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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는 꼭 다시 믿어야 한다>의 줄거리:
예수님 이름을 처음 접할 때 그 마음에 세상이 들어차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세상만을 좋아하는 상태에서 예수 이름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이 세상을 등지고 떠나 하늘로 가려는 마음이 아니었던 한 예수는 반드시 다시 믿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부인한 제자들에게 한 마디도 나무라심이 없었던 이유입니다.
예수는 꼭 다시 믿어야 한다
(마가복음 14:27~31)
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29.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1.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는 꼭 다시 믿어야 한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는 꼭 다시 믿어야 한다’
예수님의 이름을 처음 접할 때 마음에 세상이 들어 차있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세상을 좋아하는 상태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처음 접하게 됩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세상을 떠나려고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면 예수를 다시 믿는 과정은 꼭 필요합니다.
터키를 비롯한 중동 지역의 대부분은 현재 이슬람교를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들은 초대 기독교의 성지이기도 합니다. 대체 왜 이들 지역은 이슬람교로 뒤집히게 된 것일까요? 기독교 역사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던 유럽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유럽의 기독교는 전혀 맥을 못 추고 있습니다. 기독교 문화만이 남아있을 뿐 복음의 생동감은 죽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교인 숫자도 1200만이라는 숫자를 정점으로 떨어지기 시작하여 현재는 600만 정도라고 합니다. 실질적으로 주일날 예배당에 출석하는 교인의 숫자만 헤아린다면 250만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이렇게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예배당에는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을 우스갯소리로 가나안 교인이라고 합니다. 가나안을 거꾸로 읽으면 안나가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나안 교인들의 숫자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가에 대해 질문을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혹은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얻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중동 지역은 이슬람교에 정복된 뒤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유럽의 기독교는 문화만을 남기고 죽어버렸습니다. 한국의 기독교 또한 빠르게 쇠락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오늘 본문은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예수 다시 믿기의 과정을 밟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다시 믿기는 기독교 선교 역사에서 무척 낯선 말입니다.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 대한 선교는 이루어졌지만 이미 믿는 사람들에게 다시 믿자는 선교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특정한 시기나 지역에서 부흥운동이나 회개운동이 일어난 적은 있었지만 예수 다시 믿기를 목표로 선교나 전도가 이루어진 적은 없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쇠락해가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생각해보자면 예수 다시 믿기는 예수님이 정해 놓으신 믿음의 정통 코스입니다. 본문에서는 수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을 예고하십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 중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버릴 사람이기에 제외하고서라도 열한 제자가 전부 예수님을 배척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제자들을 만나셨을 때에 단 한 마디도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제자들을 나무라지 않으신 이유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당연히 제자들이 잘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말씀에서 예고하신 대로 예수님께서는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인하는 과정이 진짜 예수 믿기를 위한 과정에 포함되어 있음도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그러했듯이 우리가 깨닫지 못했을 뿐입니다.
앞서 예수 다시 믿기의 과정은 꼭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처음 불렀을 때의 마음상태를 유지한다면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반드시 구원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역사를 통해 증명되었듯이 그러한 기독교는 쇠락하여 사라지게 됩니다.
다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애초에 세상을 버리기 위해 예수를 믿은 것이라면 그 믿음은 지속되어야만 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 4절을 보면 에베소 교회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처음 사랑이 바로 처음부터 세상을 깡그리 버리기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에 세상을 버리기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전도 받은 대로 아무 저항 없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예수를 다시 믿어야 합니다. 예수 다시 믿기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구원은 주어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습니다.
27절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위시하여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척할 것을 예고하십니다.
다만 가룟 유다의 배신과 제자들의 부인은 성격이 다릅니다.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비롯해 예수님을 부인한 제자들에 대해 단 한 마디도 나무라지 않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팔아버릴 가룟 유다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26장 24절에서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다는 것은 가장 혹독한 저주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것과 예수님을 파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똑같은 배신처럼 느껴지는데 왜 이렇게 차이를 두신 것일까요?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이미 확고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전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비전은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이 로마 식민지로부터 독립하는 것이었고, 다윗 왕국을 재현하는 것이었으며, 그 대업에 참여함으로써 권력과 재물을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유다는 그러던 중 예수님을 만났고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자신이 꿈꾸었던 대업이 이루어질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을 부인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특별한 비전이 없었습니다. 그저 매일 먹고 사는 것을 인생의 과제로 삼았습니다. 마태 같은 경우에는 세리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사회적으로 매국노이자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혀있었기에 보람 없이 살았습니다. 물론 이들에게도 나라의 독립과 다윗 왕국의 재현이라는 바람이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보편적 바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처럼 그러한 일에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헌신하려 했던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비전이 없었던 이들이 나중에 보면 서로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다투기까지 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로 지내던 중에 다윗 왕국 재현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분명한 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와 다른 제자들의 차이점은 그렇게 세상에 대한 소망이 생긴 것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에서 생겨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비로소 세상에 대한 계획과 비전을 갖게 된 것입니다. 가룟 유다에게서 예수님을 빼면 원래 있었던 꿈과 비전이 남게 됩니다. 하지만 제자들에게서 예수님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갖게 된 나라의 독립과 다윗 왕국의 재현 그리고 자신들이 고관대작의 자리에 오르는 꿈은 온전히 예수님의 능력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고하셨고 실제로 붙잡히시게 되자 제자들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꿈과 비전을 갖기는 고사하고 이제는 목숨이라도 부지해야 하는 공포의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가룟 유다와 열한 제자들의 차이가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습에서도 발견될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몸으로는 예수님을 따랐지만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따랐던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이미 헌신하던 인생의 비전을 위하여 예수님을 앞세웠습니다. 인생을 위해 예수님을 채용한 고용주의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고용주의 입장에서 예수님께 지불하던 월급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시키는 대로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였지만 속으로는 예수님을 부리는 고용주의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러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입으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고 예수님이 좋고 예수님밖에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온갖 칭찬과 존경어린 수식어를 붙이지만 실제로 마음에서는 세상에서의 목적을 이루고자 예수님을 고용하고자 합니다.
한편 제자들은 말 그대로 예수님을 따르기만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세상에 대한 꿈과 비전이 없었으니 예수님을 앞세울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이들의 문제는 예수님을 따랐지만 예수님이 도달하시고자 한 목적지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본문 27절은 예수님께서는 스가랴 13장 7절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에 근거하여 제자들과 예수님의 관계를 양과 목자에 빗대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목자를 따르던 양들이 자기들 딴에는 목적지를 예상했으나 정작 목자가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보자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상태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최종 목적지가 나라의 독립과 다윗 왕국의 재현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임금 되실 때에 최측근이었던 자신들은 고관대작의 자리에 오르리라는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마주하게 되었던 것은 꿈과 비전의 실현이 아닌 십자가의 충격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붙잡히시자 모른다고 부인하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상황을 보고는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전 세계 사람들이 애용하는 목걸이 등의 장신구가 되었습니다. 남미의 축구 선수들은 골을 넣으면 으레 성호를 긋습니다. 이렇게 십자가가 종교화되고 미화되었지만 당시에 제자들이 만난 십자가는 충격이자 공포 자체였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돈을 빌리고 집을 팔아서 사업에 투자했습니다. 삼 년 동안을 그렇게 투자를 해서 이제 겨우 수익을 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핑크빛 미래가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상치 못한 악재로 인해 사업이 풍비박산 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길바닥에 나앉는 정도가 아니라 감옥에 끌려가게 생겼습니다. 여러분께서 이러한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시면 제자들이 마주한 십자가의 충격이 어느 정도였을지 조금이나마 체감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그야말로 생의 모든 것을 다 잃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목숨이나마 부지하고자 예수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제자들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시 믿는 과정이 있어야만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세상에 좋은 것이 많고 세상에서 주어진 것을 지키고자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소개받게 됩니다.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은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예수 이름을 부르면 모든 재산을 박탈당하고 가족까지 다 잡혀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오직 세상을 등지겠다는 일념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에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을 좋아하는 마음을 유지한 채로 예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렇게 예수 이름을 부를 때에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오히려 세상에 대한 희망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혹은 기존에 갖고 있었던 세상에 대한 꿈과 비전이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되리라는 가룟 유다식의 희망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본문에 근거하여 말씀드리자면 예수님을 제대로 믿기 위해서는 꿈과 비전을 버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소원과 희망을 배설물처럼 여겨서 짓밟고 버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룟 유다에게 하신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꿈과 비전은 믿음을 말려 죽이는 독이고 원수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예상했던 것과는 달랐던 예수님의 목적지는 어디셨을까요? 십자가는 제자들에게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충격적인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십자가는 구원의 대업을 이루시기 위한 필수적인 관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도달하시고자 하셨던 최종 목적지는 이 세상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바랐던 나라의 독립과 다윗 왕국의 재현은 우리에게 다른 형태로 생겨날 수 있습니다. 부모의 사업이 잘 풀리는 상황, 자녀들이 엘리트 코스를 달리는 상황, 암이 걸린 몸이 회복되는 상황과도 같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목적지는 이렇게 세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지가 세상에 있지 않기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의 목적지를 지향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지는 세상 바깥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최종적인 목적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마음을 가지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안에서 무엇인가를 이루고 싶고, 세상 것이 좋아서 지키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받아들인 예수 이름에 대해서는 반드시 십자가라는 충격적인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마주한 자들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예수 다시 믿기의 과정이 없다면 믿음은 결코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세상 것을 좋아하는 상태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세상 것을 가지기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수단으로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러한 마음상태가 충격적으로 박살나고 참담하게 깨어지는 것입니다. 이 순간을 통해 예수 다시 믿기는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나무라지 않으셨던 이유도 세상에 죄인 아닌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물론이고 우리가 죄인인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와 삶의 모든 내용을 주관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붙잡지 못하고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상에 있는 것들을 마음에 담는 것이 죄입니다. 보이고 들리고 만져진다는 이유에서 세상을 마음에 담기는 쉬우나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모두가 죄인인 이 상태를 감안하셔서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명의 제자들이 십자가 앞에서 그들의 꿈과 비전이 풍비박산 나는 과정을 겪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십자가는 믿음으로 가는 정통 코스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모으십니다. 갈릴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처음으로 만났던 장소였습니다. 처음으로 만난 장소에서 다시 관계를 시작하자는 희망과 기대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망은 바로 십자가 사건에서 시작됩니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 비로소 제자들의 세상에 대한 꿈과 비전이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갈 수 있도록 준비가 됩니다. 이러한 새로운 믿음을 가지게 된 제자들의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희망차게 기대하시며 땀이 피로 변할 정도로 번민하셨던 십자가의 과정을 뚫고 지나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제자들의 세상에 대한 애착과 사랑은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세상을 등지고 마음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보좌 우편까지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예수님과 동일한 최종목적지를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지 않을 때 기독교가 어떻게 되는지는 역사가 증명합니다. 중세시대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예루살렘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하여 안디옥을 거쳐 소아시아로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박해의 시기를 지나 AD.313년에 로마제국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게 됩니다.
기독교가 탄압받던 시기에 로마는 황제숭배를 강요하였습니다. 또한 로마제국은 식민지 통치를 위하여 황제의 위엄을 훼손하지만 않는다면 각 민족들의 우상숭배도 인정해주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황제를 신으로 섬기는 것을 거부하고 우상을 배척하기 위해서 죽음을 각오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상황이었기에 기독교는 세상에 대한 죽음이라는 십자가의 순수성을 간직한 채 퍼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이 되자 기독교는 순수성을 잃기 시작합니다.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이 의미하듯이 중세시대 전체는 기독교 문화권 아래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내부로부터 썩어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상에 대한 죽음이라는 사실은 잊히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교황을 세우고 교황청을 만들며 권력에 몰입하게 되었고 면죄부를 팔며 재물을 탐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경계하셨던 바리새인들과 같은 독사의 새끼들로 전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중세의 기독교가 이토록 타락했던 이유는 예수 다시 믿기의 과정이 잊혔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박해를 당하던 시대에는 순수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을 다 포기해야만 예수 이름을 부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포기하는 대신에 하늘에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여 사위일체를 이루고자 하였던 순수함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도 예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자 믿음은 시험대에 오르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여전히 좋아하는 중에 예수 이름을 소개받게 됩니다. 그리고 오히려 예수를 믿음으로써 좋아하는 세상 것을 더 잘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커지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 예수 믿기를 위하여 십자가 생활화는 제시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생활화되지 못한 채 한 번 일어난 죄 사함의 사건으로써만 기억되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의인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죄의식 없이 예수 이름을 부르며 세상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에서 부딪히고 충격을 받아 세상에 대한 꿈과 비전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 믿음을 회복하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마음을 하늘로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예수 믿기의 과정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이러한 과정이 제거되고 말았습니다.
예수 다시 믿기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세상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다시 믿기를 이룰 수 없다면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라는 저주의 말씀이 그대로 적용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다시 믿기는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예수 믿읍시다.”라는 선교와 전도만큼이나 “예수 다시 믿읍시다.”는 병행되어 나가야만 합니다. 예수 다시 믿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가룟 유다에게 내리신 저주는 그대로 임하게 됩니다. 여러분을 겁주기 위해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같이 살기 위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제자들이 받은 충격을 생활화하고 세상을 떠나는 결심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등지고 하늘로 올라가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길을 따를 때에 마음이 떠난 이 세상의 삶은 반드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다스려지게 될 것임을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맡으실 일을 내가 주체적으로 끌어안는 것이 죄입니다. 예수 다시 믿기를 통하여 하늘을 목적지로 삼아서 세상을 떠나는 생애를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세상을 좋아하여 죄의 장아찌로 살아가던 우리에게 십자가를 붙잡을 수 있는 기회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십자가를 붙잡음으로써 날마다 세상을 떠나 하늘까지 가는 예수 다시 믿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