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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2

녹취문: (S) 하나님이 약점인 사람_태승철 (마가복음 14:32~42)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7.06|조회수72 목록 댓글 0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이 약점인 사람>의 줄거리:

셰익스피어가 말합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아내로서 감당하지 못할 어려움을 어머니로서는 감당합니다. 그러나 이게 다일까요? 자녀 때문에 너무나도 약해지는 법은 없을까요?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더 약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약하지만 신앙인은 강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신앙인에게 하나님은 치명적 약점입니다.


하나님이 약점인 사람

(마가복음 14:32~42)

 

32.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이 약점인 사람>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이 약점인 사람

셰익스피어의 명언 중에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자로써 감당하지 못할 어려움을 어머니로써는 능히 감당해 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한 권사님께서 마흔 살에 남편은 먼저 하늘로 가시고 초등학생인 외아들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먼저 간 충격이 너무나 심하셨는지 맥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쇠약해져서 집과 병원을 반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외아들이 엄마 나 배고파라고 하는 말에 충격을 받아서 아들을 위해서라도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하시고는 병상에서 일어나셨다고 합니다. 우리 삶을 돌아보면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은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더 약할 수 있습니다. 권사님의 경우에서 남편이 아니라 초등학생 외아들이 먼저 죽게 되었다면 남편이 죽었을 때보다 더한 우울함을 겪으셨을 것입니다. 아들은 어머니를 강하게 만드는 힘이기도 하지만 어머니를 가장 약하게 만들 수 있는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살펴볼 본문의 내용을 대할 때마다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33~34절을 보면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시고 고민하여 죽겠다고 말씀하시는 분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십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38절에서는 제자들을 향해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누구보다도 마음이 약해진 모습을 보이셨던 분은 제자들이 아닌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심히 놀라셨다는 것은 마음이 혼란스럽고 두려움이 거센 풍랑처럼 일어나서 걷잡을 수 없는 상태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본문 말씀을 볼 때 십자가를 앞두신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이 드러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예수님의 행적을 염두에 둔다면 예수님은 그러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풍랑 만난 배에서의 상황과 겟세마네 동산을 비교해봅니다. 풍랑 만난 배에서는 제자들이 심히 놀라며 슬퍼하고 고민하여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는 깊은 잠을 주무셨습니다. 그때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이와는 반대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잠을 자고 예수님이 놀라고 당황스럽고 두려움에 휩싸이셔서 제자들을 깨우십니다.

이 두 상황을 놓고 비교해보면 부자연스러운 것은 항상 예수님이셨습니다. 풍랑만난 배에서 죽음의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하루 종일 유월절 절기를 지키고 겟세마네까지 왔기에 피곤하여 조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자연스러움을 역행하시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풍랑 속에서는 평안한 가운데 깊은 잠을 주무시고 피곤한 중에 깨어있는 부자연스러움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으로부터 시작하여 기독교 역사에는 많은 순교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순교는 마음이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평강을 누리는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초대교회의 교부 폴리캅(Polycarp, 69~155)86세에 화형을 당했습니다. 살이 타들어가는 고통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고통 중에 최고라고 합니다. 그런데 폴리캅은 화형의 현장에서 스데반 집사님 못지않은 평강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육체의 고통 앞에서 단지 인간적인 두려움을 느끼셨다는 해석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하심을 따지자면 예수님만큼 충만하신 분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이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던 것일까요? 앞서 남편을 상실한 권사님이 쇠약해지셨다가 아들을 생각하여 기력을 되찾았다는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놀라움과 슬픔 또한 상실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충만하셔서 그토록 담대하시고 당당하셨음을 염두에 두자면 무엇을 상실하셨을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육체의 고통의 자리이기 이전에 영적인 저주의 자리였습니다. 영적인 저주란 곧 하나님과의 결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님과 함께 삼위일체로 계셨습니다. 그리고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겟세마네 동산 이전까지 단 한순간도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 되심이 중단된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 안으로 하나님께서 들어와 계셨고, 또 아버지 하나님 안으로 예수님이 들어와 계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안에 계신 예수님이 성령님이고 예수님 안에 들어와 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성령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마주하시게 되는 십자가의 자리는 저주의 자리였습니다. 영원 전부터 한 번도 중단되지 않았던 하나님과의 하나 되심이 끊어지는 자리였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746절을 보면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저주의 자리로 내려오셔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 되지 못하는 자리로 버려짐을 받으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담대하시고 권위가 당당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충만히 가지셨음으로부터 비롯된 일이었기에 하나님 아버지를 잃는 것은 예수님의 치명적 약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은 공생애 때의 담대하신 모습을 경험한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한 모습을 보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약점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519절에서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그렇기에 공생애 때의 예수님은 하나님 때문에 강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강점은 하나님과 떨어져야만 하는 상황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이 됩니다.

빌립보서 26~8절을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하셨음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실 수 있으셨지만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심으로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말과 행동을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떨어져서는 단 한순간도 살 수 없고,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으며, 단 하나의 생각도 할 수 없다고 여기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야말로 예수님의 강점이셨고 동시에 예수님을 아무것도 아니게 만드실 수 있는 약점이시기도 하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과 동일하게 하나님을 강점이자 약점으로 갖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한편 제자들의 상태로부터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잠들고 말았습니다. 이는 인간으로써 당연한 일이었지만 결코 괜찮은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던져지실 저주의 자리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잠들어 있던 자리였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과 하나 됨을 이루지 못한 저주의 자리에 놓여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들어오시지 못하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저주의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지는 저주에 자리에 놓이게 되심에 대해 이렇듯 놀라고 슬퍼하십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때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모습은 참 낯섭니다. 온갖 기적을 행하셨으며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사회지도층들 앞에서 항상 당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나약해지신 이유는 하나님과 떨어지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애초에 하나님과 떨어져 있음에도 전혀 불안해하지도 괴로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왔고 지구의 75억 인류가 모두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과 연결되고 하나님으로 충만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적어도 십자가 복음방송을 들으시는 여러분들만이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충만함을 경험하실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졌음에도 우리는 제자들과 같이 편안하게 살아갑니다.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순간이 있을지라도 그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215절을 보면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치명적인 약점은 육체입니다. 본문 38절에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앞서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노라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괴로워하시는 그 괴로움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8절 앞부분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험에 드는 깨어있지 않은 상태가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십니다. 우리 몸의 오장육부와 사지백체의 모든 기능을 알고 계시고 주관하고 계시고, 우리가 처한 경제적 형편이나 가정상황과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모르시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그 하나님을 모른 채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깨어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렇게 깨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심하는 것이 시험에 든 것입니다.

어제 두 자매님이 강릉에 오셨습니다. 직장 동료가 목사님 사모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계신데 코로나19 사태가 어떻게 있을 수가 있겠느냐고 하시더랍니다. 그렇다면 지금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 사태로 괴로움을 당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일까요?

시험은 깨어있지 못할 때에 들게 됩니다. 깨어있지 못하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잠들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풍랑을 보고 귀로 난리 소문을 듣고 손으로 만져지는 상황으로부터 여러 가지 환난이 발생합니다. 이렇게 육체로 만나는 상황에 마음이 달라붙을 때에 하나님에 대해서는 잠들게 됩니다. 마음이 육체에 붙어있는 상황에서는 지금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삶의 현장을 주관하시는 사실에 대해서 깨어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된다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나한테 이러실 수가 있느냐?”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36절을 보면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기도는 모든 기도의 모범처럼 여겨집니다. 분명 이 기도는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기도이지만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의 내용과는 사뭇 다릅니다. 예수님 평생에 한 번 하신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개별적인 소원이나 바람을 가져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의도에 차이가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위하여 예수님을 버리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아셨으나 동시에 단 한순간이라도 하나님과 떨어지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떨어지는 것이 너무나 괴로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소원이 달랐던 유일한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끝내 스스로의 뜻을 주장하시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시기를 선택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기도를 오해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도였지 우리에게 허락될 수 없는 기도입니다. 애초에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있다면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원하시는 바에 따르면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가 있을 때에 돈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랍니다만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올바른 기도의 자세가 아닙니다. 애초에 돈 문제에 마음이 반응하게 된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내 마음은 돈 문제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로 가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쁨과 만족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과 하나 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 충만함이 이루어질 때에 하나님의 뜻과 생각은 주어지게 됩니다. 따로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돈 문제에 마음을 주는 것을 문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오해하고 따라한다면 하나님과는 끝내 하나 되지 않겠다는 마음을 유지하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함부로 따라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단 한 번 하신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이 떠나셔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해 괴로워하시며 하셨던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잃는 것을 치명적인 약점으로 여기셨던 예수님이기에 하실 수 있는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기도를 오해하여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마음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대상은 재산이고 건강이고 가족입니다. 이러한 대상을 치명적인 약점으로 유지하는 상태에서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겟세마네의 기도는 결코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제자들과 동일하게 우리에게 문제시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몸을 우선적으로 의식하는 마음상태입니다. 몸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든지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고 보고 계시고 주관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깨어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 깨어있지 못하고 세상에 대해 깨어있다면 반드시 시험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지금 이런 상황에 처해있는데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이 맞을까? 하나님이 나를 알고 계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이 정말일까?”라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가?”라고 시험에 들었다면 결코 마음의 평안은 유지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돈이 한 푼도 없을 수 있나? 어떻게 자녀들이 시험 보는 것마다 다 떨어질 수 있나? 어떻게 몸이 이렇게 아플 수 있나?”라고 시험에 든다면 결코 마음의 평안은 유지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마음에서 육신은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육신에 달라붙어 있기에 육신으로 대하는 모든 일들이 커다란 약점이 됩니다. 삶의 현장에서 조그만 문제가 벌어져도 마음이 온통 흔들립니다. 예수님과는 반대의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이 약점이셔서 하나님을 잃는 것에 대해 약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만 잃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 사건은 존재할 수가 없었습니다.

반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을 언제나 아버지로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마음에서 육신으로 대하는 일들을 약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건강과 돈과 자녀의 형통과 승진이 마음의 약점이 되었습니다. 승진 명단에서 제외되었다고 삶의 의욕이 사라져버립니다. 육신이 약하다는 것은 육신 자체가 약하다는 것이 아니라 육신이 마음의 약점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마음이 육신으로 만나는 사건과 대상들에 반응하게 되었으니 조그만 무슨 일이 생겨도 평안이 깨어집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볼 때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시험에 든 대표적 모습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면 예수님이 달려 죽으시는 상황조차도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깨어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은 고사하고 삶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건들에 마음이 달라붙어서 괴로워할 때가 많습니다. 그만큼 마음이 육체에 묶여있는 것이고 육체가 치명적인 약점이 된 것입니다.

그러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경험하고 마음을 하늘로 보낼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 마음이 머무르게 되자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이신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내 아버지로 갖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과 동일하게 하나님 아버지를 약점으로 가지게 되었습니다. 돈과 가족과 건강 등의 육체로 만나는 대상들이 약점이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마음을 하늘로 보내서 하나님을 약점으로 갖게 되자 오히려 세상에 대해서는 강해지게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공회에 붙잡혔던 사건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바로 스승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으로 선고를 내린 자들이었습니다. 그 산헤드린 공회가 이번에는 예수가 부활했다는 거짓말을 유포한다는 명목으로 제자들을 붙잡으려 했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들을 피해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마음을 하늘로 올려보내자 마음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입니다. 하늘로 올라간 마음에 하나님으로 채워짐이 땅에서는 성령강림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을 치명적인 약점으로 갖는 상황이 되자 제자들은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상황을 생각도 할 수 없고 말도 할 수 없는 바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들이 산헤드린 공회에 붙잡혀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의 모습이 사도행전 418~19절에 나타납니다.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하였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재판에서 하나님께서 주권자이자 사랑하시는 아버지로 와계심을 느꼈던 것입니다. 자신들을 재판하려는 산헤드린 공회원들보다도 우선적으로 느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고 담대히 선언하게 됩니다. 이러한 베드로와 요한을 꺾을 수 있는 힘은 지구 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보이셨던 나약함은 하나님을 약점으로 갖고 계셨기에 나타날 수 있었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을 잃으면 나는 티끌만도 못하다.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지 않으면 나는 말 한마디 할 수 없고 생각도 할 수 없고 감정과 의지도 가질 수 없다.”고 여길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세상을 슈퍼맨처럼 강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육신은 우리의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 목숨이 소중하고 자녀가 소중하고 돈이 소중할 수 있습니다. 검사나 판사나 변호사들도 돈을 소중히 여기기에 돈이 약점이 되어서 권력에 휘둘리게 됩니다. 마음이 몸에 붙었기 때문에 몸으로 만나는 것들이 약점이 됩니다. 그 일들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평안은 깨어지고 행복도 사라집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육신이 약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약점이 된 몸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죽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의 약점으로 작용하는 것들에 대해 죽을 때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약점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하나님이 나의 약점이 되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이루고 싶지 않다. 하나님이 없을 바에는 차라리 지금 죽는 편이 낫다. 하나님이 없을 바에는 내 인생의 의미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대해서는 한없이 강합니다. 지구 전체가 저항해도 이 사람을 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치명적인 약점으로 가지고 계셨던 모습이 우리에게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며 십자가를 향해 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치명적 약점이 되시기를 지금도 간절히 원하십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약점에 대해 죽으시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치명적인 약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 마음을 뒤흔드는 약점들은 모두 육신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육신과 연결된 모든 약점들에 대해 죽게 하여 주시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나의 치명적인 약점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그러하셨듯이 하나님을 잃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할 수 있게 하시고, 이 세상에 대해서는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담대하게 맞이할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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