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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거짓 신앙에서 해방된 기쁨>의 줄거리: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서게 될 일에 대한 다니엘의 예언은 우리에게 참으로 귀중한 가르침을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인용하신 것이고요. 이 가르침에 충실하면 모든 거짓 복음과 거짓 선지자로부터 해방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나 거짓 선지자들은 실제로는 그리스 신화의 주신인 제우스의 자녀들입니다.
거짓 신앙에서 해방된 기쁨
(마가복음 13:21~23)
21. 그 때에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
23.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거짓 신앙에서 해방된 기쁨>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거짓 신앙에서 해방된 기쁨’
우리가 아침마다 나누는 말씀의 핵심은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실제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눈으로 마주하는 대상들 앞에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나의 마음자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나는 십자가에서 사지가 못 박히고 죽은 자이기 때문에 이 현장과 대상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 현장과 대상에 대한 주체는 하나님이셔야만 한다.”라는 고백이 실제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십자가 생활화에는 여러 가지 약속된 은혜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십자가 생활화를 삶의 현장에서 반복하여 실천해갈 때에 모든 거짓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이 거짓을 행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를 미혹하기 위해 다가오는 모든 거짓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됩니다. 단순히 해방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해방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거짓이 나를 미혹할 수 없고, 거짓의 이끌림을 받지 않는 삶이란 어떠한 모습일까요? 본문에서는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에 대한 경고가 나타납니다. 다만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거짓으로부터 해방되는 역사는 단지 사이비 기독교 단체나 지도자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이비 기독교라는 기준은 애매합니다. 정통기독교라는 교단들이라고해서 가르치고 유지하고 지향하는 신앙적 내용들이 반드시 다 옳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우리는 신앙적 거짓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초등학문으로부터 유래한 해악을 끼치는 지식들이나 허무한 사상들로부터도 해방되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독서는 권면할 만한 선한 습관으로 인식됩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독서를 할 수 없다면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해로운 습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11절 말씀을 보면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의 현장성을 강조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의 현장성이란 삶의 현장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직접 연결됨을 의미합니다. 내가 삶의 현장 어디에 있든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연결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삶에 대한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나에게로 흘러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입을 통해 말로 나타나게 되고 나의 몸을 통해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간다고 가정한다면 더 나은 생각과 말과 행동을 위한 독서는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어떤 책도 하나님의 현장성을 대체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책을 통해 얻는 지식뿐만이 아닙니다. 직간접적으로 얻는 모든 경험들과 매뉴얼화 된 삶의 원칙 혹은 풍습과 관습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현장에서 하나님과 연결을 이룰 수만 있다면 이러한 시도에는 의미가 없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잠언 9장 10절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십자가 생활화는 실제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결론으로 삼는 말씀을 들으니 새로움을 느끼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배우자나 자녀 앞에서부터 십자가 생활화는 실천되어야만 합니다.
본문에서는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내용을 다니엘의 예언과 연결시켜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니엘서 11장 31절을 보면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을 세울 것이며”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다니엘의 예언은 400년 후에 성취되게 됩니다. BC.168년에 수리아 왕인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유다를 점령하고 유대 정신을 말살하기 위하여 성전을 유린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예언에서 언급되는 군대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거느린 군대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예언을 인용하시면서 환난의 때를 언급하십니다. 그리고 그 환난의 때의 특징 중의 하나로써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의 출현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앙적인 측면에서 참과 거짓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니엘의 예언을 통해서 그 기준을 제시해주고 계십니다. 그 기준은 바로 매일 드리는 제사입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유대 정신을 말살하고자 하였고 유대 정신의 중심에 성전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성전에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어린양 한 마리씩 각을 떠서 바치는 상번제(常燔祭)가 이루어지는 번제단이 핵심임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정확한 사실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9장 4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상번제는 곧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상번제를 기반으로 한 유대 정신을 말살시키기 위해서는 번제단을 허물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번제단을 허물고 그 자리에 제우스 신상을 세웠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했던 돼지를 잡아 제사를 드리고 그 피를 성전에 발랐습니다. 철저하게 성전을 모독했던 것입니다.
성전에서 드려지는 상번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예표였습니다. 제물로 바쳐지는 일 년 된 어린양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시간적으로는 상번제보다 나중의 일이지만 그 의미적 측면에서는 상번제의 원형이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구약의 상번제는 앞으로 일어나게 될 십자가 사건에 대한 예표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침마다 “말씀으로 드리는 오늘의 번제”라고 이름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드려지던 구약의 상번제 정신의 완성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날마다 기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에 두고 본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생활화하는 것과 번제단이 허물어지고 제우스 신상이 서는 것은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두 모습은 우리에게 선택사항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마음에서 상번제를 유지하면서 제우스 신상도 세울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먼저 상번제가 드려지던 목적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게 창조되었기에 항상 채워지고자 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 채우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채움에 대해서는 반드시 믿음이 작동합니다. 예를 들어 마음을 재물로 채우고자 시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재물이 마음을 채우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에서는 재물이 첫 번째 관심의 대상이 됩니다. 재물에 지속적 관심을 쏟게 되고 재정 상태를 첫 번째 현실로 삼게 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건강해서 오래 사는 것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건강이 마음을 채울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에서는 건강이 첫 번째 관심의 대상이 됩니다. 건강에 지속적 관심을 쏟게 되고 건강 상태를 첫 번째 현실로 삼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살면서 매사에 돈을 강조하며 사는 사람에게 돈은 첫 번째 관심의 대상이고 재정 상태는 첫 번째 현실입니다. 돈이 마음의 공백을 채워 주리라는 믿음으로 인해 이러한 마음가짐과 삶의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당연히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채워주실 수 있다고 믿고 하나님이 나의 기쁨이 된다고 믿는 상태에서는 돈이나 건강을 믿는 모습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관계없는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상번제는 존재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번제단에서 잘못된 믿음을 가진 내가 죽었음을 고백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몸은 예루살렘 성전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을지라도 성전에서는 지금도 나를 위해 어린양이 상번제로 드려지고 있음을 기억합니다. 그 어린양은 하나님 대신 돈과 건강을 믿었던 나를 대신하여 죽는 것입니다. 이 제물로 바쳐지는 어린양과 나를 동일시함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지 못한 죄는 용서를 받게 되고 깨끗해진 마음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게 됩니다. 상번제의 의미가 완성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생활화함도 이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상번제나 십자가 생활화에는 모두 믿음이 작용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가치가 첫 번째 관심의 대상이자 첫 번째 현실이 되어버린 내가 죽어야 한다는 믿음이 있을 때에 상번제나 십자가 생활화는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됩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이러한 상번제가 이루어지던 번제단을 허물고 제우스 신상을 세웠다는 것은 믿음의 방향을 하나님께 돌릴 방법을 없애버린 것입니다. 돈이 기쁨과 만족이 된다고 믿는 상태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마음에 번제단을 허물고 제우스 신상을 세우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류 모두에게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다양한 형태의 제우스 신상을 마음에 세웁니다. 하나님이 들어오셔야 할 마음의 자리에 제우스 신상을 세운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75억 명의 75억 개의 제우스 신상이 존재하는 셈입니다. 제우스 신상은 돈이 될 수도 있고 건강이 될 수도 있습니다.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은 승진이고 부모에게는 자녀의 형통이 제우스 신상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 기쁨과 만족을 주고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어지는 세상의 모든 대상들이 제우스 신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참으로 희한한 일이 벌어집니다. 이러한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주시며 첫 번째 계명으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신이란 하나님 외에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다고 믿어져서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들여놓게 되는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유일한 기쁨과 만족이 되신다는 믿음의 선언입니다. 그런데 마음에는 제우스 신상을 세워놓고 입으로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십자가 사건을 바탕에 두고 죽으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며 불러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을 마음의 유일한 기쁨과 만족의 대상으로 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음에 제우스 신상을 유지한 채로 입으로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고 이러한 일을 하도록 가르치는 모든 사람들이 거짓 그리스도이며 거짓 선지자입니다. 꼭 “내가 바로 예수다!”라고 주장해야만 거짓 그리스도인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목사님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번제의 의미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해야 함도 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마음에서 붙잡고 있는 세상의 가치를 잘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전하는 예수는 그 목사님의 망상과 환상 속에만 존재하는 거짓 예수일 뿐입니다.
우리는 다니엘의 예언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언대로 번제단은 허물어지고 매일 드리는 제사가 폐지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제우스 신상이 세워졌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선택지가 존재합니다. 매일 제사를 드릴 것이냐, 제우스 신상을 세울 것이냐를 결정해야 합니다. 제우스 신상을 세워놓고도 상번제를 드리겠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상번제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입으로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이해하기 쉽도록 돈이 제우스 신상이 된 상태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재물은 하나님 외에 기쁨과 만족을 준다고 믿어지는 다른 신들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대상이었습니다.
재물이 기쁨과 만족이 된다고 믿으니 기쁘고 만족하기 위해서는 재물이 많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재물을 많이 벌기 위해서 나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니 하나님과 예수님의 힘까지 동원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재물을 담고도 입으로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무슨 말을 하든지 “재물을 많이 벌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라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재물이라는 제우스 신상이 마음에 들어섰음을 깨달을 때에 깜짝 놀라야만 합니다. “내가 하나님으로 기쁘고 만족하려 하지 않고 재물을 많이 모아서 기쁘고 만족하려 했구나!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이처럼 재물이라는 제우스 신상을 믿게 되어버린 나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만 한다.”라고 여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 생활을 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지금 삶의 현장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함입니다. 거짓 그리스도나 거짓 선지자가 십자가 생활화를 이야기 할 수 없는 이유는 마음에서 번제단 대신 제우스 신상 세우기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 대상은 비단 재물뿐만이 아닙니다. 부모에게는 자녀의 형통이 제우스 신상이 되기 쉽습니다. 자녀의 형통에 귀속시켜서 돈 문제나 건강 문제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십자가 생활화를 포기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포기한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포기한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에게서 나타나는 첫 번째 특징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궁극적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나의 궁극적인 기쁨이자 만족이 되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가지는 것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축복임을 모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마음으로는 여전히 이 세상의 가치들을 많이 갖는 것을 축복으로 여깁니다. 오래 살아야 하고, 자녀가 형통해야 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하고, 돈을 많이 벌어야 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믿음은 세상적인 의미에서의 형통은 전혀 기쁨과 만족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바울의 지식이 삶에서 어떠한 쓸모도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마음의 채움이라는 측면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어떠한 지식도 배설물과 같이 무의미하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삶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재물이든 승진이든 형통이든 어떠한 대상이든 마음의 채움이라는 측면에서는 기쁨의 나부랭이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것들은 내 기쁨과 만족과 상관없이 이 땅에서 정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내가 승진을 하고 돈을 많이 모으게 되었어도 그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반대로 승진도 못하고 돈도 못 벌었다고 해서 축복을 못 받은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축복은 오직 마음에 하나님을 갖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 유일한 축복이신 하나님 갖기를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따라서 마음에 제우스 신상을 세워둔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의 입에서는 결코 십자가 생활화에 대한 가르침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많이 갖고 형통한 것을 축복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생각을 인정한다면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으신 것은 형통이 아닌 불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축복은 하나님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목숨이 끊어진 것은 형통도 불통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스데반 집사님을 통해 하실 일을 다 하셨고 이 땅에 두기가 아까우셔서 데리고 가셨을 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졌음을 염두에 두자면 스데반 집사님의 죽음은 축복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는 것이 불통이 아니라면 오래 산다고 형통인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한다면 이 땅에서 오래 살아야 형통하다는 논리는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제우스 신상을 세운 상태이기에 이러한 거짓 논리를 주장하게 됩니다.
이 과정은 악순환입니다. 세상의 가치들을 기쁨과 만족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것은 마음의 번제단을 허물고 제우스 신상을 세운 것입니다. 번제단이 허물어졌으니 십자가 생활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쁨과 만족이 되심을 모르고 마음이 채워지지 않음으로 인해 기쁨과 만족을 여전히 요구하기에 세상을 더욱 추구하고 더 많은 거짓을 떠들게 됩니다.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에게서 나타나는 두 번째 특징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 땅에서 나를 장갑 삼으심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믿는다고 주장하는 하나님은 말 못하는 우상과 동일한 선상에 있습니다. 제우스 신상에 제물을 바치듯 하나님의 힘을 동원하고자 뇌물을 바칩니다. 결과적으로는 제우스 신상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척을 하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봉사하고 충성하고 헌신합니다. 헌금도 많이 내고 기도도 많이 합니다. 이러한 일들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도움을 주셔서 세상의 가치를 더 많이 얻을 수 있으리라 여깁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도움으로 제우스 신상을 더 잘 섬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거짓 믿음입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거짓을 따르다 못해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예배당에서 전도를 많이 하면 상을 주고 헌금을 많이 하면 안수집사도 시켜주고 장로도 시켜줍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목회자들에 의해서 버젓이 제안되고 교인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안타까울 뿐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은 이러한 제안을 하는 지도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매관매직을 하듯이 돈 내서 안수집사 되고 장로 되었다고 만족해하는 교인들 또한 믿음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는 공회에 잡혀갔을 때에 성령께서 말씀하시리라고 하신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성령님의 현장성을 인정한다면 그러한 발상이 나타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기쁨과 만족이심을 믿고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의 자리에 모셔 들이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장갑 삼으십니다.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이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해 나타나시게 되는 것입니다.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은 이러한 역사를 꿈에도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사람을 돕는다.”는 식의 발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나는 나대로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거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실질적으로 내가 제우스 신상을 열심히 섬기면 하나님께서도 제우스 신상을 잘 섬기게끔 도와주신다는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연인에게 용돈을 달라고 졸라서 그 돈으로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우는 이상한 행위와 같습니다.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에게서 나타나는 세 번째 특징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연합하는 사위일체를 꿈에도 생각하지 못합니다.
또 하나님과의 연합을 모르니 성화(聖化)에 대한 착각을 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변화는 단계나 급수별로 나눠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이 C등급이었던 사람이 예수를 믿어서 A등급의 인격으로 변하는 식이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에 예수 믿어봤자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우리에게 일어나는 인격적 변화는 결코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비어있게 지음 받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빈 마음에 무엇인가를 담음으로써 나라는 인격은 존재하게 됩니다. 돈이나 건강 같은 세상의 가치를 담으면 그것들이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장갑 삼습니다. 반대로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세상 것을 담았던 마음이 죽고 주님과 함께 부활함을 통해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의 자리에 모시게 되면 하나님께서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장갑 삼으시게 됩니다. 하나님과 밀착된 상태에서 하나님이 움직이심에 따라 열매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지 내가 독립적인 변화의 과정을 겪고 열매는 맺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돈을 첫 번째 현실로 받아들이면 돈이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움직여서 돈과 관련된 말을 하고 생각을 하며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가장 나쁜 형태로 나타나게 될 때에 돈을 위해 사람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극단적으로 치우치지 않더라도 돈 때문에 부부나 형제간에 다툼이 생기는 일은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돈이라는 제우스 신상에 대한 믿음이 삶을 통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반대로 마음에서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받아들인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움직이십니다. 그 결과 삶에서 만나는 대상들과 관계들에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드러내게 되고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온유와 인내와 같은 올바른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결코 도덕성의 발전을 통해 나타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은 이러한 하나님과의 연합을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개인의 독립적인 변화를 생각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참 복음 안에는 독립적 변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연합된 밀착의 정도가 점점 더 깊어질수록 말과 생각과 행동을 통해 하나님은 더욱 드러나시게 됩니다. 도덕성의 고매함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의 예언으로 돌아가 봅니다. 상번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 합니다. 그리고 제우스 신상은 마음에 담게 되는 다른 신 즉 세상의 가치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마음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이때에 제우스 신상을 세워서 상번제로써의 십자가 생활화를 없애고도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이러한 사이비적 기독교 거짓으로부터 해방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초등학문이나 어쭙잖은 책들을 통해서 얻어지는 지식으로는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허무와 거짓으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으로 채워져서 기쁨과 만족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딱 한 가지 간구드릴 것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십자가를 잊지 않고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자리가 하나님이 정해 주신 나의 자리임을 고백하기를 쉬지 않음으로써 오늘도 세상에 난무하는 모든 거짓으로부터 자유와 기쁨을 만끽하며 살아갈 수 있게 은혜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