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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 한솥밥 먹는 식구들>의 줄거리: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가족의 개념은 식구(食口)입니다. 밥을 같이 먹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지요. 예수님의 교회는 예수님의 사람들이며 그래서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을 일용할 양식 삼아 날마다 먹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교회는 십자가 한솥밥 먹는 식구들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한솥밥을 먹음으로써 나타나는 삶의 방식이 참으로 독특합니다.
십자가 한솥밥 먹는 식구들
(마가복음 14:12~26)
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13. 예수께서 제자 중의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14.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5.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16.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 한솥밥 먹는 식구들>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 한솥밥 먹는 식구들’
우리가 읽은 12~16절까지 이후로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 것에 대해 언질을 주시고 최후의 만찬과 성찬식을 제정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와 관련하여 십자가 한솥밥의 의미란 무엇이며 십자가 한솥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어떤 방식으로 살 것인가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앞두시고 예수님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분명히 구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를 제자로 삼으실 때부터 배반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배반이 일어나게 될 것을 새삼스럽게 언급하시는 이유는 예수님께 속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 짓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말씀하시고자 성만찬의 근거가 되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이 최후의 만찬에서 하신 말씀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먹는 것으로 비유하고 계십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키시며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드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22~24절을 보면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습니다. 사실은 떡과 포도주는 유월절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일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유월절과 무교절에 먹는 음식은 구운 어린 양의 고기와 쓴 나물입니다. 이를 통해 출애굽을 기억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정해진 음식이 아닌 일반적인 식사인 떡과 포도주를 비유로 삼아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 떡은 유월절에 맞추어진 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병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맥락에서의 언급이 무교병에만 해당되는 내용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떡과 포도주란 가장 대중적인 식사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밥과 국에 해당합니다. 이는 곧 일상적으로 떡과 포도주를 먹듯이 삶의 모든 순간에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님의 죽음을 먹는 것을 생활화하는 자들이 곧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 전체가 교회가 됩니다. 결국 교회는 예수님의 죽음을 먹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의 죽음을 먹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임을 마음으로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는 곧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의 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양식이 되는 모든 대상은 죽어야만 합니다. 소도 닭도 돼지도 죽어야만 양식이 될 수 있습니다. 채소도 곡식도 양식이 되려면 죽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은 당신에게 속한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양식으로 제공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한솥밥을 먹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람들은 세상에 대해 죽은 자들입니다. 반대로 그렇지 못하여 세상에 대해 살아있다면 예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몸이 살기 위해 양식을 먹어야 하듯이 마음이 살기 위해 예수님의 죽음을 먹어야만 합니다. 세상에 대한 죽음이라는 십자가 한솥밥을 먹을 수 없다면 아무리 예배당을 오래 다니고 스스로를 교인이라 주장할지라도 결코 예수님의 사람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몸을 위해 밥을 먹고 물을 마시듯이 예수님의 죽음은 마음을 위한 일용할 양식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예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먹는 삶을 살아간다면 비록 멀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한솥밥을 먹는 식구입니다. 하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하나의 주님의 죽음을 먹음으로써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세상에 대해 죽지 않는 자는 결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든지 파는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자들의 대표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었고 예수님을 팔아버린 자들의 대표가 가룟 유다였습니다. 이들은 입으로는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대해서 살아있는 자들이었기에 예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 세상에서 주어진 것들을 지키기 위하여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들과 다르게 예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내게 주어진 세상의 것들에 대해 죽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가룟 유다는 아직 갖지 못한 세상의 것들을 얻고자 뛰어가는 야심가였습니다. 우리는 결코 가룟 유다처럼 세상을 쟁취하고자 뛸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밥 먹고 물 마시듯이 먹어야 하는 사람들이기에 세상에서 주어진 것들을 지킬 수도 없고, 갖지 못한 것들을 얻겠다고 뛰어갈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사람이 어떠한 사람들이며 가룟 유다가 왜 그러한 사람이 될 수 없었는지를 분명히 드러내고 계십니다.
십자가 한솥밥을 먹는 예수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식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몸으로 연결된 가족들보다도 예수님으로 연결된 사람들이 진짜 식구입니다. 어제 한 집사님과 목사님께서 강릉을 찾아오셨습니다. 처음 뵙는 분들이지만 그분들과 저는 이미 한 식구였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마음속에 품고 삶 속에서 표현하며 사는 분들이었기에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십자가 한솥밥의 식구가 되었다는 것은 세상에 대해 죽은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내게 주어진 세상 것들을 지키려 할 수도 없고 세상의 것들을 얻고자 뛰어나갈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한솥밥을 먹는 식구들은 이 세상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아무리 주님의 죽음을 먹고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고백할지라도 몸이 살아있는 한 세상에서 살아가야만 하고 삶은 진행되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실질적인 문제와 죽은 자의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당위성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이에 대한 대답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제자들에게 직접 그러한 삶이 이루어져 나가는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12절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예루살렘에서만 유월절 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기에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지역의 유대인들에게 자기들의 집과 식사자리를 제공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위한 장소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장소를 찾으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으십니다. 13~14절에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에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고 하셨습니다. 일어나게 될 상황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하시며 그대로 행하면 유월절 음식을 먹을 준비된 객실을 얻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이에 대해 주석서들을 보면 평소에 예수님을 존경하는 사람이 객실을 준비하였고, 이에 대해 사전에 알고 계시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신 것이라 이해하기도 합니다. 다만 이러한 이해는 상황에 대한 설명은 되지만 말씀의 이치에는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때에 예루살렘에서 약 3km 정도 떨어진 베다니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자들은 유월절을 보낼 장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고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어느 집을 정해두고 가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성내로 들어가서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사람이라 번역된 말은 원문을 보면 남자입니다. 당시에 집안일은 여자의 일로 여겨졌기에 남자가 물동이를 들고 다니는 경우는 흔치 않았습니다. 어떤 주석에서는 이를 두고 남자가 물동이를 든 것이 눈에 띄는 표식이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만 이 또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과도한 해석이라 여겨집니다.
둘레가 4~5km나 되는 예루살렘 성은 호텔의 로비같이 한 사람을 특정해서 발견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전국에서 이스라엘 성인남자들이 다 몰려와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모이는 인파가 300만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설령 이것이 과장이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70만 명이상의 남자가 예루살렘 성내에 모여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남자를 표식으로 삼는다는 것은 대단히 비효율적인 일이었습니다. 시계도 전화도 문자도 없던 시대에 누군가를 찾거나 만나고자 했다면 자리를 정해놓고 만나는 것이 당연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을 받으시고는 물 한 동이 가지고 가는 남자를 따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주인이 식사를 위해 예비 된 다락방을 보여줄 것이라는 것까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한 장소를 굳이 제자들도 모르게 준비하셨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명백히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일들이 이루어져 가는 모습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베다니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었던 상황, 유월절의 때가 이르게 된 상황, 예루살렘 성내에서 식사자리가 예비된 상황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을 받아서 아셨기에 제자들에게 눈에 보이듯 자세히 상황을 설명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은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자주 드러났습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셨고, 8장 28절에서도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베다니에서 예루살렘까지 3km는 약 4300보 정도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이 걷게 될 한 걸음 한 걸음을 모두 아시고 이러한 일들을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왔을 때에 물 한 동이 가지고 가는 남자를 보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를 따라가서 주인을 만났고 스승과 함께 유월절을 보낼 장소에 대해 물었고 주인은 기꺼이 승낙합니다. 해석에 따라서는 이곳을 마가다락방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만 본문 말씀에 근거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의해 삶이 진행되는 대표적인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 한솥밥을 먹는 사람들의 삶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사람의 양식이 되기 위해서는 생물은 죽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양식이 되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밥 먹고 물 마시듯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고백을 반복하는 것이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지키고자 계획할 수도 없으며 세상의 것들을 얻고자 계획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십자가 한솥밥을 먹는 사람들의 삶을 책임지십니다. 제자들이 베다니에서 예루살렘까지 가게 되는 한 걸음 한 걸음을 인도하셨고, 물 한 동이 가지고 가는 남자와 만남을 이루게 하셨으며, 준비된 다락방을 마지막 만찬의 장소로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세상 것을 지키기 위해 계획을 세울 수도 없고, 세상 것을 쟁취하고자 계획을 세울 수도 없이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건을 의도적으로 제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마음의 양식이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떡과 포도주를 일용할 양식으로 먹듯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마음의 일용할 양식으로 먹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먹는 이유는 세상에 대해 죽기 위함입니다. 가진 것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죽고, 못 가진 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죽음으로써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가질 수 있는 마음이 준비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는 관계를 지키려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가지고자 하는 힘은 예수님의 죽음을 먹음으로써만 생겨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먹지 않고 하나님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이 세상 것들을 지키고 갖기 위하여 하나님을 동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을 가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을 가진 상태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 12장 30절에서 말씀하신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을 먹지 않고는 지켜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죽으신 예수님을 먹어서 생기는 힘으로 하늘의 하나님을 갖고자 할 수 있고, 하나님을 가진 마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갖고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삶을 예루살렘으로 향한 두 제자들처럼 인도해나가실 것입니다.
유월절을 맞이하여 붐비는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머물 식사 장소를 찾는 일은 어려웠습니다. 하물며 잘 준비된 만찬 장소를 찾아내는 것은 제자들의 노력과 수완과 창의성은 제로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발걸음 하나까지 계산하시며 물 한 동이 가지고 가는 사람과의 만남을 계획하셨고 그 주인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만찬을 위해 준비된 큰 다락방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가 육체의 에너지를 얻기 위하여 날마다 밥과 물을 먹듯이 주님의 죽음을 날마다 먹을 때에 하나님 사랑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럴 때에 이 세상의 삶은 나의 노력과 수완과 창의성과 계획이 없는 제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 한솥밥 먹는 식구들은 한국에도 있고 중국에도 있고 일본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세계 어느 곳에 있든지 십자가 한솥밥을 먹는 모든 사람들이 식구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먹고 마심으로써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 마음으로는 예수님의 죽음을 먹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라는 자아의식을 유지할 때에 두 제자가 경험한 하나님의 역사와 같은 일들이 우리의 삶에서도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감사 말고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사람으로 구분되기 위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음의 양식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먹고 마시기를 게을리 하지 않게 해 주셔서 십자가 한솥밥 먹는 식구로 살아가게 하시고 두 제자가 경험한 일들과 같이 하나님의 계획된 뜻을 따라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