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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에 마취된 몽유병 깨우기>의 줄거리: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대체 예수님은 무엇을 염두에 두시고 굳이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을 강조하셨을까요?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참 부담되는 말씀이지요? 불면과 피곤함, 다크써클 등이 연상 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가볍고 유쾌한 일이 깨어있기입니다.
세상에 마취된 몽유병 깨우기
(마가복음 13:28~37)
28.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29.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31.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34.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35.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36.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상에 마취된 몽유병 깨우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에 마취된 몽유병 깨우기’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 ‘깨어있으라’는 말씀을 네 번이나 반복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간곡한 당부의 말씀에 주의를 집중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28절의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마태복음에서 이미 살펴본 바가 있으므로 참고하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깨어있으라는 말씀과 연관하여 34~35절에서 집주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집주인이 타국으로 떠날 때에 종들에게 권한을 나누어주며 집안을 돌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언제고 돌아왔을 때에 깨어있는 상태에서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말씀은 잘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서 잠도 안 자고 눈을 뜬 채로 기다리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 또한 상당히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주인이 한밤중에라도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얼른 일어나 나가면 될 일입니다. 실질적으로 주인을 위해 뜬 눈으로 주인을 기다리는 종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도 이것을 바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한 것은 언제 올지 모르는 주인을 위해 막연히 기다리라는 내용이 아닙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잠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부터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무신 기록들을 살펴보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풍랑 만난 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주무시고 우리에게는 깨어있으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풍랑 만난 배의 사건을 살펴보기 전에 한 가지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독일에서 박사과정이 다 끝났을 때였습니다. 귀국을 한 달 남기고 있을 시점이었는데 괴팅겐 대학병원에서 작은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이 깨어있으라는 말씀을 이해하기에 도움이 됩니다.
저는 수술실에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마취과 의사가 척추 쪽으로 마취 주사를 놓았습니다. 바늘이 척추로 들어온다 싶었더니 곧 의식이 몽롱해집니다. 다만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의사들과 간호사들의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마취가 잘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살을 꼬집어보라고 말은 하는데 제 몸에는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기다려도 수술 할 생각을 안 합니다. 그래서 제가 몽롱한 가운데 수술은 언제 하냐고 물었더니 간호사는 수술이 끝난 지 7시간이 지났다고 하였습니다.
의식이 끊어졌다가 되돌아오는 시점이 붙어버린 것입니다. 제 의식에서는 수술이 진행되던 7~8시간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몸의 일부분을 잘라내고 꿰매는데도 마취가 되었기에 전혀 의식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상황을 염두에 두자면 예수님께서 깨어있으라고 하시는 말씀의 의미가 좀 더 명확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네 번이나 반복하신 이유는 우리가 그만큼 깨어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깨어있지 못한 상태란 마취 상태와도 같습니다. 마취는 몸을 잘라내고 꿰매어지고 있는데도 의식은 차단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깨어있다는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정확히 의식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제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풍랑 만난 배에서의 주님의 상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밤중에 일엽편주 같은 작은 고깃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배를 집어삼킬 듯이 몰아치는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바닷물이 철썩대며 배 안으로 들어오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깊은 잠을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깨어있으라는 말씀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제자들은 인간으로써 당연한 반응으로 죽음의 공포 앞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주무시는 예수님과는 반대로 깨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대단히 역설적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깨어있었던 것은 누구인지 하나님의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제자들은 분명히 깨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깨어있으라는 말씀이 무색하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의 관점에서의 대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으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깨어계셨고, 제자들은 공포심에 몸부림치고 있었으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잠들어 있었습니다. 앞서 마취의 예를 들며 깨어있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사실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깨어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마취를 하면 수술 중에 몸의 일부분이 잘려나가고 꿰매지고 있는데도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처해있던 상황에서 사실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사랑하시며 풍랑이 일어나는 현장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마취라도 당한 것처럼 이 엄연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취 환자가 수술을 의식하지 못하듯이 제자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고 자기들을 사랑하시고 현장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엄연한 사실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계셨고 그로 인해 평안을 누리셨기에 육체적으로는 주무실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서 살고자 몸부림치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마취를 하면 의식은 수술이라는 상황에 대해 잠들게 됩니다.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그 현장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잠들어 있었습니다. 잠든 채로 활동하는 몽유병자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몽유병자는 잠이 든 채로 말도 하고 움직이고 심한 경우에는 집밖으로 나갔다 돌아오기까지 합니다. 그리고는 아침에 일어나서 자신이 한 일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제자들의 모습이 이와 같았습니다. 수술대에 올라간 제가 수술을 받았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풍랑 속에 있었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주권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마취된 몸은 수술을 의식할 수 없었고, 마찬가지로 제자들은 하나님에 대해 의식할 수가 없었습니다. 의식하지 못하는데도 말하고 행동하고 있으니 몽유병자와도 같습니다.
이는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지구상에는 75억 인류가 몽유병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시고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까지 주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으로부터 시작하여 오장육부까지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엄연한 사실에 대해서는 의식이 잠든 채 멋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몽유병자처럼 살아갑니다. 이러한 삶은 진짜 삶이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지구 어느 곳에 있든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 모든 사람들이 비로소 깜짝 놀라며 의식이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나실 때에 모든 사람들이 “아! 하나님이 과연 계셨구나! 하나님이 이렇게 놀랍고도 좋으신 분이었구나!”라고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세상에서 좋다고 여겼던 모든 가치들이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는 다 배설물처럼 여겨짐에 놀랄 것입니다.
제가 수술이 끝나고 7시간이 지나고서도 왜 수술을 안 하느냐고 물었던 이유는 수술을 의식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살면서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했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실로 인식하게 될 때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의 삶과 오장육부와 사지백체를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셨다는 엄염한 사실을 깜깜하게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좋으심과 주관하심에 대해 잠든 채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몽유병자와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참새 한 마리 땅에 떨어지는 것까지도 주관하시고, 백합화 한 송이가 피고 지는 것도 주관하시며, 나의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신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우리 삶의 어느 한순간도 하나님의 생각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왜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좋으심과 주관하심을 인식하지 못한 채 몽유병자처럼 말하고 행동하게 된 것일까요? 우리 또한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내가 만나는 문제들에 대해 생각을 갖고 계시다는 엄연한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망각하고 있다면 몽유병자입니다.
제자들은 거세게 일어나는 풍랑에 마음이 마취되고 말았습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져지는 이 세상의 일들로 인해 마음이 마취되어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제가 마취되어서 수술 받는 것도 몰랐던 것처럼, 세상에 마취된 마음으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의 삶의 현장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엄연한 사실에 대해서 인식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내가 마음에 모셔야 될 유일한 기쁨과 만족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인식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잠들어버린 것입니다.
설령 대통령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삶을 주관하신다는 엄연한 사실에 대해서 잠들어 있다면 몽유병자일 뿐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3억 5천, 시진핑 주석이 중국의 13억, 아베 수상은 일본의 1억 3천만 인구를 이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에 대해 잠들어 있다면 그 나라의 모든 국민들은 몽유병자의 통치 아래에 운명을 맡긴 셈입니다.
재벌회장일지라도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빛을 드러내시며 재림하실 때에 수미산처럼 쌓인 재물은 모조리 배설물로 느껴지게 될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좋으심이 드러날 때에 배설물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음을 성경은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재벌회장이 이러한 사실에 대해 의식이 잠들어 있다면 회사를 경영하는 모든 활동이 몽유병자의 증상과 다름없습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네 번이나 반복하여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해 깨어있을 수 없다면 몽유병자의 증상을 드러낼 뿐이지 정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37절을 보면 ‘깨어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깨어있으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태국에 있는 스님들도 몽유병자의 삶에서 깨어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 주관되고 있으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들의 언어를 빌려 말하자면 하나님만이 해탈과 채움과 행복의 길입니다. 이 엄연한 사실에 대해서 죽어있는 의식이 깨어나야만 합니다. 입으로는 진리를 운운하고 극락과 천당을 언급할 수는 있을지언정 실질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의식이 죽어있기에 그 모든 말이 몽유병자의 잠꼬대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로써 자녀에게 깨어있고자 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위해 이런 저런 말을 해줍니다. 그러나 실은 자녀라는 마취제에 취해있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깨어있는 동안 하나님에 대해서는 잠들게 됩니다. 자녀들에 대해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생각하시고 뜻하신 바가 있음에 깨어있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 깨어있지 못하기에 왜 아들에게 이러한 일을 주시고 딸을 이렇게 인도하시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부모로써 책임감만을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해보지만 몽유병자들의 잠꼬대일 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시고 지금도 주관하고 계신다는 첫 번째 엄연한 사실에 대해 의식이 잠자고 있는 채로 살아가는 것은 몽유병자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몽유병에서 깨어나 하나님을 의식할 수 있을까요?
세상이라는 마취로부터 깨어나야만 합니다. 제가 마취를 당했을 때에 몸이 잘려나가는 수술을 하는데도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세상에 의해 마취를 당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결코 세상을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좋으심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이 일을 위해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나를 마취시킨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세상에 대해 깨어있음은 죽게 됩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고, 또 2장 20절에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고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는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면 세상에 의해 마취된 상태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의해 마취된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가장 좋으시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좋으심을 받아들일 때에 세상의 가치들은 배설물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인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한 시도 건너뜀이 없이 사랑으로 주관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잠들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잠에서 깨어나게 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늘 짊어지고 다니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이러한 심정으로 십자가를 생활화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의 재림 또한 가까이 있는 사건으로 느낄 수 있게 됩니다. 29절을 보면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어느 특정한 시기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심리적 상태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당장이라도 일어날 일처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상태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관하심과 하나님의 좋으심이라는 엄연한 사실에 대해 의식이 깨어있을 때에 예수님의 재림은 가깝게 느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게 됩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함을 통해 내가 세상에 대해 못 박혀 죽은 자임을 삶의 현장 어디서든지 고백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죽은 자의 의식을 유지시켜 나갈 때에 죽겠다고 아우성치던 제자들과 같은 몽유병자의 삶은 중단되고 풍랑 속에서 주무시던 예수님처럼 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언제 어디서든 나는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못 박혀 죽은 자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음으로써 세상의 마취로부터 깨어나 하나님께서 삶을 다스리시며 최고로 좋은 분이시라는 엄연한 사실에 대해 깨어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한 가지 소원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마음의 시선이 중단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세상 마취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하나님의 좋으심과 주관하심에 깨어있는 자들이 되어 몽유병자의 삶이 중단되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