의 한계를 뛰어넘게 됩니다. 이처럼 지금 당장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가장 큰 환난을 인간은 전혀 감지하지 못합니다. 환난 센서가 작동하지 않는 이유는 가치 센서가 고장이 났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소중한지를 몰라서 어떤 것이 큰 환난인지도 모르는 거지요.


환난 센서가 고장난 인생

(마가복음 13:14~23)

 

14.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15.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16.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17.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18.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19. 이는 그 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0.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

21. 그 때에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

23.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환난 센서가 고장난 인생>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환난 센서가 고장난 인생

본문은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한 어려운 내용입니다. 특별히 19절의 큰 환난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주석을 통해 고충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처럼 본문을 어렵게 느낀다는 것은 그만큼 예수님을 잘 모른다는 반증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갖고 계신 환난의 기준을 염두에 둘 수 있어야만 합니다.

환난은 무엇인가를 상실하게 만드는 사건입니다. 가치 있고 소중하고 아까운 무엇인가를 잃어버려야 환난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환난을 뚜렷하게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가치기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치 있게 여기는 일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제목의 환난 센서가 고장난 인생은 이러한 상태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 자신에게서 일어날 환난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나는 이 환난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환난 센서가 고장 난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환난 센서가 고장 난 상태에서 제일 먼저 나타나는 증상은 평안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평안은 곧 환난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내게 환난이 임했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평안은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염두에 두고 본문에 대한 주석을 보면 신학자들이 과연 예수님을 바르게 믿었는지 의심이 생길 정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환난이 무엇인지를 모르니 각자가 생각할 수 있는 환난을 가지고 본문을 대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예루살렘의 멸망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앞서 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언대로 AD.70년에 로마제국의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다만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환난이라기에는 근거가 빈약합니다. 식민지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었고 수도인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뿐이었습니다. 이미 앗수르에 의해 북왕국이 망하고 바벨론에 의해서 남왕국이 망해서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고 성전이 파괴된 때와 비교해서 특별히 더 큰 환난이라고 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큰 환난이 무엇인지를 굳이 역사 속에서 찾고자 하는 이유는 그만큼 예수님의 기준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준과 우리가 갖고 있는 기준의 거리가 멀다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으로 여기시는 상황을 나의 구원으로 받아들일 수도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문을 통해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환난을 나의 환난으로 느낄 수 있는 센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환난 센서는 다른 말로 가치 센서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환란은 곧 가치를 잃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보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다니엘서 1131절의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을 세울 것이며라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것입니다. 다니엘의 예언은 약 400년 뒤에 실현되게 되는데 수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이스라엘을 점령하여 유대정신과 문화를 말살합니다. 그 과정에서 성전의 번제단을 없애고 제우스 신상을 세웠으며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스럽게 여기던 돼지를 잡아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다니엘의 예언이 그대로 실현되었던 것입니다.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을 세울 것이며라고 했는데 여기서 핵심은 번제단을 헐고 그 자리에 우상의 신상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번제단은 제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그리고 제사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침저녁으로 어린양 한 마리씩을 바치는 상번제였습니다. 어린양의 각을 떠서 번제로 드리는 상번제는 특정한 사람을 위한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제사장들만이 참여하는 제사였으나 그 대상은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곳에 살든지 성전에서 아침저녁으로 어린양이 번제로 드려지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상번제의 제도를 만드신 이유는 세상에 대한 마음의 죽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선민의 마음은 본래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여길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일들이 첫 번째 현실이 되었을 때에는 그러한 마음을 어린양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첫 번째 현실의 자리를 회복하시고 삶의 현장에서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상번제는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드려졌습니다.

그런데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이러한 상번제가 이루어지던 번제단을 없애고 제우스 신상을 세웠습니다. 이는 곧 마음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방법이 사라지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다니엘의 예언을 인용하신 것에는 우리의 마음이 이러한 상태가 되는 것이 곧 환난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앞서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 청년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부자 청년이 마음의 첫 번째 현실로 삼았던 것은 많은 재물이었습니다. 이것이 곧 번제단 대신 우상의 신상이 세워진 상태입니다. 그리고 끝내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다는 것은 재물이 마음의 첫 번째 현실이 된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지 않고 그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였음을 의미합니다. 부자 청년의 마음에서는 제우스 신상 대신 재물의 신상이 세워졌고, 하나님의 이름 대신 들어온 이름을 죽이는 상번제가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큰 환난을 언급하시기 전에 다니엘의 예언을 인용하신 이유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에 놓고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한 큰 환난이 무엇인지도 명확해집니다. 19절을 보면 이는 그 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라는 대목에 관심을 두고 이 환난을 역사 속 사건에서 찾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이러한 이해는 틀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니엘의 예언에 담겨진 신앙적 의미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상번제가 중지되고 제우스 신상이 세워진 것과 같은 일이 우리의 마음에서도 일어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큰 환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성전 즉 상번제의 의미를 완성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전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전의 상번제가 지켜지지 못하였고 성전은 의미를 잃고 허물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 시대 이후의 상번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생활화하는 것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생활화함으로써 성전과 상번제의 존재의미를 온전히 충족시키게 됩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생활화할 수 없다는 것은 마음에서 하나님 외에 다른 이름을 첫 번째 현실로 여기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상번제가 중지되고 제우스 신상이 세워진 것처럼 마음에서 우상이 굳건히 자리매김을 한 상태가 큰 환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라는 말씀은 창조로부터 예수님의 시대까지를 의미합니다.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시대로부터 이후의 모든 시대를 의미합니다. 결국 창조 이후 인류역사가 시작되어서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세상의 끝까지 이어지게 될 시간의 흐름 속에서는 어떤 환난도 사람들의 마음에서 일어나게 될 환난보다 심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인류는 셀 수 없이 거대한 재난과 환난을 마주해왔습니다. 인류가 멸절당한 노아홍수로부터 시작하여 소돔과 고모라의 환난이 있었고, 근현대에는 독일 나치정권에 의해 600만 유대인 학살이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며 크메르루주에 의해 1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학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현재 우리가 처해있는 코로나19 사태도 세계적으로 확진자가 천만 명에 육박하고 사망자는 오십만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환난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음의 환난보다 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님의 기준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말씀을 해석하고자 했기에 이러한 신앙적 가르침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큰 환난을 재앙이나 전쟁으로만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 정복을 비롯한 역사 속 사건에서 그 답을 찾으려 하였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인류 역사상 다시없을 큰 전쟁이라 여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인류역사상 나타나게 될 어떠한 환난도 마음에서 하나님을 잃게 되는 사건보다 끔찍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는 순간을 생각해봅니다. 죽기 직전 스데반 집사님에게 있어서 지구가 망해도 그것은 새삼 큰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에 어떤 환난이 일어나더라도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내 몸이 죽는 것 이상도 아니고 이하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환난은 우리 각자에게 주어지는 마음의 환난입니다. 저는 늦게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이 소중하여 자나 깨나 아들 생각만 하게 되었다면 아들이 마음의 첫 번째 현실이 된 것입니다. 로미오에게 첫 번째 현실은 줄리엣이었습니다. 부자 청년에게 첫 번째 현실은 재물이었습니다. 마음의 첫 번째 현실이란 이처럼 자나 깨나 생각하고 은연중에 생각하며 지속적으로 붙잡게 되는 대상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첫 번째 현실로 삼은 대상의 영향력 아래에서 다른 모든 사실들을 대하게 됩니다.

제가 아들을 마음의 첫 번째 현실로 삼았다면 예수님이 그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모습을 노아홍수보다도 더 큰 환난으로 보실 것입니다. 나라는 한 개인의 입장에서는 히틀러가 600만 유대인을 수용소에 가두고 독가스로 살해하는 것보다도 아들을 마음 놓고 첫 번째 현실의 자리에 두는 것이 더 큰 환난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불과 유황이 내려와서 사람들이 타죽는 현장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러나 나의 마음에서 돈을 첫 번째 현실에 두는 것이나 건강에 이상신호가 켜졌다고 해서 건강을 첫 번째 현실의 자리에 두는 것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환난입니다.

 

환난은 무엇인가를 잃게 하는 사건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노아홍수 때에도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유대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굉장한 환난들이 많았지만 결국 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목숨을 잃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환난은 육체의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을 잃는 사건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잃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세계입니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도 이 피조세계 안에서 흘러가게 됩니다.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무엇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돌고 돌았던 모든 재물을 한꺼번에 모았더라도 하나님과는 비교할 수가 없이 사소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있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에 있는 대상을 담았다면 그것을 위해 하나님을 잃게 된 것입니다. 하물며 번제단을 없애고 제우스 신상을 세운 것처럼 세상의 가치를 꼭 붙잡게 된 상태는 끔찍하기 그지없는 환난의 상태인 것입니다. 인류역사상 있었던 어떤 환난이 끼어들더라도 이보다 더 끔찍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재난은 결국 내 목숨 하나 이상을 가져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니엘서의 예언을 인용하시며 말씀하신 환난은 마음의 첫 번째 현실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지구의 75억 인구는 오늘도 마음에 세상의 일들을 첫 번째 현실로 끌어들임으로써 75억 번 하나님을 잃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삶은 너무나 편안해 보입니다.

20절을 보면 만일 주께서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날들을 감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노아홍수 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쓸어버리신 이유는 인간이 육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고깃덩어리로 전락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마음의 첫 번째 현실로 삼을 때에 고깃덩어리로 전락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것입니다. 노아홍수 때처럼 쓸어버려도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인간 아닌 인간들 중에서 앞으로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모셔 들이게 될 선택된 자들이 존재합니다. 단지 이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노아홍수 때와 같은 재난을 감하시고 인류를 살려두고 계신 것입니다.

이들은 십자가 복음을 생활화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육체를 입고 살기에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세상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가 잘못되었음을 빨리 감지합니다. 환난 센서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바라보며 그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끊임없이 고백합니다. 바로 이러한 자들이 하나님이 아끼시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다만 몇몇 사람들을 위하여 오늘도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린 75억 인구를 그대로 살려두고 계십니다. 이것이 20절 말씀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제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첫 번째 현실의 자리에 끌어안게 되었다면 아들이 마음속에서 제우스 신상이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배우자나 사업이 마음의 제우스 신상이 될 수 있습니다. 정치가들에게는 대권이 마음의 제우스 신상일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자존심이나 체면이 제우스 신상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편안하게 여기며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움직이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이들을 살려두시는 이유는 이들 중에 누군가는 선민으로써 언젠가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삼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십자가 생활화를 하고 계신다면 여러분 때문에 이 나라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지금 한반도에는 이북까지 합쳐 약 팔천 만 명의 사람들이 고깃덩어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살려두신 이유는 여러분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노아홍수 때와 같은 심판을 유보하시고 감하시고 계십니다.

 

한편 15~17절을 보면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의 첫 번째 현실의 자리에서 잃어버린 상태를 깨닫지 못하면 세상에 달리 아까워 할 대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전에 제우스 신상이 우뚝 선 것처럼 마음에 세상의 가치들이 들어온 상태를 붙박이 상태로 유지하며 살아갈 바에는 차라리 절망하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잃은 마음에는 밭도 옷도 자녀도 아무 소용이 없고 의미가 없습니다. 집에 있는 금은보화도 휴지와 다를 바 없습니다. 차라리 절망하고 주저앉아 죽는 편이 솔직한 대응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잃은 마음은 이처럼 무엇을 위해서도 살 필요가 없는 완전한 고깃덩어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이러한 상태임에도 하나님께서 살려두신 이유는 언젠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전의 상번제가 예표 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돌아오기를 바라시며 오늘도 심판을 참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맞이할 수 있는 가장 큰 환난은 바로 마음에서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모시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께서는 이러한 상태를 지구 인류의 시작으로부터 끝까지 일어나게 될 어떤 환난보다도 큰 환난으로 여기고 계십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나의 아버지가 되시기 위하여 나를 지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창조 의도를 깨달았다면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하나님이 첫 번째 현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재벌에게 감춰둔 아이가 있었다면 그 아이가 혈연을 증명할 때에 상속권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세상 법으로도 혈연이 이토록 강한 힘을 발휘할진대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혈연을 주장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겠다고 공언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마음에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여기지 못하고 세상을 담는다면 정말 무서운 환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담지 못한 상태에서 주어지게 되는 환난의 구체적 증상과 체감에 대해서는 앞으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삶이 당장은 편안해 보일 수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구원의 가능성을 품은 선민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선민들을 위해 지구를 노아홍수 때처럼 심판하시지 않고 그 날들을 감하고 계십니다.

오늘도 십자가를 생활화하면서 하나님만이 내 마음에서 첫 번째 현실이 되도록 가정과 직장과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삶을 이상하게 여길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들의 삶은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사람들 때문에 유지되고 있습니다.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린 지구에 살아가는 75억 인구를 오늘도 하나님의 홍수심판으로부터 구해내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한 사람이 마음에서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의 자리에 모시는 것이 이토록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이것이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고 십자가 생활화에 전력투구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서는 일이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십자가 생활화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